“살아나는 아이들… 난 최고로 행복한 감독”

등록 2006.10.21.
청각장애 학생만 입학이 가능한 충북 충주성심학교. 야구 연습시간만 되면 운동장은 신나는 목소리로 가득하다.

야구선수들은 이 시간만 되면 자기만의 언어로 “파이팅”, “야”라고 외친다. 비장애인이 알아듣기는 힘들지만 누구의 외침보다도 통쾌함과 기쁨이 들어 있다.

“아이들에게 일부러 마음껏 소리를 지르도록 지도합니다. 한번도 크게 소리를 질러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죠.”

국내 최초 청각장애인 야구부인 충주성심학교 야구부를 3년째 맡고 있는 박상수(37·사진) 감독. 그는 청각장애가 생긴 뒤 성대를 못 쓰는 아이들에게 잃어버린 목소리를 돌려주고 싶었다.

프로야구팀 쌍방울 레이더스의 촉망받는 외야수였던 박 감독은 8월 말 창단한 국내 최초 지체장애인 야구팀인 ‘대한장애인야구대표팀’ 감독도 맡아 다시 주목을 받았다. 야구팀을 창단한 정립회관은 그가 특수체육 지도자로 적임자라고 판단해 감독 직을 제의했다.

박 감독은 “더 많은 장애인에게 야구의 묘미를 알려주고 싶어 응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지금처럼 능숙한 특수체육 감독이 되기까지 두 번의 큰 좌절을 겪었다. 프로 선수로 활동한 지 2년이 됐을 무렵인 1995년. 경기 중 슬라이딩을 잘못해 어깨와 무릎을 다쳐 6급 지체장애인이 됐다.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 느낌이었어요. 인생이 끝난 것만 같았습니다.”

박 감독은 건설업체에서 일하며 제2의 인생을 꿈꿨다. 시련은 또 찾아왔다. 운동하다 만난 선배에게 사기를 당해 그동안 모은 돈을 모두 날렸다.

“연이은 실패로 일어서고 싶은 의지조차 없었어요. 그래도 살아야 하니 내가 맨몸으로 할 수 있는 건 역시 야구더라고요.”

박 감독은 ‘야구지도자 자격증’ 시험공부에 돌입해 ‘1급 경기지도자 자격증’을 비롯해 모두 5개의 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이 자격증은 국내에서 서울대 출신 교수, 전직 대만 프로야구 감독 등 5명만이 취득한 자격증이다.

“첫 경기인 2003년도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까지만 감독을 맡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눈에 밟혀 떠날 수가 있어야죠.”

박 감독은 학교 앞 원룸에서 홀로 생활하는 ‘기러기 아빠’다. 아내와 세 아들이 부산에서 생활하고 있어 2, 3주에 한 번씩 가족을 보러 간다. 네 살 난 막내아들과 야구를 배우고 있는 두 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자신을 이해해 주는 가족의 사랑으로 살아간다.

3년간 박 감독의 손을 거쳐 간 학생은 30여 명. 수화를 배우고 아이들과 가까워지고자 6개월간 기숙사 생활을 했던 그는 이제 학생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충주성심학교가 존재하는 한 아이들을 가르치며 특수교육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싶어요. 언젠가는 경기 중 농아들의 경기 집중력에 대한 논문을 쓰고 싶습니다.”

박 감독은 오늘도 장애를 앓는 친구들에게 야구의 기쁨을 주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는 학생들이 중간고사를 치르고 있는 19일에도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산골에 있는 선수의 학부모를 찾았다.

그는 “2년 동안 전화로 설득하다 안 돼 이렇게 왔는데도 완강하시니 앞으로 몇 차례 더 찾아가야 할 것 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충주=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청각장애 학생만 입학이 가능한 충북 충주성심학교. 야구 연습시간만 되면 운동장은 신나는 목소리로 가득하다.

야구선수들은 이 시간만 되면 자기만의 언어로 “파이팅”, “야”라고 외친다. 비장애인이 알아듣기는 힘들지만 누구의 외침보다도 통쾌함과 기쁨이 들어 있다.

“아이들에게 일부러 마음껏 소리를 지르도록 지도합니다. 한번도 크게 소리를 질러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죠.”

국내 최초 청각장애인 야구부인 충주성심학교 야구부를 3년째 맡고 있는 박상수(37·사진) 감독. 그는 청각장애가 생긴 뒤 성대를 못 쓰는 아이들에게 잃어버린 목소리를 돌려주고 싶었다.

프로야구팀 쌍방울 레이더스의 촉망받는 외야수였던 박 감독은 8월 말 창단한 국내 최초 지체장애인 야구팀인 ‘대한장애인야구대표팀’ 감독도 맡아 다시 주목을 받았다. 야구팀을 창단한 정립회관은 그가 특수체육 지도자로 적임자라고 판단해 감독 직을 제의했다.

박 감독은 “더 많은 장애인에게 야구의 묘미를 알려주고 싶어 응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지금처럼 능숙한 특수체육 감독이 되기까지 두 번의 큰 좌절을 겪었다. 프로 선수로 활동한 지 2년이 됐을 무렵인 1995년. 경기 중 슬라이딩을 잘못해 어깨와 무릎을 다쳐 6급 지체장애인이 됐다.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 느낌이었어요. 인생이 끝난 것만 같았습니다.”

박 감독은 건설업체에서 일하며 제2의 인생을 꿈꿨다. 시련은 또 찾아왔다. 운동하다 만난 선배에게 사기를 당해 그동안 모은 돈을 모두 날렸다.

“연이은 실패로 일어서고 싶은 의지조차 없었어요. 그래도 살아야 하니 내가 맨몸으로 할 수 있는 건 역시 야구더라고요.”

박 감독은 ‘야구지도자 자격증’ 시험공부에 돌입해 ‘1급 경기지도자 자격증’을 비롯해 모두 5개의 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이 자격증은 국내에서 서울대 출신 교수, 전직 대만 프로야구 감독 등 5명만이 취득한 자격증이다.

“첫 경기인 2003년도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까지만 감독을 맡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눈에 밟혀 떠날 수가 있어야죠.”

박 감독은 학교 앞 원룸에서 홀로 생활하는 ‘기러기 아빠’다. 아내와 세 아들이 부산에서 생활하고 있어 2, 3주에 한 번씩 가족을 보러 간다. 네 살 난 막내아들과 야구를 배우고 있는 두 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자신을 이해해 주는 가족의 사랑으로 살아간다.

3년간 박 감독의 손을 거쳐 간 학생은 30여 명. 수화를 배우고 아이들과 가까워지고자 6개월간 기숙사 생활을 했던 그는 이제 학생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충주성심학교가 존재하는 한 아이들을 가르치며 특수교육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싶어요. 언젠가는 경기 중 농아들의 경기 집중력에 대한 논문을 쓰고 싶습니다.”

박 감독은 오늘도 장애를 앓는 친구들에게 야구의 기쁨을 주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는 학생들이 중간고사를 치르고 있는 19일에도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산골에 있는 선수의 학부모를 찾았다.

그는 “2년 동안 전화로 설득하다 안 돼 이렇게 왔는데도 완강하시니 앞으로 몇 차례 더 찾아가야 할 것 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충주=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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