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럽게 잠드는 의로운 시민들

등록 2010.05.13.
(박제균 앵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5월 13일 동아 뉴스 스테이션입니다.

오늘은 탐사리포트 3번째 순서로, 천안함 구조작업에 나섰다 침몰한 금양호 선원들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구가인 앵커) 선원들의 죽음은 천안함 장병들 못지않게 가치 있는 희생이었는데요. 사건을 집중 취재한 영상뉴스팀 신광영 기자가 스튜디오에 나와 있습니다. 신 기자, 금양호가 침몰한 지 오늘로 42일짼데요. 사고 수습은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신광영 기자) 사고 한 달 만에 시작된 선원들의 장례절차는 지난 주 끝났고, 지금은 희생자 예우 문제를 두고 정부와 협의 중입니다. 유족들은 선원들의 죽음에 대한 정부의 태도에 상처를 입은 모습이었습니다.



>

홀로 키운 아들을 잃고 어머니는 아들의 얼굴에 손을 올립니다.

위쪽에는 영정사진이 아래에는 평소 입던 운동복이 놓여있습니다.

모시 안에는 볏짚으로 만든 마네킹이 누워있습니다.

배안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털실로 짠 꽃병. 바닷바람에 닳고 닳은 파카.

고인들이 남긴 물건들이 관을 채우고 있습니다.

시신 없는 관을 부여잡고 유족들은 목 놓아 웁니다.

부축을 받으며 입관식장을 나가면서도 어머니는 차마 아들을 보내지 못합니다.

나무관 7개에 하나하나 적힌 이름들. 바로 실종된 금양호 선원들입니다.

***

쌍끌이 어선인 금양 97호와 98호.

천안함 수색을 도와달라는 해군의 요청을 받고 백령도 앞바다로 나섰지만 수색작업을 하고 돌아오는 길 9명이 탄 98호는 캄보디아 어선과 충돌해 침몰했습니다.

(인터뷰) 김종영 / 97호 선장

"좀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뭐 그런 말도 없이 가게 된 거에요."

사고 이튿날 시신 2구가 발견됐지만 나머지 7구는 아직 바다 속에 있습니다.

금양호가 침몰한지 33일째 되던 입관식 날.

정운찬 국무총리가 사고 후 처음으로 금양호 선원들의 유족을 찾았습니다.

일주일 전 유족들이 정 총리를 만나기 위해 정부청사를 찾았을 때 총리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정운찬 / 국무총리

"(그 때 면담이 안 되었던 이유가?) 그 때 연락을 제대로 못 받았어요."

유족들은 총리실 방문 13일 전 금양호 사후조치에 대한 의견서와 면담 요청서를 총리실에 보냈습니다.

사고 후 열흘이 지났지만 정부차원의 수습 대책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이원상 / 금양호 유가족 대표

"우리가 직접 작성한 걸로 직통 메일로도 보내고 그 대표 팩스로도 보냈어요, 공문서를."

사고수습대책본부가 마련된 인천 중구청도 같은 문건을 보냈습니다.

(인터뷰) 인천 중구청

"저희는 총리실 연결해서 바로 다이렉트로 집어넣었죠. (총리실 어디로 보내시는 거예요?) 농림수산식품 담당자가 있습니다. 제가 아마 두 군데 다 넣었을 겁니다. 상황실도 넣고 전화도 다 통화를 했거든요.

하지만 그에 대한 회신은 없었습니다.

총리까지 보고가 올라가는 과정에서 유족들의 요청이 누락됐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이원상 / 금양호 유가족 대표

"직접 중앙정부청사로 올라가서 확인해본 결과 우리의 요구 사항 7가지를 제시하니까 그걸 조원동 사무차장이 요구 조건에 이런 것도 있었냐고 반문을 하는 것 보면 밑에서 우리가 아무리 떠들고 요구를 해도 올라갈 사항만 올라간다는 거죠."

결국 총리실까지 찾았던 금양호 유족들은 빈손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천안함 희생 장병 46명의 합동영결식이 전 국민의 애도 속에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정부가 천안함 사고 수습에만 매달리는 사이 한국인 선원 중 유일하게 시신이 발견된 김종평 씨는 인천가족공원에서 화장된 뒤 무연고 납골당에 안치됐습니다.

김 씨가 잠들어 있는 곳은 한참을 찾아도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유해는 손이 닿지 않는 맨 위 줄에 있었습니다.

***

금양 98호는 정부의 인양 포기 방침에 따라 대청도 앞바다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쌍끌이 어선으로 함께 사고 현장에 있었던 금양 97호는 98호와 쌍둥이. 97호를 보는 건 바다에 잠겨있는 98호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인천항에 정박해있는 금양 97호에 올라타 봤습니다.

뱃전이 심하게 녹슬어 배 이름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세월에 삭은 듯 배 옆면에 구멍이 송송 나있고 난간도 심하게 휘었습니다.

배 바닥도 곳곳에 녹물이 고여 썩어가고 있습니다.

기관실 위로 펄럭이는 태극기. 3분의 1정도가 찢겨 있습니다.

금양호 선원들이 잡은 물고기를 실어 나르던 어부는 하늘로 간 동료들을 떠올리며 허탈하게 말합니다.

(인터뷰) 동료 선원

"배운 도둑이 그것(뱃일) 뿐인데 어디 육지에서 벌어먹고 살 길이 있어야지. 배운 도둑이 배 밖에 없거든. 어쩔 수가 없는 거야. 허무하고, 한편으론 허무해."

***

(박 앵커) 침몰한 배와 똑같이 생긴 금양97호를 보니까 이런 배로 어떻게 구조에 나서려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요.

(신 기자) 그런 곳에서 10년 넘게 일했던 선원들은 다들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희생된 금양호 선원 9명 중 결혼해 가정을 꾸린 사람은 한 명 뿐이었습니다.

배운 게 없어서, 사업이 망해서, 코리안 드림을 위해서 바다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희생자 중 막내 선원인 허석희 씨는 당뇨와 허리디스크를 앓고 있는 홀어머니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배에 탔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친척집을 전전하며 자란 허 씨는 돈부터 벌겠다며 배만 타다 2년이 넘도록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인터뷰) 이연순 / 허석희 선원 작은 어머니

"한 번이라도 따뜻하게 밥 한 그릇 먹게 `와라, 와라` 했는데 `다음에 올 게요` 그랬는데 그냥 대답으로 끝났어요. 대답으로 그냥 효도하고 갔어. 이제는 눈물도 안 나와. 머릿속에 목소리는 들어있는데. 울면 못 간데요, 망자가. 다음에는 부잣집 좋은데서 태어나서 고생 안하고 잘 먹고 잘 얻어먹고 살라고 했어요."

한 번 배를 타면 6개월에서 1년 동안 바다에 있었던 선원들은 평소 가족들을 자주 보지 못하는 것을 힘들어했습니다.

어렵게 가족들을 만날 때마다 이번까지만 타겠다고 다짐했지만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했습니다.

(인터뷰) 이명숙 / 이용상 선원 동생

"엄마도 11년 전에 병환으로 돌아가셨는데 배 탈 때여서 연락이 안 되서 엄마 임종하는 것도 못 봤거든요. 배 타고 나와서 납골당 가서 인사하고 그러고 왔어요. 그 때 배를 타지 말라고 했었거든요. 조금만 돈 더 벌어서 나온다고…"

***

돈 때문에 배를 탔지만 나라의 부름을 외면하지 않았던 선원들.

(인터뷰) 윤도헌 / 금양수산 사무국장

"(해군에서) 그런 게 요청이 왔으니까 똑같은 바다 사람들인데 안 해줬겠어요, 같이."

하지만 배가 침몰한 뒤 생긴 사고수습대책본부는 이들의 넋을 위로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인터뷰) 인천 중구청 관계자

"이 사건을 천안함하고 같이 생각을 하시잖아요. 저희 이 사고수습본부가 왜 만들어져야 되냐를 먼저 파악하셔야 되요. 사고수습본부는 조업 중 사고라고 판단을 했기 때문에 만든 거거든요. 사고수습대책본부의 계획이 조업 안전대책이에요. 그러니까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없죠."

유족들은 희생선원들에 대해 의사자 지정과 국립묘지 안장 등의 예우를 요구했지만 사고수습을 담당하는 인천 중구청은 이런 요구를 중앙정부에 전달만 할 뿐이었습니다.

지난달 29일 천안함 영결식이 끝나고서야 금양호 유족과 정부의 협상이 본격화됐고 유족들은 선체인양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선원들에게 의사자에 준하는 예우를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실종 선원의 경우 사건 후 1년이 지나야 사망으로 인정되고 그에 따라 의사자 지정 여부를 논의할 수 있기 때문에 `준하는 예우`로 선을 그은 겁니다.

(인터뷰) 이원상 / 금양호 유가족 대표

"모든 걸 다 포기했는데도 정부에서는 처음 내놓은 안에서 변한 게 없어요. 겨우 하나 나오는 게 의사자에 준하는 예우. 준하는 예우라는 건 규정에 없어요. 의사자에 준하는 예우라는 건 준하기 때문에 정해지진 않은 거 아닙니까. 못 한다 안 된다하면 끝이에요."

하지만 정부는 합의 내용을 공개한 이상 지킨다는 방침입니다.

(인터뷰) 강준석 / 농림수산식품부 수산정책관

"정부가 한다 하면 하는 거지. 정부를 못 믿으면 누굴 믿겠습니까."

금양호 선원들의 국립묘지 안장여부도 의사자 지정이 된 뒤 보훈청 심사를 통과해야 합니다.

(인터뷰) 강준석 / 농림수산식품부 수산정책관

"의사자가 일단 되어야 되고 다시 심의를 열어서 합당 여부를 결정하게 되는 거죠. 시신이 없는 상황에서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도 어폐가 있는 상황이죠."

하지만 시신을 찾지 못한 천안함 장병 6명은 실종수색이 종료된 4월 24일을 사망일자로 정하고 전원 산화자로 분류돼 대전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3월의 마지막 금요일에 침몰한 천안함. 그 배 선원들을 구하려다 4월의 첫 금요일 가라앉은 금양호.

둘 다 나랏일을 하다 최후를 맞았지만 망자에 대한 예우는 달랐습니다.

금양호 선체 인양 포기에 대해서도 인양을 너무 서둘러 포기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인터뷰) 강준석 / 농림수산식품부 수산정책관

"전문 업체에 확인해보니 다른 나라에서 장비를 임대를 해야 되고 몇 달이 걸린답니다. 그래서 이건 유족 측에서도 충분히 설명이 됐고 좋다. 이건 무리한 요구다."

하지만 유족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인터뷰) 이원상 / 금양호 유가족 대표

"포기를 종용당한 거에요. 수심이 깊다. 비용이 많이 든다. 기간이 많이 걸린다. 비관적으로 하니까 포기하는 게 낫다. 그럼 어떻게 해요 우리가. 제가 알아본 민간업체 말로는 한 달이면 가능하다고 하는데…"

해난구조 전문가에게 인양이 얼마나 어려운지 물었습니다.

(인터뷰) 이종인 /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

"기술적으로는 아무 문제 없어요. 인양하는 건 문제가 없어요. 시간이 걸리고 돈이 더 든단 얘기죠. 기술은 우리나라 아무 하자 없어요."

유족들은 협상 결과 뿐 아니라 협상 과정에서도 큰 상처를 입었다고 밝혔습니다.

(인터뷰) 이원상 / 금양호 유가족 대표

"국가에서는 저희를 보상이나 그런 걸 원하는 집단으로 몰고 가려고 하더라고요. 강 국장이 의사자에 준하는 예우라고 하면 안 된데요. 꼭 바꾸자는 거예요. 그 날 하루에 4번을 전화를 걸어서 싸웠어요. 의사자에 준하는 보상으로 하재요. 예우와 보상은 차이가 많이 나는 겁니다. 보상이라고 하면 사람의 생명을 물질적인 가치로 따져서 지급을 하고 끝내겠다는 거에요."

이에 대해 정부 측은 문구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해명합니다.

(인터뷰) 강준석 / 농림수산식품부 수산정책관

"위령비 설치 문제, 장제비 문제, 수협장으로 하는 문제. 이런 부분이 전부 예웁니다. 앞에 예우를 쓰다보면 중복이 되지 않느냐. 구분하기 위해서 의사자에 준하는 보상, 그 다음에 장제비, 위령비, 수협 문제. 분명히 하기 위해서 보상으로 하는 게 맞지 않느냐. 유족들한테 얘기를 한 번 해본 겁니다."

***

본연의 임무가 아님에도 공공의 목적을 위해 몸을 던진 시민들이 국가로부터 홀대를 받는 경우는 비단 금양호 선원들 뿐 만이 아닙니다.

이웃집 강도와 맞서다 흉기에 찔려 사망한 전형찬 씨의 경우 사망 6개월이 지나도록 국립묘지 안장여부가 결정되지 않아 유골을 묻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전억상 / 전형찬 씨 아버지

"(유골이) 절에 아직 그냥 있어요. 함에 담은 상태에서 그냥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피해를 보는 사람에게 누가 도와주고 하겠어요."

길을 가던 중 차량 절도범을 잡으려다 흉기에 찔려 중상을 입은 김남일 씨는 의상자로 지정돼 980만원을 받았지만 치료비로 쓰고 나니 생계가 막막해졌습니다.

(인터뷰) 김남일 씨 / 의상자 9급

"맞춤가구 인테리어를 했었는데 힘을 못 쓰다 보니까 그만 뒀어요. 너무 너무 힘든 거 금전적인 거. 그런 게 너무 힘들었어요. 후~. 그 때 생각하니까 핑 돌아서 그래요."

***

금양98호 선원들과 친형제처럼 지냈던 97호 선장은 동료들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유족들을 마주하지 못하고 장례식장 주변만 맴돌았습니다.

다음에 국가가 도움의 손길을 다시 내민다면 그 때도 주저 없이 나서겠냐고 물었습니다.

(인터뷰) 김종영 / 금양 97호 선장

"이런 식으로 한다고 하면 안 갈 겁니다. 후회 됩니다, 지금은. 많이 후회됩니다. 천안함 때문에 묻히니까 더 후회됩니다. 안 갔으면 그 착한 놈들 안 죽었을 거 아닙니까."

***

(박 앵커) 얼마 전 미국 뉴욕의 시내 한복판에서 강도의 공격을 받는 여성을 도와주려다 칼에 찔린 남성이 방치돼 사망한 일이 있었는데요. 의로운 시민들이 상처받는 사회에선 누구도 불의에 맞서지 않을 겁니다. 신 기자, 수고했습니다.

(박제균 앵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5월 13일 동아 뉴스 스테이션입니다.

오늘은 탐사리포트 3번째 순서로, 천안함 구조작업에 나섰다 침몰한 금양호 선원들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구가인 앵커) 선원들의 죽음은 천안함 장병들 못지않게 가치 있는 희생이었는데요. 사건을 집중 취재한 영상뉴스팀 신광영 기자가 스튜디오에 나와 있습니다. 신 기자, 금양호가 침몰한 지 오늘로 42일짼데요. 사고 수습은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신광영 기자) 사고 한 달 만에 시작된 선원들의 장례절차는 지난 주 끝났고, 지금은 희생자 예우 문제를 두고 정부와 협의 중입니다. 유족들은 선원들의 죽음에 대한 정부의 태도에 상처를 입은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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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키운 아들을 잃고 어머니는 아들의 얼굴에 손을 올립니다.

위쪽에는 영정사진이 아래에는 평소 입던 운동복이 놓여있습니다.

모시 안에는 볏짚으로 만든 마네킹이 누워있습니다.

배안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털실로 짠 꽃병. 바닷바람에 닳고 닳은 파카.

고인들이 남긴 물건들이 관을 채우고 있습니다.

시신 없는 관을 부여잡고 유족들은 목 놓아 웁니다.

부축을 받으며 입관식장을 나가면서도 어머니는 차마 아들을 보내지 못합니다.

나무관 7개에 하나하나 적힌 이름들. 바로 실종된 금양호 선원들입니다.

***

쌍끌이 어선인 금양 97호와 98호.

천안함 수색을 도와달라는 해군의 요청을 받고 백령도 앞바다로 나섰지만 수색작업을 하고 돌아오는 길 9명이 탄 98호는 캄보디아 어선과 충돌해 침몰했습니다.

(인터뷰) 김종영 / 97호 선장

"좀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뭐 그런 말도 없이 가게 된 거에요."

사고 이튿날 시신 2구가 발견됐지만 나머지 7구는 아직 바다 속에 있습니다.

금양호가 침몰한지 33일째 되던 입관식 날.

정운찬 국무총리가 사고 후 처음으로 금양호 선원들의 유족을 찾았습니다.

일주일 전 유족들이 정 총리를 만나기 위해 정부청사를 찾았을 때 총리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정운찬 / 국무총리

"(그 때 면담이 안 되었던 이유가?) 그 때 연락을 제대로 못 받았어요."

유족들은 총리실 방문 13일 전 금양호 사후조치에 대한 의견서와 면담 요청서를 총리실에 보냈습니다.

사고 후 열흘이 지났지만 정부차원의 수습 대책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이원상 / 금양호 유가족 대표

"우리가 직접 작성한 걸로 직통 메일로도 보내고 그 대표 팩스로도 보냈어요, 공문서를."

사고수습대책본부가 마련된 인천 중구청도 같은 문건을 보냈습니다.

(인터뷰) 인천 중구청

"저희는 총리실 연결해서 바로 다이렉트로 집어넣었죠. (총리실 어디로 보내시는 거예요?) 농림수산식품 담당자가 있습니다. 제가 아마 두 군데 다 넣었을 겁니다. 상황실도 넣고 전화도 다 통화를 했거든요.

하지만 그에 대한 회신은 없었습니다.

총리까지 보고가 올라가는 과정에서 유족들의 요청이 누락됐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이원상 / 금양호 유가족 대표

"직접 중앙정부청사로 올라가서 확인해본 결과 우리의 요구 사항 7가지를 제시하니까 그걸 조원동 사무차장이 요구 조건에 이런 것도 있었냐고 반문을 하는 것 보면 밑에서 우리가 아무리 떠들고 요구를 해도 올라갈 사항만 올라간다는 거죠."

결국 총리실까지 찾았던 금양호 유족들은 빈손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천안함 희생 장병 46명의 합동영결식이 전 국민의 애도 속에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정부가 천안함 사고 수습에만 매달리는 사이 한국인 선원 중 유일하게 시신이 발견된 김종평 씨는 인천가족공원에서 화장된 뒤 무연고 납골당에 안치됐습니다.

김 씨가 잠들어 있는 곳은 한참을 찾아도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유해는 손이 닿지 않는 맨 위 줄에 있었습니다.

***

금양 98호는 정부의 인양 포기 방침에 따라 대청도 앞바다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쌍끌이 어선으로 함께 사고 현장에 있었던 금양 97호는 98호와 쌍둥이. 97호를 보는 건 바다에 잠겨있는 98호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인천항에 정박해있는 금양 97호에 올라타 봤습니다.

뱃전이 심하게 녹슬어 배 이름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세월에 삭은 듯 배 옆면에 구멍이 송송 나있고 난간도 심하게 휘었습니다.

배 바닥도 곳곳에 녹물이 고여 썩어가고 있습니다.

기관실 위로 펄럭이는 태극기. 3분의 1정도가 찢겨 있습니다.

금양호 선원들이 잡은 물고기를 실어 나르던 어부는 하늘로 간 동료들을 떠올리며 허탈하게 말합니다.

(인터뷰) 동료 선원

"배운 도둑이 그것(뱃일) 뿐인데 어디 육지에서 벌어먹고 살 길이 있어야지. 배운 도둑이 배 밖에 없거든. 어쩔 수가 없는 거야. 허무하고, 한편으론 허무해."

***

(박 앵커) 침몰한 배와 똑같이 생긴 금양97호를 보니까 이런 배로 어떻게 구조에 나서려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요.

(신 기자) 그런 곳에서 10년 넘게 일했던 선원들은 다들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희생된 금양호 선원 9명 중 결혼해 가정을 꾸린 사람은 한 명 뿐이었습니다.

배운 게 없어서, 사업이 망해서, 코리안 드림을 위해서 바다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희생자 중 막내 선원인 허석희 씨는 당뇨와 허리디스크를 앓고 있는 홀어머니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배에 탔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친척집을 전전하며 자란 허 씨는 돈부터 벌겠다며 배만 타다 2년이 넘도록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인터뷰) 이연순 / 허석희 선원 작은 어머니

"한 번이라도 따뜻하게 밥 한 그릇 먹게 `와라, 와라` 했는데 `다음에 올 게요` 그랬는데 그냥 대답으로 끝났어요. 대답으로 그냥 효도하고 갔어. 이제는 눈물도 안 나와. 머릿속에 목소리는 들어있는데. 울면 못 간데요, 망자가. 다음에는 부잣집 좋은데서 태어나서 고생 안하고 잘 먹고 잘 얻어먹고 살라고 했어요."

한 번 배를 타면 6개월에서 1년 동안 바다에 있었던 선원들은 평소 가족들을 자주 보지 못하는 것을 힘들어했습니다.

어렵게 가족들을 만날 때마다 이번까지만 타겠다고 다짐했지만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했습니다.

(인터뷰) 이명숙 / 이용상 선원 동생

"엄마도 11년 전에 병환으로 돌아가셨는데 배 탈 때여서 연락이 안 되서 엄마 임종하는 것도 못 봤거든요. 배 타고 나와서 납골당 가서 인사하고 그러고 왔어요. 그 때 배를 타지 말라고 했었거든요. 조금만 돈 더 벌어서 나온다고…"

***

돈 때문에 배를 탔지만 나라의 부름을 외면하지 않았던 선원들.

(인터뷰) 윤도헌 / 금양수산 사무국장

"(해군에서) 그런 게 요청이 왔으니까 똑같은 바다 사람들인데 안 해줬겠어요, 같이."

하지만 배가 침몰한 뒤 생긴 사고수습대책본부는 이들의 넋을 위로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인터뷰) 인천 중구청 관계자

"이 사건을 천안함하고 같이 생각을 하시잖아요. 저희 이 사고수습본부가 왜 만들어져야 되냐를 먼저 파악하셔야 되요. 사고수습본부는 조업 중 사고라고 판단을 했기 때문에 만든 거거든요. 사고수습대책본부의 계획이 조업 안전대책이에요. 그러니까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없죠."

유족들은 희생선원들에 대해 의사자 지정과 국립묘지 안장 등의 예우를 요구했지만 사고수습을 담당하는 인천 중구청은 이런 요구를 중앙정부에 전달만 할 뿐이었습니다.

지난달 29일 천안함 영결식이 끝나고서야 금양호 유족과 정부의 협상이 본격화됐고 유족들은 선체인양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선원들에게 의사자에 준하는 예우를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실종 선원의 경우 사건 후 1년이 지나야 사망으로 인정되고 그에 따라 의사자 지정 여부를 논의할 수 있기 때문에 `준하는 예우`로 선을 그은 겁니다.

(인터뷰) 이원상 / 금양호 유가족 대표

"모든 걸 다 포기했는데도 정부에서는 처음 내놓은 안에서 변한 게 없어요. 겨우 하나 나오는 게 의사자에 준하는 예우. 준하는 예우라는 건 규정에 없어요. 의사자에 준하는 예우라는 건 준하기 때문에 정해지진 않은 거 아닙니까. 못 한다 안 된다하면 끝이에요."

하지만 정부는 합의 내용을 공개한 이상 지킨다는 방침입니다.

(인터뷰) 강준석 / 농림수산식품부 수산정책관

"정부가 한다 하면 하는 거지. 정부를 못 믿으면 누굴 믿겠습니까."

금양호 선원들의 국립묘지 안장여부도 의사자 지정이 된 뒤 보훈청 심사를 통과해야 합니다.

(인터뷰) 강준석 / 농림수산식품부 수산정책관

"의사자가 일단 되어야 되고 다시 심의를 열어서 합당 여부를 결정하게 되는 거죠. 시신이 없는 상황에서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도 어폐가 있는 상황이죠."

하지만 시신을 찾지 못한 천안함 장병 6명은 실종수색이 종료된 4월 24일을 사망일자로 정하고 전원 산화자로 분류돼 대전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3월의 마지막 금요일에 침몰한 천안함. 그 배 선원들을 구하려다 4월의 첫 금요일 가라앉은 금양호.

둘 다 나랏일을 하다 최후를 맞았지만 망자에 대한 예우는 달랐습니다.

금양호 선체 인양 포기에 대해서도 인양을 너무 서둘러 포기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인터뷰) 강준석 / 농림수산식품부 수산정책관

"전문 업체에 확인해보니 다른 나라에서 장비를 임대를 해야 되고 몇 달이 걸린답니다. 그래서 이건 유족 측에서도 충분히 설명이 됐고 좋다. 이건 무리한 요구다."

하지만 유족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인터뷰) 이원상 / 금양호 유가족 대표

"포기를 종용당한 거에요. 수심이 깊다. 비용이 많이 든다. 기간이 많이 걸린다. 비관적으로 하니까 포기하는 게 낫다. 그럼 어떻게 해요 우리가. 제가 알아본 민간업체 말로는 한 달이면 가능하다고 하는데…"

해난구조 전문가에게 인양이 얼마나 어려운지 물었습니다.

(인터뷰) 이종인 /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

"기술적으로는 아무 문제 없어요. 인양하는 건 문제가 없어요. 시간이 걸리고 돈이 더 든단 얘기죠. 기술은 우리나라 아무 하자 없어요."

유족들은 협상 결과 뿐 아니라 협상 과정에서도 큰 상처를 입었다고 밝혔습니다.

(인터뷰) 이원상 / 금양호 유가족 대표

"국가에서는 저희를 보상이나 그런 걸 원하는 집단으로 몰고 가려고 하더라고요. 강 국장이 의사자에 준하는 예우라고 하면 안 된데요. 꼭 바꾸자는 거예요. 그 날 하루에 4번을 전화를 걸어서 싸웠어요. 의사자에 준하는 보상으로 하재요. 예우와 보상은 차이가 많이 나는 겁니다. 보상이라고 하면 사람의 생명을 물질적인 가치로 따져서 지급을 하고 끝내겠다는 거에요."

이에 대해 정부 측은 문구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해명합니다.

(인터뷰) 강준석 / 농림수산식품부 수산정책관

"위령비 설치 문제, 장제비 문제, 수협장으로 하는 문제. 이런 부분이 전부 예웁니다. 앞에 예우를 쓰다보면 중복이 되지 않느냐. 구분하기 위해서 의사자에 준하는 보상, 그 다음에 장제비, 위령비, 수협 문제. 분명히 하기 위해서 보상으로 하는 게 맞지 않느냐. 유족들한테 얘기를 한 번 해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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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연의 임무가 아님에도 공공의 목적을 위해 몸을 던진 시민들이 국가로부터 홀대를 받는 경우는 비단 금양호 선원들 뿐 만이 아닙니다.

이웃집 강도와 맞서다 흉기에 찔려 사망한 전형찬 씨의 경우 사망 6개월이 지나도록 국립묘지 안장여부가 결정되지 않아 유골을 묻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전억상 / 전형찬 씨 아버지

"(유골이) 절에 아직 그냥 있어요. 함에 담은 상태에서 그냥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피해를 보는 사람에게 누가 도와주고 하겠어요."

길을 가던 중 차량 절도범을 잡으려다 흉기에 찔려 중상을 입은 김남일 씨는 의상자로 지정돼 980만원을 받았지만 치료비로 쓰고 나니 생계가 막막해졌습니다.

(인터뷰) 김남일 씨 / 의상자 9급

"맞춤가구 인테리어를 했었는데 힘을 못 쓰다 보니까 그만 뒀어요. 너무 너무 힘든 거 금전적인 거. 그런 게 너무 힘들었어요. 후~. 그 때 생각하니까 핑 돌아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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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양98호 선원들과 친형제처럼 지냈던 97호 선장은 동료들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유족들을 마주하지 못하고 장례식장 주변만 맴돌았습니다.

다음에 국가가 도움의 손길을 다시 내민다면 그 때도 주저 없이 나서겠냐고 물었습니다.

(인터뷰) 김종영 / 금양 97호 선장

"이런 식으로 한다고 하면 안 갈 겁니다. 후회 됩니다, 지금은. 많이 후회됩니다. 천안함 때문에 묻히니까 더 후회됩니다. 안 갔으면 그 착한 놈들 안 죽었을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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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앵커) 얼마 전 미국 뉴욕의 시내 한복판에서 강도의 공격을 받는 여성을 도와주려다 칼에 찔린 남성이 방치돼 사망한 일이 있었는데요. 의로운 시민들이 상처받는 사회에선 누구도 불의에 맞서지 않을 겁니다. 신 기자, 수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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