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든 사람만 아는 콩글리시 용어, 이래서야…

등록 2010.07.01.
콩글리시 행정

(박제균 앵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7월 1일 동아 뉴스 스테이션입니다.

최근 정부가 우리의 전통주인 막걸리의 영문 애칭을 ‘드렁큰 라이스(drunken rice)’로 정했는데요. ‘먹으면 취하는 쌀’ 혹은 ‘술 취한 동양인’ 등 오해를 불러일으켜 논란이 됐습니다.

(구가인 앵커) 오늘은 탐사리포트 4번째 순서로, 시민들에겐 혼란을 주고, 외국인들에겐 오해를 사는 콩글리시의 행정의 문제를 짚어봤습니다. 실태를 취재한 영상뉴스팀 신광영 기자와 얘기 나눠 보겠습니다.

(박 앵커) 신 기자, 요즘엔 지방자치단체들도 시 구호나 정책이름을 영어로 만드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신광영 기자) 네 그렇습니다. 오늘 민선 5기 지방자치가 출범했는데요, 요즘은 행정도 마케팅이란 인식이 많아지다보니 지역 주민들 뿐 아니라 외국인을 겨냥한 영어식 표현이 경쟁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

그린피아 도봉, 패스트 천안, 어메니티 서천.

지방자치단체들이 최근 내걸기 시작한 구호들입니다.

전국 자치단체 246곳 중 영어 구호를 쓰는 곳은 거의 절반인 108곳.

세계화바람이 불면서 외국인들에게도 지역을 홍보하기 위해 영어식 구호가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부산 동구의 대표 구호인 ‘Singsing 동구’.

‘싱싱하다’는 우리말을 영어로 옮겼지만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들은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인터뷰) 스티븐 아도란티 교수 / 한국외대 영어학 대학원

“나는 그냥 노래 부르는 걸로 생각했어요. 제가 떠올린 건 음악이나 노래.”

(인터뷰) 마릴린 플럼리 교수 / 한국외대 영어과

“싱싱? 거긴 악명 높은 감옥이에요. 싱싱은 최악의 흉악범들이 가는 곳.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고. 미국에선 아주 유명한 감옥이에요. 미국에서는 ‘싱싱으로 보내’ 이런 말도 있어요.”

싱싱함을 강조하려했다가 혐오시설이 있는 곳이라고 홍보한 꼴이 된 겁니다.

경북 상주시 구호인 ‘Just+ 상주’도 외국인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입니다.

(인터뷰) 마릴린 플럼리 교수 / 한국외대 영어과

“저스트 상주. 이런 느낌이에요 “그냥. 상주. 갈 필요 없어요.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해요.”

그린이나 드림 등의 단어에 유토피아의 ‘피아’를 붙인 조어도 많습니다.

영어사전에 존재하지 않는 비문법적 표현이지만 드림피아나 그린시아 등 여러 지자체에서 단어 조합만 바꿔 쓰고 있습니다.

울산시와 경남 김해시처럼 구호가 똑같은 곳도 많습니다. Yes, pride, smile 등도 단골 표현입니다.

(인터뷰) 마릴린 플럼리 교수 / 한국외대 영어과

“‘피아(pia)’란 말 자체는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좀 우스꽝스럽죠.

***

‘콩글리시 행정’은 비단 지자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서울시내 한 골목길에 붙어 있는 표지판(Walking School bus)입니다.

행인들에게 표지판의 뜻을 물어봤습니다.

(인터뷰) 시민

“워킹스쿨버스? 스쿨이나 학생? 잘 모르겠어요.”

(인터뷰) 시민

“워킹이니까 뭐 걷는 거 아니에요? 운동하는 거.”

표지판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한 초등학교.

학생들의 하굣길에 어른들이 따라붙습니다.



차는 많고 인도는 좁은 아슬아슬한 길을 따라 아이들이 안내를 받으며 줄지어 걷습니다.

워킹스쿨버스는 학생들이 버스를 타는 대신 자원봉사자들의 인솔 하에 걸어서 학교를 오가는 제돕니다.

미국과 남미등지에서 10년 넘게 살았던 학부모도 그 뜻을 몰랐습니다.

(인터뷰) 학부형

“남미에서 10년 미국에서 7년 살았는데 여기 와서 보고서야만 뭔지 알았죠.”

주관 부처인 행정안전부는 영국 등 해외에서 운영되고 있는 워킹스쿨버스 제도를 들여오면서 한글용어를 붙였습니다. 하지만 영어 표현보다 이해가 더 어렵습니다.

(인터뷰) 행정안전부 관계자

“공문서에 표기할 때는 보행안전도우미사업 그리고 가로 열고 ‘워킹스쿨버스’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실제 학교 운영하고 이런 데서는 보행안전도우미라고 하니까 더 이해가 안 된다.”

(인터뷰) 이건범 / 한글문화연대 정책위원

“특히 안전이나 건강과 관련된 정책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표현으로 해야 합니다. 워킹스쿨버스나 스쿨존같은 표현을 모르는 사람은 학교 앞에서 사고를 낼 수도 있습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시작한 투어 토커(Tour Talker)도 마찬가지.

현지 사정에 익숙한 노인들이 관광객을 안내하도록 하는 노인 일자리 대책입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구성된 ‘K-2 학교’, 친환경 생활운동인 ‘WE Green운동’ 도 영어가 남용된 사롑니다.

(인터뷰) 이건범 / 한글문화연대 정책위원

“공공기관이 영어를 남용하면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민들에겐 접근하기 어려운 권위적인 대상이 되고 그런 게 굳어지면 시민들은 영어를 써야만 더 우월한 것이란 인식을 갖게 됩니다.”

최근 서울시는 한강에 거대한 인공 섬을 띄웠습니다.

섬 위에는 공연장과 공원, 산책로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조성할 계획입니다.

남산타워와 63빌딩을 능가하는 서울의 새로운 상징물로 세우기 위해 서울시가 야심 차게 만든 이 섬의 이름은 ‘플로팅 아일랜드’.

(인터뷰) 서울시 관계자

“한강의 꽃이니 뭐니 했는데 그렇게 해가지고 인지도가 되지 않겠다 해서 그냥 플로팅 아일랜드 쉽게. 플로팅 아일랜드가 부르기도 쉽고 그런 쪽으로 생각을 한 거에요.”

(인터뷰) 김일태 교수

“시설 안에 어떤 게 있는 지 외국인들이 호기심을 유도하는 이름을 생각해야지. 그걸 직접적으로 영어로 표현했을 때 마케팅차원에서도 효과가 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

(구 앵커) 우리만의 고유한 상징물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이름은 영어로 한다면 외국인들의 눈에 얼마나 신선하게 느껴질지 의문이 드는데요.

(신 기자) 지자체에서는 나름대로 의욕을 가지고 이름을 지었겠지만 정작 외국인들의 반응은 그런 기대에 크게 못 미치고 있습니다.

***

지자체들이 국제화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만든 영어식 구호와 정책을 외국인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프랑스와 스페인, 러시아, 일본 등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봤습니다.

#. Let`s Go yang

“술 한 잔 하러가자?”

"양고기 먹으러 가자?"

#. Hi-touch Gongju

“사람들이 만날 때 손뼉 부딪치면서 인사하는 거?”

(인터뷰) 조르디 / 스페인 유학생

“도시 구호는 대부분 스페인으로 만들죠. 영어가 들어가더라도 부가적으로 작게 들어가고. 이탈리아나 프랑스도 마찬가지로 자국말을 씁니다.”

‘워킹스쿨버스’를 칠판에 적자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현장음) “버스긴 버슨데 중간에 내려서 걸으며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스쿨버스?”

(인터뷰) 소냐 / 러시아

“한국적인 것에 영어이름을 붙이는 건 잘못됐다고 봐요. 왜 한국의 정책에 영어 이름을 붙이나요. 정책은 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을 위한 거잖아요.”

지자체 주민들도 도시 구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경기도 평택의 대표 구호는 ‘Super’. 이 구호는 청사 간판이나 현수막 뿐 아니라 시에서 운영하는 차량과 장비에 모두 부착됩니다.

시 구호를 응용해 만든 지역 농특산물 상표(수퍼오닝)도 있습니다.

(인터뷰) 평택시 관계자

“(수퍼오닝에서 오닝은 어떤 의미인가요?) 모닝하구요. 지원이라는 오거니제이션인가요. 모닝과 오거니제이션이 합성된 합성어입니다.”

설명을 듣지 않고는 뜻을 짐작하기가 어렵다보니 상당수 시민들이 시 구호를 모르고 있습니다.

(인터뷰) 시민

“영어 슬로건이요? 그게 뭐였지?”

(인터뷰) 시민

“만든 사람만 아는 것 같습니다. 만든 사람이 의도한 게 뭔지도 잘 짐작이 안돼요.”

효과는 미미하지만 지자체들은 시정 구호를 만들고 홍보물을 제작하는데 상당한 예산을 들입니다.

(인터뷰) 평택시 관계자

“(시 차원에서 소요됐던 예산으로만 한다면) 청사 경우만 1500(만원) 정도. (1500만원 정도요?) 네.”

그런 작업을 해마다 반복하는 지자체도 있습니다. 파주시는 최근 몇 년 간 도시 구호를 매번 바꿨습니다.

‘Upgrade 파주’, ‘Back to Basics 파주’, ‘Yes, we can!’, `New More` 등으로 계속 변해왔습니다.

구호가 바뀔 때마다 일부 홍보물을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인터뷰) 파주시 간판 제작사 관계자

“(플래카드 만드는데) 파주시 입찰해서 맺은 연간단가가 1800(만원).”

지자체 구호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외국인 등 전문가의 검증을 거치는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파주시 관계자

“몇 가지 안을 만들어서 올리고 단체장님하고 상의를 해서 했을 거에요.”

(인터뷰) 도봉구청 관계자

“녹색도봉이나 그린피아 도봉이나 큰 의미는 없는데 그런 뉘앙스가 더 어드밴스드하게 느껴졌는지 어떻게 됐는지. 그러니까 이거를 딱 뽑았다기 보다는 그 위원들이 선호하신 거를 갖다가 저희가 통계를 낸 거죠.”

파주시는 홈페이지에 여러 구호들이 올라와 있지만 공식 브랜드는 ‘G&G’라고 밝혔습니다.

(인터뷰) 파주시 간판 제작사 관계자

“(G&G 파주는 무슨 뜻이에요?) 아이, 알았는데 그걸 잃어버렸네. (이 마크가 들어간지가 좀 됐습니까) 좀 오래됐습니다.”

시청 직원마저도 ‘G&G’가 `Good&Great`의 줄임말이라는 것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시 구호가 자리를 잡기도 전에 파주시는 ‘G&G’의 의미를 `Green&Global`로 또 한 번 바꿨습니다.

최근 정부시책으로 녹색성장이 강조됐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파주시 관계자

“그 뜻을 모르면 반대로 생각을 하면 더 관심을 갖고 볼 수도 있다는 그런 효과도… 궁금해서 더 찾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10년 넘게 한국에서 지낸 외국인들은 거창한 수식이나 암호 같은 모호한 표현 대신 지역의 구체적 특징을 담은 구호가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인터뷰) 스티븐 아도란티 교수 / 한국외대 영어학 대학원

“한국은 미래를 내다보며 앞으로 우리가 얼마나 멋진 곳이 될 것인가에 대한 구호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아요. 하지만 현재도 훌륭한 것이 많고 과거에도 그랬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해요.”

충남 공주시의 구호는 ‘Hi touch 공주’. 백제의 옛 수도로 다양한 문화유산을 보존해온 도시의 특색을 살리지 못한 사롑니다.

(인터뷰) 마릴린 플럼리 교수 / 한국외대 영어과

“왜 하이 터치라고 했죠? 농구 같은 운동을 뜻하는 것 같아요.”

(인터뷰) 스티븐 아도란티 교수 / 한국외대 영어학 대학원

“‘로열(Royal) 공주’로 하는 게 어떨까요. 그게 도시의 핵심을 담은 것 아닐까요. 외국인 관광객들은 역사적인 걸 좋아해요."

한국의 관광 홍보 구호였던 ‘코리아 스파클링(Korea Sparkling)’도 외국인들에게는 광천수나 현란한 네온사인을 연상시킨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인터뷰) 마릴린 플럼리 교수

“역동적이라는 건 한국인들의 본성에 잘 보여줘요. ‘빨리빨리’ 문화의 긍정적인 면이죠. ‘다이나믹 코리아’는 앞으로도 변하지 말고 계속 갔으면 좋겠어요.”

정부는 정책의 수요자인 시민들에게 다가서는 행정을 하겠다고 수없이 공언해왔습니다.

그 첫 단추가 바로 정책의 이름을 짓는 일입니다.

지난달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이번 달부터 시작된 민선 5기 지방정부.

외국인들에겐 오해를 사고 내국인들에겐 혼란을 주는 콩글리시 행정은 지방정부의 경쟁력을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결국 지역 주민들이 떠안게 됩니다.

(인터뷰) 김일태 교수

“행정기관이 기업들이 하는 방식으로 시정홍보를 하거나 정책의 이름을 짓기 시작하면 공공기관만이 가지고 있는 공공성이나 존엄성을 가볍게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정부의 설자리를 스스로 좁히는 결과가 되는 거죠.”

***

(박 앵커) 오늘부터 새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임기가 시작됐는데요. 시민도 모르고, 외국인도 모르는 콩글리시 행정 용어는 없는지 꼼꼼히 따져봐야겠습니다. 신 기자, 수고했습니다.

콩글리시 행정

(박제균 앵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7월 1일 동아 뉴스 스테이션입니다.

최근 정부가 우리의 전통주인 막걸리의 영문 애칭을 ‘드렁큰 라이스(drunken rice)’로 정했는데요. ‘먹으면 취하는 쌀’ 혹은 ‘술 취한 동양인’ 등 오해를 불러일으켜 논란이 됐습니다.

(구가인 앵커) 오늘은 탐사리포트 4번째 순서로, 시민들에겐 혼란을 주고, 외국인들에겐 오해를 사는 콩글리시의 행정의 문제를 짚어봤습니다. 실태를 취재한 영상뉴스팀 신광영 기자와 얘기 나눠 보겠습니다.

(박 앵커) 신 기자, 요즘엔 지방자치단체들도 시 구호나 정책이름을 영어로 만드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신광영 기자) 네 그렇습니다. 오늘 민선 5기 지방자치가 출범했는데요, 요즘은 행정도 마케팅이란 인식이 많아지다보니 지역 주민들 뿐 아니라 외국인을 겨냥한 영어식 표현이 경쟁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

그린피아 도봉, 패스트 천안, 어메니티 서천.

지방자치단체들이 최근 내걸기 시작한 구호들입니다.

전국 자치단체 246곳 중 영어 구호를 쓰는 곳은 거의 절반인 108곳.

세계화바람이 불면서 외국인들에게도 지역을 홍보하기 위해 영어식 구호가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부산 동구의 대표 구호인 ‘Singsing 동구’.

‘싱싱하다’는 우리말을 영어로 옮겼지만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들은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인터뷰) 스티븐 아도란티 교수 / 한국외대 영어학 대학원

“나는 그냥 노래 부르는 걸로 생각했어요. 제가 떠올린 건 음악이나 노래.”

(인터뷰) 마릴린 플럼리 교수 / 한국외대 영어과

“싱싱? 거긴 악명 높은 감옥이에요. 싱싱은 최악의 흉악범들이 가는 곳.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고. 미국에선 아주 유명한 감옥이에요. 미국에서는 ‘싱싱으로 보내’ 이런 말도 있어요.”

싱싱함을 강조하려했다가 혐오시설이 있는 곳이라고 홍보한 꼴이 된 겁니다.

경북 상주시 구호인 ‘Just+ 상주’도 외국인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입니다.

(인터뷰) 마릴린 플럼리 교수 / 한국외대 영어과

“저스트 상주. 이런 느낌이에요 “그냥. 상주. 갈 필요 없어요.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해요.”

그린이나 드림 등의 단어에 유토피아의 ‘피아’를 붙인 조어도 많습니다.

영어사전에 존재하지 않는 비문법적 표현이지만 드림피아나 그린시아 등 여러 지자체에서 단어 조합만 바꿔 쓰고 있습니다.

울산시와 경남 김해시처럼 구호가 똑같은 곳도 많습니다. Yes, pride, smile 등도 단골 표현입니다.

(인터뷰) 마릴린 플럼리 교수 / 한국외대 영어과

“‘피아(pia)’란 말 자체는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좀 우스꽝스럽죠.

***

‘콩글리시 행정’은 비단 지자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서울시내 한 골목길에 붙어 있는 표지판(Walking School bus)입니다.

행인들에게 표지판의 뜻을 물어봤습니다.

(인터뷰) 시민

“워킹스쿨버스? 스쿨이나 학생? 잘 모르겠어요.”

(인터뷰) 시민

“워킹이니까 뭐 걷는 거 아니에요? 운동하는 거.”

표지판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한 초등학교.

학생들의 하굣길에 어른들이 따라붙습니다.



차는 많고 인도는 좁은 아슬아슬한 길을 따라 아이들이 안내를 받으며 줄지어 걷습니다.

워킹스쿨버스는 학생들이 버스를 타는 대신 자원봉사자들의 인솔 하에 걸어서 학교를 오가는 제돕니다.

미국과 남미등지에서 10년 넘게 살았던 학부모도 그 뜻을 몰랐습니다.

(인터뷰) 학부형

“남미에서 10년 미국에서 7년 살았는데 여기 와서 보고서야만 뭔지 알았죠.”

주관 부처인 행정안전부는 영국 등 해외에서 운영되고 있는 워킹스쿨버스 제도를 들여오면서 한글용어를 붙였습니다. 하지만 영어 표현보다 이해가 더 어렵습니다.

(인터뷰) 행정안전부 관계자

“공문서에 표기할 때는 보행안전도우미사업 그리고 가로 열고 ‘워킹스쿨버스’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실제 학교 운영하고 이런 데서는 보행안전도우미라고 하니까 더 이해가 안 된다.”

(인터뷰) 이건범 / 한글문화연대 정책위원

“특히 안전이나 건강과 관련된 정책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표현으로 해야 합니다. 워킹스쿨버스나 스쿨존같은 표현을 모르는 사람은 학교 앞에서 사고를 낼 수도 있습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시작한 투어 토커(Tour Talker)도 마찬가지.

현지 사정에 익숙한 노인들이 관광객을 안내하도록 하는 노인 일자리 대책입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구성된 ‘K-2 학교’, 친환경 생활운동인 ‘WE Green운동’ 도 영어가 남용된 사롑니다.

(인터뷰) 이건범 / 한글문화연대 정책위원

“공공기관이 영어를 남용하면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민들에겐 접근하기 어려운 권위적인 대상이 되고 그런 게 굳어지면 시민들은 영어를 써야만 더 우월한 것이란 인식을 갖게 됩니다.”

최근 서울시는 한강에 거대한 인공 섬을 띄웠습니다.

섬 위에는 공연장과 공원, 산책로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조성할 계획입니다.

남산타워와 63빌딩을 능가하는 서울의 새로운 상징물로 세우기 위해 서울시가 야심 차게 만든 이 섬의 이름은 ‘플로팅 아일랜드’.

(인터뷰) 서울시 관계자

“한강의 꽃이니 뭐니 했는데 그렇게 해가지고 인지도가 되지 않겠다 해서 그냥 플로팅 아일랜드 쉽게. 플로팅 아일랜드가 부르기도 쉽고 그런 쪽으로 생각을 한 거에요.”

(인터뷰) 김일태 교수

“시설 안에 어떤 게 있는 지 외국인들이 호기심을 유도하는 이름을 생각해야지. 그걸 직접적으로 영어로 표현했을 때 마케팅차원에서도 효과가 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

(구 앵커) 우리만의 고유한 상징물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이름은 영어로 한다면 외국인들의 눈에 얼마나 신선하게 느껴질지 의문이 드는데요.

(신 기자) 지자체에서는 나름대로 의욕을 가지고 이름을 지었겠지만 정작 외국인들의 반응은 그런 기대에 크게 못 미치고 있습니다.

***

지자체들이 국제화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만든 영어식 구호와 정책을 외국인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프랑스와 스페인, 러시아, 일본 등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봤습니다.

#. Let`s Go yang

“술 한 잔 하러가자?”

"양고기 먹으러 가자?"

#. Hi-touch Gongju

“사람들이 만날 때 손뼉 부딪치면서 인사하는 거?”

(인터뷰) 조르디 / 스페인 유학생

“도시 구호는 대부분 스페인으로 만들죠. 영어가 들어가더라도 부가적으로 작게 들어가고. 이탈리아나 프랑스도 마찬가지로 자국말을 씁니다.”

‘워킹스쿨버스’를 칠판에 적자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현장음) “버스긴 버슨데 중간에 내려서 걸으며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스쿨버스?”

(인터뷰) 소냐 / 러시아

“한국적인 것에 영어이름을 붙이는 건 잘못됐다고 봐요. 왜 한국의 정책에 영어 이름을 붙이나요. 정책은 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을 위한 거잖아요.”

지자체 주민들도 도시 구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경기도 평택의 대표 구호는 ‘Super’. 이 구호는 청사 간판이나 현수막 뿐 아니라 시에서 운영하는 차량과 장비에 모두 부착됩니다.

시 구호를 응용해 만든 지역 농특산물 상표(수퍼오닝)도 있습니다.

(인터뷰) 평택시 관계자

“(수퍼오닝에서 오닝은 어떤 의미인가요?) 모닝하구요. 지원이라는 오거니제이션인가요. 모닝과 오거니제이션이 합성된 합성어입니다.”

설명을 듣지 않고는 뜻을 짐작하기가 어렵다보니 상당수 시민들이 시 구호를 모르고 있습니다.

(인터뷰) 시민

“영어 슬로건이요? 그게 뭐였지?”

(인터뷰) 시민

“만든 사람만 아는 것 같습니다. 만든 사람이 의도한 게 뭔지도 잘 짐작이 안돼요.”

효과는 미미하지만 지자체들은 시정 구호를 만들고 홍보물을 제작하는데 상당한 예산을 들입니다.

(인터뷰) 평택시 관계자

“(시 차원에서 소요됐던 예산으로만 한다면) 청사 경우만 1500(만원) 정도. (1500만원 정도요?) 네.”

그런 작업을 해마다 반복하는 지자체도 있습니다. 파주시는 최근 몇 년 간 도시 구호를 매번 바꿨습니다.

‘Upgrade 파주’, ‘Back to Basics 파주’, ‘Yes, we can!’, `New More` 등으로 계속 변해왔습니다.

구호가 바뀔 때마다 일부 홍보물을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인터뷰) 파주시 간판 제작사 관계자

“(플래카드 만드는데) 파주시 입찰해서 맺은 연간단가가 1800(만원).”

지자체 구호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외국인 등 전문가의 검증을 거치는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파주시 관계자

“몇 가지 안을 만들어서 올리고 단체장님하고 상의를 해서 했을 거에요.”

(인터뷰) 도봉구청 관계자

“녹색도봉이나 그린피아 도봉이나 큰 의미는 없는데 그런 뉘앙스가 더 어드밴스드하게 느껴졌는지 어떻게 됐는지. 그러니까 이거를 딱 뽑았다기 보다는 그 위원들이 선호하신 거를 갖다가 저희가 통계를 낸 거죠.”

파주시는 홈페이지에 여러 구호들이 올라와 있지만 공식 브랜드는 ‘G&G’라고 밝혔습니다.

(인터뷰) 파주시 간판 제작사 관계자

“(G&G 파주는 무슨 뜻이에요?) 아이, 알았는데 그걸 잃어버렸네. (이 마크가 들어간지가 좀 됐습니까) 좀 오래됐습니다.”

시청 직원마저도 ‘G&G’가 `Good&Great`의 줄임말이라는 것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시 구호가 자리를 잡기도 전에 파주시는 ‘G&G’의 의미를 `Green&Global`로 또 한 번 바꿨습니다.

최근 정부시책으로 녹색성장이 강조됐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파주시 관계자

“그 뜻을 모르면 반대로 생각을 하면 더 관심을 갖고 볼 수도 있다는 그런 효과도… 궁금해서 더 찾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10년 넘게 한국에서 지낸 외국인들은 거창한 수식이나 암호 같은 모호한 표현 대신 지역의 구체적 특징을 담은 구호가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인터뷰) 스티븐 아도란티 교수 / 한국외대 영어학 대학원

“한국은 미래를 내다보며 앞으로 우리가 얼마나 멋진 곳이 될 것인가에 대한 구호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아요. 하지만 현재도 훌륭한 것이 많고 과거에도 그랬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해요.”

충남 공주시의 구호는 ‘Hi touch 공주’. 백제의 옛 수도로 다양한 문화유산을 보존해온 도시의 특색을 살리지 못한 사롑니다.

(인터뷰) 마릴린 플럼리 교수 / 한국외대 영어과

“왜 하이 터치라고 했죠? 농구 같은 운동을 뜻하는 것 같아요.”

(인터뷰) 스티븐 아도란티 교수 / 한국외대 영어학 대학원

“‘로열(Royal) 공주’로 하는 게 어떨까요. 그게 도시의 핵심을 담은 것 아닐까요. 외국인 관광객들은 역사적인 걸 좋아해요."

한국의 관광 홍보 구호였던 ‘코리아 스파클링(Korea Sparkling)’도 외국인들에게는 광천수나 현란한 네온사인을 연상시킨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인터뷰) 마릴린 플럼리 교수

“역동적이라는 건 한국인들의 본성에 잘 보여줘요. ‘빨리빨리’ 문화의 긍정적인 면이죠. ‘다이나믹 코리아’는 앞으로도 변하지 말고 계속 갔으면 좋겠어요.”

정부는 정책의 수요자인 시민들에게 다가서는 행정을 하겠다고 수없이 공언해왔습니다.

그 첫 단추가 바로 정책의 이름을 짓는 일입니다.

지난달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이번 달부터 시작된 민선 5기 지방정부.

외국인들에겐 오해를 사고 내국인들에겐 혼란을 주는 콩글리시 행정은 지방정부의 경쟁력을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결국 지역 주민들이 떠안게 됩니다.

(인터뷰) 김일태 교수

“행정기관이 기업들이 하는 방식으로 시정홍보를 하거나 정책의 이름을 짓기 시작하면 공공기관만이 가지고 있는 공공성이나 존엄성을 가볍게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정부의 설자리를 스스로 좁히는 결과가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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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앵커) 오늘부터 새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임기가 시작됐는데요. 시민도 모르고, 외국인도 모르는 콩글리시 행정 용어는 없는지 꼼꼼히 따져봐야겠습니다. 신 기자, 수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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