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의 ‘인연’은 축복이었습니다”
등록 2008.05.22.외손자 스테판 재키 ‘思祖父曲’ 보내와
지난해 별세한 금아 피천득(琴兒 皮千得)은 수필 ‘인연’에서 생전 아사코를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을….” 하나 그도 봐도 봐도 또 보고픈 이가 있었다. 평생 애지중지했던 딸 피서영 미국 보스턴대 교수. 그리고 외손자인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재키(22) 씨였다.
25일은 금아가 세상을 뜬 지 1년이 되는 날. 재키 씨는 이날을 기려 “생전에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통화했다”는 할아버지를 추억하는 글을 썼다. 글에 서명한 자신의 이름도 스테판 ‘피’ 재키(Stefan Pi Jackiw)였다.
할아버지는 떠났지만 손자는 다시 한국을 찾는다. 다음 달 28일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리더로 있는 클래식 프로젝트 앙상블 ‘디토(Ditto)’에 참여해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리사이틀을 갖는다. 피는 그렇게 이어진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음악을 정말 사랑했던 당신
‘피에타’ 보고 감격하던 당신
“난 축복받은 삶”이라던 당신
제겐 당신이 축복이었습니다
한 살 때부터 열두 살 때까지 저는 거의 매년 여름 한 달간 할아버지를 방문했습니다. 정확한 기억은 네 살 때부터입니다. (…) 할아버지와 카드놀이, 공원산책도 하고 박물관도 갔죠. 가끔은 단둘이서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도 했습니다. 어딜 가도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알아보고 인사했었죠.
네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켰던 저는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 ‘아마데우스’의 비디오테이프를 갖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보고 또 봤죠. 잠자리에 들 때도 내일 할아버지와 또 봐야지 하는 기대에 부풀곤 했습니다. 영화 속 대사도 거의 다 외울 정도였어요. (…)
한 번은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로맨스도 얘기해주셨습니다. 30여 년 전 할아버지의 시에 곡을 붙인 어느 유명 여성 작곡가와의 추억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음악을 함께 들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보물 중에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친필 서명한 책도 기억납니다. 두 분은 할아버지가 1955∼56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하버드대에 체류할 때 만나셨습니다. 프로스트는 ‘극동에서 온 자그만 신사’와 영문학이나 서구문화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게 즐겁다고 말했답니다. 할아버지는 그가 서명한 책 한 권을 제게 주셨습니다.(…)
또 다른 여름, 할아버지와 우리 가족은 함께 유럽을 여행했습니다. 로마에서 할아버지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고 매우 감격하셨습니다. 당신의 서재에는 미국의 제자가 선물로 보내왔다는 피에타 사진이 걸려있었죠. 할아버지는 배 타는 것을 무서워하셨지만 아름다운 베네치아는 좋아하셨습니다.
여섯 살 때는 아일랜드와 프랑스도 갔습니다. (…) 더블린에 간 할아버지는 시인 예이츠의 나라에 가 보고 싶다는 당신의 평생소원을 이루셨습니다. 예이츠의 무덤에서 할아버지는 제게 비문에 새겨진 문구를 외우라고 하셨죠. ‘삶과, 죽음을, 냉정히 바라보라, 길손이여, 지나가라(Cast a cold eye on life, on death, horseman, pass by).’ 파리에서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도 보고, 오르셰 미술관도 갔습니다. (…)
몇 년 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갔을 땐 스티븐 호킹 박사도 만났습니다. 호킹 박사는 할아버지께 깊은 인상을 남겼죠. 당시 어느 날 연로하신 할아버지가 케임브리지대 교정을 거니느라 몇 시간씩 사라지셔서,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했던지. (…)
할아버지가 쓴 수필 ‘서영이’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다행히 내가 오래 살면 서영이 집 근처에서 살겠다. 그 애의 아이 둘이 날마다 놀러 올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우린 3000마일쯤 떨어져 살았습니다. 그래도 당신께서 원하셨던 행복한 시간을 우린 함께 보냈습니다.
열두 살 이후엔 제가 바이올린 캠프에 다녀야 해서 여름이 돼도 한국에 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통화했고, 영어로 번역된 할아버지의 시와 수필을 읽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존재는 제가 이렇게 당당한 젊은이로 성장하는 밑거름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저의 음악적 재능을 기뻐하셨습니다. 당신은 제게 유명한 거문고 연주자였던 당신 어머니의 재능이 대물림됐다고 믿으셨습니다.
저의 오랜 소원은 할아버지 생전에 서울에서 공연하는 것이었습니다. 2006년 서울시향의 초청으로 열린 한국에서의 첫 연주에서 앙코르 곡을 할아버지에게 바쳤습니다. 그것이 제가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것이었습니다.
전화를 하면서 할아버지는 자주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당신께선 축복받은 삶을 살았다고.
▼‘사랑하다 떠난이’를 기리며…▼
25일 경기 모란공원서 추모식
시비 제막, 추모집 4권도 발간
25일 1주기를 맞는 금아 피천득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마련된다.
당일 오후 4시 고인이 잠든 경기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는 그의 삶과 문학을 기리는 추모식이 거행된다. 금아의 둘째 아들인 피수영(65) 울산대 의대 소아과 교수를 포함한 유족 및 지인들이 참석한다. 추모식명은 ‘사랑하다 떠난 이’로 정해졌다.
시비(詩碑)도 세워진다. 서울대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90명 제자들이 힘을 모았다. 가로 세로 120×70cm 크기의 비명은 ‘금아시비(琴兒詩碑)’. 아들 피 교수의 부인인 홍영선(58) 씨가 글씨를 썼다. 아래에는 서예가 조주연 씨가 쓴 금아의 시 ‘너’의 전문이 새겨진다. 신명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너’는 고인이 생전에 가장 아끼시던 시”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23일에는 추모집 ‘피천득 문학전집’(샘터사)도 발간된다. ‘인연’ ‘생명’ ‘내가 사랑하는 시’ ‘셰익스피어 소네트 시집’ 등 4권으로 묶였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금아 피천득 선생 25일 1주기 맞아
외손자 스테판 재키 ‘思祖父曲’ 보내와
지난해 별세한 금아 피천득(琴兒 皮千得)은 수필 ‘인연’에서 생전 아사코를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을….” 하나 그도 봐도 봐도 또 보고픈 이가 있었다. 평생 애지중지했던 딸 피서영 미국 보스턴대 교수. 그리고 외손자인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재키(22) 씨였다.
25일은 금아가 세상을 뜬 지 1년이 되는 날. 재키 씨는 이날을 기려 “생전에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통화했다”는 할아버지를 추억하는 글을 썼다. 글에 서명한 자신의 이름도 스테판 ‘피’ 재키(Stefan Pi Jackiw)였다.
할아버지는 떠났지만 손자는 다시 한국을 찾는다. 다음 달 28일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리더로 있는 클래식 프로젝트 앙상블 ‘디토(Ditto)’에 참여해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리사이틀을 갖는다. 피는 그렇게 이어진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음악을 정말 사랑했던 당신
‘피에타’ 보고 감격하던 당신
“난 축복받은 삶”이라던 당신
제겐 당신이 축복이었습니다
한 살 때부터 열두 살 때까지 저는 거의 매년 여름 한 달간 할아버지를 방문했습니다. 정확한 기억은 네 살 때부터입니다. (…) 할아버지와 카드놀이, 공원산책도 하고 박물관도 갔죠. 가끔은 단둘이서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도 했습니다. 어딜 가도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알아보고 인사했었죠.
네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켰던 저는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 ‘아마데우스’의 비디오테이프를 갖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보고 또 봤죠. 잠자리에 들 때도 내일 할아버지와 또 봐야지 하는 기대에 부풀곤 했습니다. 영화 속 대사도 거의 다 외울 정도였어요. (…)
한 번은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로맨스도 얘기해주셨습니다. 30여 년 전 할아버지의 시에 곡을 붙인 어느 유명 여성 작곡가와의 추억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음악을 함께 들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보물 중에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친필 서명한 책도 기억납니다. 두 분은 할아버지가 1955∼56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하버드대에 체류할 때 만나셨습니다. 프로스트는 ‘극동에서 온 자그만 신사’와 영문학이나 서구문화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게 즐겁다고 말했답니다. 할아버지는 그가 서명한 책 한 권을 제게 주셨습니다.(…)
또 다른 여름, 할아버지와 우리 가족은 함께 유럽을 여행했습니다. 로마에서 할아버지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고 매우 감격하셨습니다. 당신의 서재에는 미국의 제자가 선물로 보내왔다는 피에타 사진이 걸려있었죠. 할아버지는 배 타는 것을 무서워하셨지만 아름다운 베네치아는 좋아하셨습니다.
여섯 살 때는 아일랜드와 프랑스도 갔습니다. (…) 더블린에 간 할아버지는 시인 예이츠의 나라에 가 보고 싶다는 당신의 평생소원을 이루셨습니다. 예이츠의 무덤에서 할아버지는 제게 비문에 새겨진 문구를 외우라고 하셨죠. ‘삶과, 죽음을, 냉정히 바라보라, 길손이여, 지나가라(Cast a cold eye on life, on death, horseman, pass by).’ 파리에서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도 보고, 오르셰 미술관도 갔습니다. (…)
몇 년 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갔을 땐 스티븐 호킹 박사도 만났습니다. 호킹 박사는 할아버지께 깊은 인상을 남겼죠. 당시 어느 날 연로하신 할아버지가 케임브리지대 교정을 거니느라 몇 시간씩 사라지셔서,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했던지. (…)
할아버지가 쓴 수필 ‘서영이’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다행히 내가 오래 살면 서영이 집 근처에서 살겠다. 그 애의 아이 둘이 날마다 놀러 올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우린 3000마일쯤 떨어져 살았습니다. 그래도 당신께서 원하셨던 행복한 시간을 우린 함께 보냈습니다.
열두 살 이후엔 제가 바이올린 캠프에 다녀야 해서 여름이 돼도 한국에 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통화했고, 영어로 번역된 할아버지의 시와 수필을 읽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존재는 제가 이렇게 당당한 젊은이로 성장하는 밑거름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저의 음악적 재능을 기뻐하셨습니다. 당신은 제게 유명한 거문고 연주자였던 당신 어머니의 재능이 대물림됐다고 믿으셨습니다.
저의 오랜 소원은 할아버지 생전에 서울에서 공연하는 것이었습니다. 2006년 서울시향의 초청으로 열린 한국에서의 첫 연주에서 앙코르 곡을 할아버지에게 바쳤습니다. 그것이 제가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것이었습니다.
전화를 하면서 할아버지는 자주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당신께선 축복받은 삶을 살았다고.
▼‘사랑하다 떠난이’를 기리며…▼
25일 경기 모란공원서 추모식
시비 제막, 추모집 4권도 발간
25일 1주기를 맞는 금아 피천득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마련된다.
당일 오후 4시 고인이 잠든 경기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는 그의 삶과 문학을 기리는 추모식이 거행된다. 금아의 둘째 아들인 피수영(65) 울산대 의대 소아과 교수를 포함한 유족 및 지인들이 참석한다. 추모식명은 ‘사랑하다 떠난 이’로 정해졌다.
시비(詩碑)도 세워진다. 서울대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90명 제자들이 힘을 모았다. 가로 세로 120×70cm 크기의 비명은 ‘금아시비(琴兒詩碑)’. 아들 피 교수의 부인인 홍영선(58) 씨가 글씨를 썼다. 아래에는 서예가 조주연 씨가 쓴 금아의 시 ‘너’의 전문이 새겨진다. 신명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너’는 고인이 생전에 가장 아끼시던 시”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23일에는 추모집 ‘피천득 문학전집’(샘터사)도 발간된다. ‘인연’ ‘생명’ ‘내가 사랑하는 시’ ‘셰익스피어 소네트 시집’ 등 4권으로 묶였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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