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석 “광고천재? 사실은 광고바보…”

등록 2010.04.28.
◆뉴스데이트: 광고천재, 이제석

(박제균 앵커) 지방대 출신으로 한국에서 변변한 일자리를 얻지 못했던 20대 청년이 미국으로 건너간 지 1년 만에 수많은 국제광고제에서 수상을 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김정안 앵커) 바로 광고인 이제석 씨의 이야기인데요. 기발한 아이디어로 세상을 바꾸는 광고를 만드는 이제석씨를 구가인 기자가 인터뷰했습니다.



광고1 / (자막) "대기오염으로 한 해 6만 명이 사망합니다."

환경오염을 경고한 공익광고. 카피는 한 줄로도 충분합니다.

광고2 / (자막) "뿌린 대로 거두리라(What goes around comes around)."

자신을 겨냥한 총구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수많은 광고제에서 수상한 반전단체의 공익광고입니다.

광고3 / (자막) "오늘밤 누군가는 이 신문을 이불로 써야 합니다."

신문지 두장으로 만든 이불의 온기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이 모든 광고들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나이로 스물아홉. 이제석 씨는 서른도 안돼 원쇼 페스티벌과 클리오 어워드 등 세계 유수의 광고제에서 40여 차례 수상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광고 천재라고 부릅니다.

(인터뷰) 이제석 / 이제석 광고 연구소

"누가 물어보면 광고 바보라고 그래요. 상 받은 게 열점이다, 그러면 바보 같은 아이디어가요. 캐비넷 큰 거에 몇 개 될 정도로 다 있어요. 그래서 바보 같은 걸 엄청 하다가 몇 작품 좋은 게 나왔는데... 그걸 사람들이 알면 저를 천재라고 안하겠죠."

사실 그는 2006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한국에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지방대 시각디자인과 출신. 좋아하는 일엔 무식하게 몰입한 덕에 평균 학점은 만점에 가까웠지만, 세상은 지방대생에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기업에 입사 원서를 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고, 그 흔한 광고공모전에서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좌절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기가 생겼습니다.



(인터뷰)

"좌절하지 않았어요. 어, 니가 날 안 좋아는 구나 그렇게 생각했지. 나는 왜 루저일까 생각해본 적 없고요. 찌그러지는 게 아니라 튀어 오릅니다. 때리면 때릴수록 더 높이 뛰어올라요. 지금까지 저를 구박하고 홀대하고 문전 박대하던 사람들이 저를 키웠어요. 그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말씀드리고 싶은 거지."

유학 생활 역시 쉽진 않았습니다. 가난한 형편에, 언어가 서툰 동양 유학생은 남들보다 배로 노력했습니다.

(인터뷰)

"내 가 얼마나 배우고 싶은지를 어필했죠. 그러니까 받아줬죠. 영어도 잘 못했고. 수업도 못 따라가고. 엄청 부진아였어요. 수업 갔는데 숙제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제가 그냥 재밌어하는 모습 보고 미친 듯 하는 거 보더니... 파란 눈동자 외국인도 감동한거 같아요. 그리고 더 많이 가르쳐 준거 같아요."

고생 끝 성공. 세계 유수의 광고전에서 재능을 뽐낸 동양 젊은이는 대학 졸업 후 미국의 메이저급 광고회사들로부터 러브 콜을 받습니다.

남부러워 할 회사를 거치며 몸값을 높이던 것도 잠시. 그는 다시 회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돈 많은 기업을 위한 광고가 아닌 세상을 바꾸는 광고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인터뷰)

"광고를 통해 자산을 축적하고, 돈을 벌순 있겠죠. 그런데 돈보다는 작업이 제 재산이에요. 당장 돈이 된다 해서 인생의 가치를 돈에 둬서는 가치 있는 것들을 못하게 되죠. 비싼 게 가치 있진 않거든요."

이 씨는 현재 일본, 미국 등에 있는 광고인들과 연계해 세상에 기여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사회적 기업과 시민단체의 공익광고 기획을 돕는 한편, 과거 자신과 같이 숨어 있는 진주를 발굴하기 위한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그의 꿈은 뭘까요. 그는 광고쟁이에 머무르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크리에이터가 되고 싶고 아이디어맨이 되고 싶지, 광고쟁이에 머물고 싶진 않습니다. 별은 불이 붙어서 타면서 자길 빛내는, 태양도 마찬가지고요. 저를 남김없이 태울 때 더 빛이 나지 않겠나."

동아일보 구가인입니다.

◆뉴스데이트: 광고천재, 이제석

(박제균 앵커) 지방대 출신으로 한국에서 변변한 일자리를 얻지 못했던 20대 청년이 미국으로 건너간 지 1년 만에 수많은 국제광고제에서 수상을 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김정안 앵커) 바로 광고인 이제석 씨의 이야기인데요. 기발한 아이디어로 세상을 바꾸는 광고를 만드는 이제석씨를 구가인 기자가 인터뷰했습니다.



광고1 / (자막) "대기오염으로 한 해 6만 명이 사망합니다."

환경오염을 경고한 공익광고. 카피는 한 줄로도 충분합니다.

광고2 / (자막) "뿌린 대로 거두리라(What goes around comes around)."

자신을 겨냥한 총구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수많은 광고제에서 수상한 반전단체의 공익광고입니다.

광고3 / (자막) "오늘밤 누군가는 이 신문을 이불로 써야 합니다."

신문지 두장으로 만든 이불의 온기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이 모든 광고들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나이로 스물아홉. 이제석 씨는 서른도 안돼 원쇼 페스티벌과 클리오 어워드 등 세계 유수의 광고제에서 40여 차례 수상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광고 천재라고 부릅니다.

(인터뷰) 이제석 / 이제석 광고 연구소

"누가 물어보면 광고 바보라고 그래요. 상 받은 게 열점이다, 그러면 바보 같은 아이디어가요. 캐비넷 큰 거에 몇 개 될 정도로 다 있어요. 그래서 바보 같은 걸 엄청 하다가 몇 작품 좋은 게 나왔는데... 그걸 사람들이 알면 저를 천재라고 안하겠죠."

사실 그는 2006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한국에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지방대 시각디자인과 출신. 좋아하는 일엔 무식하게 몰입한 덕에 평균 학점은 만점에 가까웠지만, 세상은 지방대생에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기업에 입사 원서를 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고, 그 흔한 광고공모전에서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좌절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기가 생겼습니다.



(인터뷰)

"좌절하지 않았어요. 어, 니가 날 안 좋아는 구나 그렇게 생각했지. 나는 왜 루저일까 생각해본 적 없고요. 찌그러지는 게 아니라 튀어 오릅니다. 때리면 때릴수록 더 높이 뛰어올라요. 지금까지 저를 구박하고 홀대하고 문전 박대하던 사람들이 저를 키웠어요. 그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말씀드리고 싶은 거지."

유학 생활 역시 쉽진 않았습니다. 가난한 형편에, 언어가 서툰 동양 유학생은 남들보다 배로 노력했습니다.

(인터뷰)

"내 가 얼마나 배우고 싶은지를 어필했죠. 그러니까 받아줬죠. 영어도 잘 못했고. 수업도 못 따라가고. 엄청 부진아였어요. 수업 갔는데 숙제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제가 그냥 재밌어하는 모습 보고 미친 듯 하는 거 보더니... 파란 눈동자 외국인도 감동한거 같아요. 그리고 더 많이 가르쳐 준거 같아요."

고생 끝 성공. 세계 유수의 광고전에서 재능을 뽐낸 동양 젊은이는 대학 졸업 후 미국의 메이저급 광고회사들로부터 러브 콜을 받습니다.

남부러워 할 회사를 거치며 몸값을 높이던 것도 잠시. 그는 다시 회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돈 많은 기업을 위한 광고가 아닌 세상을 바꾸는 광고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인터뷰)

"광고를 통해 자산을 축적하고, 돈을 벌순 있겠죠. 그런데 돈보다는 작업이 제 재산이에요. 당장 돈이 된다 해서 인생의 가치를 돈에 둬서는 가치 있는 것들을 못하게 되죠. 비싼 게 가치 있진 않거든요."

이 씨는 현재 일본, 미국 등에 있는 광고인들과 연계해 세상에 기여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사회적 기업과 시민단체의 공익광고 기획을 돕는 한편, 과거 자신과 같이 숨어 있는 진주를 발굴하기 위한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그의 꿈은 뭘까요. 그는 광고쟁이에 머무르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크리에이터가 되고 싶고 아이디어맨이 되고 싶지, 광고쟁이에 머물고 싶진 않습니다. 별은 불이 붙어서 타면서 자길 빛내는, 태양도 마찬가지고요. 저를 남김없이 태울 때 더 빛이 나지 않겠나."

동아일보 구가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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