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07]임정 수립 90년…청사 유적 일부는 곧 헐릴 위기

등록 2009.04.07.
◆임정 90년, 현장 르포

(박제균 앵커)올해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지 9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945년 11월까지 중국에 머물렀던 임정의 행보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상하이를 떠난 임정은 항저우, 창사 등을 거쳐 1940년 충칭에 이르러서야 긴 여정을 끝냈습니다.

(김현수 앵커)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포함한 탐방단이 최근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임정의 여정을 되짚어 보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탐방단과 함께 현지를 돌아보면서 임정 유적의 복원 현황을 취재한 문화부 금동근 기자가 스튜디오에 나왔습니다. 금 기자, 첫 방문지였던 상하이 임정 청사의 복원 상태는 어땠습니까.

(금동근)상하이에 복원돼 있는 임정 청사는 과거 프랑스 조계 지역이던 구도심의 로만구에 있는 3층짜리 낡은 건물입니다. 1층에는 당시 사용되던 형태의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었고, 임정 요인들이 사용하던 집무실과 침실, 부엌과 화장실까지 옛 모습 그대로 재현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임시정부 청사라지만, 너무 낡고 비좁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3층에 마련된 자료실도 좁은 공간 때문에 자료가 충분하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박 앵커) 한창 개발 중인 상하이에서 임정 청사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지 걱정하는 사람이 많은데요.

(금) 네, 임정 청사가 있는 지역에는 고층 아파트 건축이 한창이었습니다. 청사와 마주보고 있는 건물도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청사가 현재는 로만구의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만 언젠가는 개발논리에 밀려 그 자리를 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상하이에서는 1932년 4월 29일에 윤봉길 의사가 폭탄 의거를 일으킨 훙커우 공원도 방문했습니다. 공원 내 호숫가에는 윤 의사의 기념관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윤 의사의 호를 따 `매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고, 동영상과 사진 등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독립열사들이 묻혀 있던 만국공묘도 방문했는데요, 열사들의 유해는 이미 한국으로 봉환됐고 지금은 묘석만 남아 있었습니다.

(김 앵커)상하이 다음 항저우 청사는 어땠습니까.

(금) 항저우는 상하이의 남서쪽에 있는데요,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요인들의 거처는 항저우에 가까운 자싱에 있었습니다. 백범 선생이 자싱에서 머무르던 매만가의 가옥에선 백범 선생의 침실이 특히 눈길을 끌었는데요, 한쪽 바닥에 마련된 비상통로 때문이었습니다. 백범 선생은 일제가 들이닥치면 이 통로를 통해 뒷문으로 나가 문밖에 있던 배를 타고 호수로 피신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뒷문 밖에는 나룻배 한 척이 매어져 있어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박 앵커) 네 그랬군요. 임정은 마지막으로 충칭에 자리를 잡기까지 여러 도시를 거쳤지요. 도중에 머무른 도시에는 어떤 유적이 남아 있던가요.

(금) 임정은 2년 정도 체류했던 전장을 제외하고는 짧게는 석 달, 길어봐야 일곱 달 정도씩 머무르면서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을 거쳤습니다. 잘 복원된 항저우의 호변촌 청사 건물 외에 다른 도시에는 임정이 사용했던 청사가 보존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창사에선 백범 선생이 총격을 당했던 남목청의 조선혁명당 본부가 창사시의 주도로 복원되고 있었습니다. 탐방단이 방문했을 땐 터를 다지는 공사가 한창이었는데요 10월경이면 깨끗하게 단장된 기념관을 볼 수 있을 전망입니다. 임정이 중국에서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충칭의 연화지 청사는 다른 임정 유적들에 비해 잘 복원됐고 체계적으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정부 청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의 규모와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탐방단은 옛날 임정 요인들이 기념촬영을 했던 계단을 걸으며 당시 상황을 떠올려보기도 했습니다.

(김 앵커) 충칭에 있는 다른 유적의 보존 상태는 어땠습니까.

(금) 임정이 충칭에서 세 번째로 사용한 오사야항 청사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이번 탐방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곳입니다.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놓은 허름한 외관에다, 곳곳에 거미줄과 이끼가 가득한 모습이었습니다. 백범 선생이 머물면서 `백범일지` 하권을 저술한 곳이기도 한데요, 재개발로 곧 헐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충칭 시내 한 가운데 있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 건물은 `미원`이라는 식당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사유지라서 들어가 볼 수도 없었습니다. 이곳 역시 임정 흔적이 남아 있는 2층이 곧 리모델링으로 사라질 예정이어서 탐방단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박 앵커) 정말 안타깝군요. 건국의 아버지들을 홀대하는 나라는 미래가 없습니다. 한국인들이 임정의 유적을 많이 방문해서 유적의 중요성을 중국인들에게 알려주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금 기자, 수고했습니다.

◆임정 90년, 현장 르포

(박제균 앵커)올해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지 9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945년 11월까지 중국에 머물렀던 임정의 행보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상하이를 떠난 임정은 항저우, 창사 등을 거쳐 1940년 충칭에 이르러서야 긴 여정을 끝냈습니다.

(김현수 앵커)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포함한 탐방단이 최근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임정의 여정을 되짚어 보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탐방단과 함께 현지를 돌아보면서 임정 유적의 복원 현황을 취재한 문화부 금동근 기자가 스튜디오에 나왔습니다. 금 기자, 첫 방문지였던 상하이 임정 청사의 복원 상태는 어땠습니까.

(금동근)상하이에 복원돼 있는 임정 청사는 과거 프랑스 조계 지역이던 구도심의 로만구에 있는 3층짜리 낡은 건물입니다. 1층에는 당시 사용되던 형태의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었고, 임정 요인들이 사용하던 집무실과 침실, 부엌과 화장실까지 옛 모습 그대로 재현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임시정부 청사라지만, 너무 낡고 비좁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3층에 마련된 자료실도 좁은 공간 때문에 자료가 충분하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박 앵커) 한창 개발 중인 상하이에서 임정 청사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지 걱정하는 사람이 많은데요.

(금) 네, 임정 청사가 있는 지역에는 고층 아파트 건축이 한창이었습니다. 청사와 마주보고 있는 건물도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청사가 현재는 로만구의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만 언젠가는 개발논리에 밀려 그 자리를 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상하이에서는 1932년 4월 29일에 윤봉길 의사가 폭탄 의거를 일으킨 훙커우 공원도 방문했습니다. 공원 내 호숫가에는 윤 의사의 기념관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윤 의사의 호를 따 `매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고, 동영상과 사진 등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독립열사들이 묻혀 있던 만국공묘도 방문했는데요, 열사들의 유해는 이미 한국으로 봉환됐고 지금은 묘석만 남아 있었습니다.

(김 앵커)상하이 다음 항저우 청사는 어땠습니까.

(금) 항저우는 상하이의 남서쪽에 있는데요,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요인들의 거처는 항저우에 가까운 자싱에 있었습니다. 백범 선생이 자싱에서 머무르던 매만가의 가옥에선 백범 선생의 침실이 특히 눈길을 끌었는데요, 한쪽 바닥에 마련된 비상통로 때문이었습니다. 백범 선생은 일제가 들이닥치면 이 통로를 통해 뒷문으로 나가 문밖에 있던 배를 타고 호수로 피신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뒷문 밖에는 나룻배 한 척이 매어져 있어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박 앵커) 네 그랬군요. 임정은 마지막으로 충칭에 자리를 잡기까지 여러 도시를 거쳤지요. 도중에 머무른 도시에는 어떤 유적이 남아 있던가요.

(금) 임정은 2년 정도 체류했던 전장을 제외하고는 짧게는 석 달, 길어봐야 일곱 달 정도씩 머무르면서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을 거쳤습니다. 잘 복원된 항저우의 호변촌 청사 건물 외에 다른 도시에는 임정이 사용했던 청사가 보존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창사에선 백범 선생이 총격을 당했던 남목청의 조선혁명당 본부가 창사시의 주도로 복원되고 있었습니다. 탐방단이 방문했을 땐 터를 다지는 공사가 한창이었는데요 10월경이면 깨끗하게 단장된 기념관을 볼 수 있을 전망입니다. 임정이 중국에서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충칭의 연화지 청사는 다른 임정 유적들에 비해 잘 복원됐고 체계적으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정부 청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의 규모와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탐방단은 옛날 임정 요인들이 기념촬영을 했던 계단을 걸으며 당시 상황을 떠올려보기도 했습니다.

(김 앵커) 충칭에 있는 다른 유적의 보존 상태는 어땠습니까.

(금) 임정이 충칭에서 세 번째로 사용한 오사야항 청사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이번 탐방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곳입니다.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놓은 허름한 외관에다, 곳곳에 거미줄과 이끼가 가득한 모습이었습니다. 백범 선생이 머물면서 `백범일지` 하권을 저술한 곳이기도 한데요, 재개발로 곧 헐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충칭 시내 한 가운데 있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 건물은 `미원`이라는 식당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사유지라서 들어가 볼 수도 없었습니다. 이곳 역시 임정 흔적이 남아 있는 2층이 곧 리모델링으로 사라질 예정이어서 탐방단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박 앵커) 정말 안타깝군요. 건국의 아버지들을 홀대하는 나라는 미래가 없습니다. 한국인들이 임정의 유적을 많이 방문해서 유적의 중요성을 중국인들에게 알려주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금 기자, 수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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