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데이트]‘가야금 반세기’ 황병기 명인

등록 2010.11.17.
(박제균 앵커) 한국음악이 지금처럼 관심을 받게 된 건 앞서 그 가치를 발견하고 알린 음악인들이 있기 때문인데요. 가야금의 황병기 명인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구가인 앵커) 내년에 국악 창작인생 50주년을 맞는 황병기 명인을 위해 후배 예술가들이 헌정 공연을 엽니다. 서울 북아현동 자택에서 황병기 선생을 만났습니다.

***

12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더없이 청아하고 부드럽습니다.

60년 전, 당시 부산에서 피난학교를 다니던 중학교 3학년 때 우연한 계기로 가야금을 접했던 황병기 선생은 그 소리에 금세 매료됐습니다.

(인터뷰)

"음색 자체가 가슴을 파고드는데 정신이 몽롱한 거죠. 엄청난 애인을 만난 거 같아."

고등학교 3년 내내 국립국악원을 다니며 가야금 명인 김영윤과 김윤덕, 심상건을 사사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들의 유별난 가야금 사랑에 부모의 반대도 심했습니다.

(인터뷰)

" 가야금을 배우면 학교 공부에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잘할 거다. 그러면서 그걸 실감나게 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을 예로 들었죠. 아인슈타인이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과학자로 성공하는데 무슨 지장이 있었냐. 오히려 바이올린을 배워서 과학을 더 잘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우기고 그래서 결국 부모님이 허락을 해줘서 가야금을 배우게 된 거죠."

경기고 3학년과 서울대 법대 2학년 때 전국 국악 콩쿨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엘리트 국악 신동으로 주목 받았지만 국악인들이 설자리가 마땅치 않았던 당시 `음악으로 먹고 살 생각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대학 졸업 직후 작곡가 현제명 선생의 권유로 국내 처음으로 개설된 서울대 음대 국악과에서 4년간 가야금을 가르쳤습니다.

(인터뷰)

" 그 때 음악대학 학장이 현제명 선생이었어요. 불러서 가봤더니 너 법을 한다지만 법하는 사람은 길에 나가면 삼태기로 담아 낼 정도로 많아. 하지만 네가 가야금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보통 보배로운 일이 아니야. 그러니까 너는 가야금을 해야지..."

이후 명동극장 지배인과 화학공장 기획관리인을 했고, 영화사와 출판사를 설립해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음악을 업으로 삼게 된 것은 이화여대에 국악과 교수로 임용 된 뒤부터. 하지만 그 전에도 가야금 연주를 거른 적은 없었습니다.

(인터뷰)

" 어떤 사람이 연애하는데 직장 옮겼다고 안합니까. 가야금과 내 관계는 연애 관계랑 비슷한 거예요. 그건 항상 하는 거고. 내가 무슨 직업을 갖느냐는 별 문제야. 그래서 쭉 세월이 지나다가 74년이 됐어요. 그 해 이화대학에 전국에서 3번째 국악과가 생겨요. 그리고 이화대학이 아예 강사가 아니라 전임으로 들어와라. 그리고 국악과 과장까지 맡아라. 연애하다가 말하자면 74년에 결혼한 셈이지."

황병기 선생은 한국음악, 국악의 지평을 한 단계 넓힌 음악가로 평가 받습니다.

1962년 당시로선 드물게 국악 창작을 시도해 최초의 현대 가야금 창작곡인 `숲`을 발표했습니다.

법정스님의 애청곡으로도 잘 알려진 1974년 작 `침향무`는 이젠 국악의 고전이 됐습니다.

가야금을 통해 전위적인 음악을 시도한 미궁은 2000년대 다시 인터넷에 퍼지며 오해를 사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75 년 명동에서 초연됐는데 당시 어떤 여자는 바깥으로 소리 지르며 도망갔어요. 무섭다고. 당국에서는 연주 금지를 당했어요. 그리고 세상에서 잊혀졌어요. 2000년대 들어와서 21세기가 되면서 우리가 인터넷 세상이 됐고 그때 미궁이 떠돌아다녔어요. 그 당시 10대 네티즌들이 처음 들은 거야. 그리고 놀라서 루머화 시켰죠.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루머는 미궁을 세 번 들으면 죽는다."

백남준과 존 케이지, 윤이상과 김수근, 홍신자 등 다양한 예술가들과 폭넓은 교류를 했습니다. 첼리스트 장한나와는 50년 세월을 뛰어넘은 음악 친구입니다.

(인터뷰)

"장한나는 10대였는데 내 음악을 다 들었더라고. 저절로 친해질 수밖에 없지. 장한나가 한국에서 공연할 때는 아무리 바빠도 나를 만나지. 우리 집에서 가야금 배운 적도 있고."

그는 좋은 창작을 위해서는 예술적인 안목을 길러야 하며, 연주를 할 때는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인터뷰)

" 조용필 씨도 노래 부를 때 감정을 빼고 해야 하는 걸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코미디언이 자긴 웃으면 안돼요. 자기는 웃는 감정을 빼고 해야 남이 웃어요. 그것처럼 연주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감정에 휘말리면 코미디언처럼 못하게 돼 있어요."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며 독창적인 작품을 발표한 황병기 선생은 많은 예술인들에게 존경을 받습니다.

오는 12월에는 후배 예술가들 52명이 헌정 공연을 할 계획입니다. 소설가 이외수 씨는 무대 미술을 맡았고, 록그룹 어어부 밴드와 현대 무용가 안은미는 미궁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인터뷰)

"난 세계 어디가도 들을 수 없는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서양음악은 좋아하지만 서양음악 모방은 절대로 안 해요. 한국에만 있는 음악, 한국에서도 황병기에게만 있는 소리를 만들고 싶어요."

동아일보 구가인입니다.

(박제균 앵커) 한국음악이 지금처럼 관심을 받게 된 건 앞서 그 가치를 발견하고 알린 음악인들이 있기 때문인데요. 가야금의 황병기 명인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구가인 앵커) 내년에 국악 창작인생 50주년을 맞는 황병기 명인을 위해 후배 예술가들이 헌정 공연을 엽니다. 서울 북아현동 자택에서 황병기 선생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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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더없이 청아하고 부드럽습니다.

60년 전, 당시 부산에서 피난학교를 다니던 중학교 3학년 때 우연한 계기로 가야금을 접했던 황병기 선생은 그 소리에 금세 매료됐습니다.

(인터뷰)

"음색 자체가 가슴을 파고드는데 정신이 몽롱한 거죠. 엄청난 애인을 만난 거 같아."

고등학교 3년 내내 국립국악원을 다니며 가야금 명인 김영윤과 김윤덕, 심상건을 사사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들의 유별난 가야금 사랑에 부모의 반대도 심했습니다.

(인터뷰)

" 가야금을 배우면 학교 공부에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잘할 거다. 그러면서 그걸 실감나게 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을 예로 들었죠. 아인슈타인이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과학자로 성공하는데 무슨 지장이 있었냐. 오히려 바이올린을 배워서 과학을 더 잘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우기고 그래서 결국 부모님이 허락을 해줘서 가야금을 배우게 된 거죠."

경기고 3학년과 서울대 법대 2학년 때 전국 국악 콩쿨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엘리트 국악 신동으로 주목 받았지만 국악인들이 설자리가 마땅치 않았던 당시 `음악으로 먹고 살 생각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대학 졸업 직후 작곡가 현제명 선생의 권유로 국내 처음으로 개설된 서울대 음대 국악과에서 4년간 가야금을 가르쳤습니다.

(인터뷰)

" 그 때 음악대학 학장이 현제명 선생이었어요. 불러서 가봤더니 너 법을 한다지만 법하는 사람은 길에 나가면 삼태기로 담아 낼 정도로 많아. 하지만 네가 가야금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보통 보배로운 일이 아니야. 그러니까 너는 가야금을 해야지..."

이후 명동극장 지배인과 화학공장 기획관리인을 했고, 영화사와 출판사를 설립해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음악을 업으로 삼게 된 것은 이화여대에 국악과 교수로 임용 된 뒤부터. 하지만 그 전에도 가야금 연주를 거른 적은 없었습니다.

(인터뷰)

" 어떤 사람이 연애하는데 직장 옮겼다고 안합니까. 가야금과 내 관계는 연애 관계랑 비슷한 거예요. 그건 항상 하는 거고. 내가 무슨 직업을 갖느냐는 별 문제야. 그래서 쭉 세월이 지나다가 74년이 됐어요. 그 해 이화대학에 전국에서 3번째 국악과가 생겨요. 그리고 이화대학이 아예 강사가 아니라 전임으로 들어와라. 그리고 국악과 과장까지 맡아라. 연애하다가 말하자면 74년에 결혼한 셈이지."

황병기 선생은 한국음악, 국악의 지평을 한 단계 넓힌 음악가로 평가 받습니다.

1962년 당시로선 드물게 국악 창작을 시도해 최초의 현대 가야금 창작곡인 `숲`을 발표했습니다.

법정스님의 애청곡으로도 잘 알려진 1974년 작 `침향무`는 이젠 국악의 고전이 됐습니다.

가야금을 통해 전위적인 음악을 시도한 미궁은 2000년대 다시 인터넷에 퍼지며 오해를 사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75 년 명동에서 초연됐는데 당시 어떤 여자는 바깥으로 소리 지르며 도망갔어요. 무섭다고. 당국에서는 연주 금지를 당했어요. 그리고 세상에서 잊혀졌어요. 2000년대 들어와서 21세기가 되면서 우리가 인터넷 세상이 됐고 그때 미궁이 떠돌아다녔어요. 그 당시 10대 네티즌들이 처음 들은 거야. 그리고 놀라서 루머화 시켰죠.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루머는 미궁을 세 번 들으면 죽는다."

백남준과 존 케이지, 윤이상과 김수근, 홍신자 등 다양한 예술가들과 폭넓은 교류를 했습니다. 첼리스트 장한나와는 50년 세월을 뛰어넘은 음악 친구입니다.

(인터뷰)

"장한나는 10대였는데 내 음악을 다 들었더라고. 저절로 친해질 수밖에 없지. 장한나가 한국에서 공연할 때는 아무리 바빠도 나를 만나지. 우리 집에서 가야금 배운 적도 있고."

그는 좋은 창작을 위해서는 예술적인 안목을 길러야 하며, 연주를 할 때는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인터뷰)

" 조용필 씨도 노래 부를 때 감정을 빼고 해야 하는 걸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코미디언이 자긴 웃으면 안돼요. 자기는 웃는 감정을 빼고 해야 남이 웃어요. 그것처럼 연주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감정에 휘말리면 코미디언처럼 못하게 돼 있어요."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며 독창적인 작품을 발표한 황병기 선생은 많은 예술인들에게 존경을 받습니다.

오는 12월에는 후배 예술가들 52명이 헌정 공연을 할 계획입니다. 소설가 이외수 씨는 무대 미술을 맡았고, 록그룹 어어부 밴드와 현대 무용가 안은미는 미궁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인터뷰)

"난 세계 어디가도 들을 수 없는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서양음악은 좋아하지만 서양음악 모방은 절대로 안 해요. 한국에만 있는 음악, 한국에서도 황병기에게만 있는 소리를 만들고 싶어요."

동아일보 구가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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