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우먼동아 라이프 인터뷰] ‘에띠임 by 박명복’모녀 디자이너의 드라마틱 인생 스토리

등록 2010.11.25.
국 내에서 처음으로 기능성 속옷 시대를 연 박명복 디자이너와 어머니의 뒤를 이어 신세대 속옷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딸 오윤경씨. 속옷 디자인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엄마를 보며 엄마처럼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반항하던 딸이 엄마의 열정을 이해할 무렵, 모녀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서로 닮아 있음을 발견했다.

엄 마와 딸은 웃을 때 반달형이 되는 눈 모습이 판박이로 닮았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꿈도 열정도 닮아서 하루 종일 한 사무실에서 원단과 체형 마네킹과 줄자 사이를 오가며 함께 일하는 모녀. 국내에서 처음으로 기능성 속옷 사업을 개척해 ‘에띠임 by 박명복’이란 브랜드를 내놓은 (주)로다의 박명복 수석 디자이너(55)와 딸 오윤경 디자인 실장(33)이다.

박명복 디자이너는 우리나라 속옷 사업에 처음으로 패션과 기능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30년간 한 우물을 파 온 디자이너다. 속옷이라면 팍팍 삶아 입는 흰 면 아니면 부모님 선물용 빨간 내복이 전부나 다름없던 시절 그는 패션 감각을 살리고 몸매 보정의 기능을 갖춘 속옷 개발로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오윤경씨는 처음부터 엄마 같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꿈을 키웠던 건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늘 속옷 만들기에 몰두해 있고 사업 때문에 바빠 자신을 꼼꼼하게 돌봐주지 못하는 엄마에게 불만이 많았던 것이다.

“우리 딸이 ‘학교에 갔다가 갑자기 비가 오면 다른 엄마들은 우산을 들고 데리러 오는데 엄마는 한 번도 와주지 않아 서운했다’는 얘기를 참 많이 했어요.”

엄 마에 대한 불만은 사춘기의 방황으로 이어졌고 예고에 미술 전공으로 진학한 딸은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다니기만 좋아하는 문제아가 됐다. 윤경씨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엄마는 너무 바빠서 고3인 나한테 신경을 너무 안 쓴다. 대학을 갈 자신이 없어 집을 나가겠으니 찾지 말라’는 편지를 써놓고 가출을 했다. 정신없이 일하느라 아이들한테 소홀했다는 후회와 반성으로 가슴을 치던 엄마는 결국 딸의 손을 잡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울며 끌려간 이탈리아에서 패션에 대한 열정 생겨

“가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얼마나 화가 났던지 스위스 거쳐서 이탈리아까지 가는 16시간 동안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엄마와 한 마디도 안 했어요.”

이 탈리아는 박명복 디자이너가 딸 윤경씨 세 살 때 속옷 디자인을 공부하러 떠나 머물던 곳이었다. 동네 양품점 주인이었던 ‘윤경 엄마’가 우연히 속옷 시장의 가능성에 관심을 갖게 되고 제대로 속옷 디자인을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어린 두 자녀를 떼어놓고 유학을 떠났던 것이다. 1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 남대문에서 제일 잘나가는 속옷 도매상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일본에서 체형보정 기능성 속옷을 공부하고 돌아와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만든 그는 한국 여성의 체형에 잘 맞고 착용감이 편안한 속옷을 만들어 소비자들의 인정을 받아왔다. 그는 자신의 열정의 원천이었던 이곳에서 딸도 무엇인가를 얻기를 바랐지만 윤경씨는 한국에 다시 데려가 달라고 조르기만 했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이고 엄마 덕분에 누릴 수 있는 혜택인지 그런 생각은 하나도 못했어요. 그저 한국의 친구들과 떨어진 것만 싫어서 돌아가게 해달라고 매달렸지요.”

“한국에 다시 데려가 주면 진짜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어찌나 울고 매달리는지 그냥 데려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굳게 먹었죠.”

떠 나는 날까지도 울며 매달리는 딸 때문에 그는 윤경씨가 잠든 사이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야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윤경씨는 그토록 남기 싫다고 했던 이탈리아에서 엄마가 떠난 지 일주일도 안 돼 친구를 사귀고 유학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머 물던 수녀원에서 같은 나이 친구가 생겨서 이탈리아어를 조금씩 배웠어요. 어학 코스를 시작했을 때는 아는 단어가 꽤 생겼고 그러자 선생님이 잘 한다며 칭찬해주시더라고요. 칭찬과 관심을 받으니까 어학에 흥미가 붙어 1년 코스를 6개월 안에 끝냈어요. 그 때부터 어학과 패션 공부에 불이 붙어 열심히 할 수 있었죠.”

그렇게 윤경씨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패션전문학교 마랑고니를 졸업하고 세콜리에서 마스터 속옷 디자인을 공부한 뒤 6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엄마의 부도…,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딸의 격려

패션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윤경씨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처럼 속옷 디자인을 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기능성 속옷은 말 그대로 기능에 중점을 둔 패턴 설계인데 저는 패션 공부하면서도 패턴 만드는 것이 제일 싫었어요.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예쁘고 화사한 디자인을 하고 싶었지요.”

엄 마 회사에서 잠시 인턴을 해봤지만 아무래도 속옷에는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앙증맞고 귀여운 아동복 디자인을 하고 싶었다. 결국 인형옷 만드는 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석달 동안 월급도 못 받고 일하다가 회사가 문을 닫고 말았다. 엄마 품에 다시 들어갈 때쯤에는 사회가 만만한 곳이 아니고 엄마의 지원이 사회 초년생에게 얼마나 큰 도움인지 잘 알게 됐다.

엄마 사장님 밑에서 신참 속옷 디자이너로 출발해 엄한 훈련을 받았다. 원단 나르는 일부터 시작해서 사업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들을 꾸중들어가며 익히고 배웠다. 속옷의 패턴을 그리고 디자인을 만들고 사장님의 ‘OK’가 떨어질 때까지 버리고 다시 만들고 또 버리는 작업을 무수히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아직 속옷 디자인이 평생의 자기 일로 완전히 마음에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던 윤경씨가 속옷 디자이너로 다시 태어나게 된 계기는 엄마의 사업 실패라는 시련이었다.

그 무서운 IMF 위기도 간신히 겪어내고 회사 규모가 계속 성장해 이제 대기업으로 가는 마지막 발돋움이 남았다 싶었던 순간, 박명복 디자이너에게 인생 최대의 고난이 닥쳤던 것이다. 유통망을 확장하려던 계약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최악의 사태, 부도를 맞았다. 서초동 300평 규모의 회사 건물이 순식간에 날아가버렸고 그가 만든 고가의 명품 속옷들이 길거리에서 땡처리 물건으로 팔려나갔다.

“이제 죽어야 되나 싶어 절망과 무력감에 빠져 도저히 일어날 기운이 없었던 그 때 딸이 옆에서 ‘엄마는 오뚝이잖아. 엄마는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날 수 있어!’ 라고 말해줘서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딸 윤경씨는 “그 때는 엄마가 너무 불쌍했다. 그렇게 화려하고 당당했던 엄마가 모든 걸 다 잃고 쓰러진 모습을 그냥 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내가 도와서 엄마의 화려한 모습을 꼭 다시 찾아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1 백명 넘던 직원 중 4명 남고 다 떠난 마당에 모녀가 서로를 의지하며 다시 시작한 곳이 지금의 사무실 근처, 분당 구미동의 보증금 5백만원에 40만원 월세 지하실이었다. 제대로 된 취사 시설도 없어 화장실에서 물을 받아 라면을 끓여 먹고 재봉틀을 돌리고 실밥을 따가며 재기를 도모했다.

큰 회사와 화려한 사장님 직함이 한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진 자리에서 맨손의 지하실 디자이너로 다시 시작하던 그 때 그가 다시 한번 인생 역전을 이룰 각오로 향한 곳이 찜질방이었다. 찜질방에서 만난 뚱뚱하고 골반이 큰 50대, 가슴이 작고 납작한 30대, 허벅지만 유독 굵은 여성 등 수많은 체형의 몸을 석고로 뜨고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디자인과 아이템을 개발했다. 이 때 얻은 아이디어의 결과물이 실용특허를 받은 수지침올인원과 유방암 환자를 위한 브래지어였다. 마침 불어온 웰빙 바람과 맞물려 건강에 좋은 기능성 속옷이라는 입소문이 나 빠른 속도로 팔려나갔고 그는 재기의 발판을 다질 수 있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윤경씨도 진정한 속옷 디자이너로서의 내실을 다져나갔다.

“그 전에는 딸이랑 같이 외국에 나가서 패션 시장을 다녀도 딸 눈엔 속옷이 안 들어오는구나, 라고 느껴졌어요. 속옷과 상관없는 다른 이야기만 자꾸 하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어딜 가도 속옷 디자인부터 눈에 들어오는가 봐요. 저와 생각과 아이디어도 잘 맞아 디자인도 비슷하게 나오게 됐지요.”

“전에는 엄마가 시키는 일이 뭔지 몰라 화도 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는데 이제는 척척 알아듣는 수준이 됐어요.”

이젠 말하지 않아도 뜻이 통하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친구 같은 모녀

오 윤경 디자인 실장이 작년에 디자인해 내놓은 작품은 유럽에서 유행하는 복고풍 코르셋에 착안해 만든, 겉옷처럼 입을 수 있는 속옷이다. 속옷은 살구색이나 흰색이어야 한다거나 안에 받쳐입는 옷이라는 고정관념을 떠나서 보석을 뿌린 듯 화려한 무늬의 속옷으로 몸매의 실루엣을 멋지게 드러내는 디자인으로 대박 히트를 친 상품이 됐다.

“10대 후반부터 이탈리아에 가 살면서 명품 디자인을 많이 보고 입어보고 공부했던 것이 지금 젊고 독특한 디자인 감각으로 발휘돼 나오는 것 같아요. 딸한테 투자한만큼 열매를 잘 거두고 있다고 지금은 웃으며 말하고 있답니다.”

톱처럼 입는 코르셋에 다양한 디자인과 데코레이션의 칼라를 탈부착하는 이 디자인으로 박명복 디자이너는 지난해 이탈리아 코모와 올해 피렌체에서 열린 박람회에서 디자인 상을 수상하고 수출 제안도 받았다.

회 사 규모가 다시 커진 지금도 ‘에띠임 by 박명복’의 디자인은 오윤경 디자인 실장과 박명복 수석 디자이너가 다 맡아 하고 있다. 디자이너를 고용해 기껏 일을 가르치면 나가서 디자인을 복제해 파는 일들을 겪으며 엄마가 힘들어했던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윤경씨는 “얼마 전 결혼해 내 살림도 해야 하는데 지금도 회사 일과 디자인에 24시간 매달려 살고 있다. 결국 그렇게 닮고 싶지 않았던 엄마 모습 그대로 된 것”이라며 웃는다.

요즘 오윤경씨의 관심사는 출산을 경험한 30대 여성을 겨냥한 속옷이다. 그는 엄마가 내준, “30대 여성들의 처지기 시작하는 힙을 올려주는 기능성 속옷을 디자인하라”는 과제를 수행 중인데 젊은 여성들의 관심사를 모니터링한 결과 가장 많은 여성이 원하는 것이 ‘처지는 힙을 가려주고 보완해 주는 디자인’이었다고 한다. 그는 힙업 기능이 있는 수지침올인원 속옷을 디자인하기 위해 하루에 수 십 개의 패턴을 그리고 찢고 다시 그리는 작업을 반복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디자인의 정석을 배우고 엄마 밑에서 일하면서 실무를 톡톡히 익힌 오 디자인 실장은 새해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기능성 보정 속옷에 대해 더 심층적인 공부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엄마가 배웠던 일본의 은사에게 사사해 기능성 속옷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 목표다.

“기능성 속옷이라고 하면 흔히 몸매가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중년 여성들이 관심 갖는 아이템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어려서부터 예쁜 몸매를 만들어주는 것도 기능성 속옷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청소년이 입을 수 있는 앙증맞고 귀여운 디자인의 기능성 속옷을 만들고 싶어요.”

청소년들을 위해 아름다운 몸의 기초를 잡아주는 속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결의를 밝히는 딸을 엄마는 옆에서 조용히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



글·오진영

사진·조영철

동영상·이지현

국 내에서 처음으로 기능성 속옷 시대를 연 박명복 디자이너와 어머니의 뒤를 이어 신세대 속옷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딸 오윤경씨. 속옷 디자인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엄마를 보며 엄마처럼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반항하던 딸이 엄마의 열정을 이해할 무렵, 모녀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서로 닮아 있음을 발견했다.

엄 마와 딸은 웃을 때 반달형이 되는 눈 모습이 판박이로 닮았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꿈도 열정도 닮아서 하루 종일 한 사무실에서 원단과 체형 마네킹과 줄자 사이를 오가며 함께 일하는 모녀. 국내에서 처음으로 기능성 속옷 사업을 개척해 ‘에띠임 by 박명복’이란 브랜드를 내놓은 (주)로다의 박명복 수석 디자이너(55)와 딸 오윤경 디자인 실장(33)이다.

박명복 디자이너는 우리나라 속옷 사업에 처음으로 패션과 기능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30년간 한 우물을 파 온 디자이너다. 속옷이라면 팍팍 삶아 입는 흰 면 아니면 부모님 선물용 빨간 내복이 전부나 다름없던 시절 그는 패션 감각을 살리고 몸매 보정의 기능을 갖춘 속옷 개발로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오윤경씨는 처음부터 엄마 같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꿈을 키웠던 건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늘 속옷 만들기에 몰두해 있고 사업 때문에 바빠 자신을 꼼꼼하게 돌봐주지 못하는 엄마에게 불만이 많았던 것이다.

“우리 딸이 ‘학교에 갔다가 갑자기 비가 오면 다른 엄마들은 우산을 들고 데리러 오는데 엄마는 한 번도 와주지 않아 서운했다’는 얘기를 참 많이 했어요.”

엄 마에 대한 불만은 사춘기의 방황으로 이어졌고 예고에 미술 전공으로 진학한 딸은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다니기만 좋아하는 문제아가 됐다. 윤경씨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엄마는 너무 바빠서 고3인 나한테 신경을 너무 안 쓴다. 대학을 갈 자신이 없어 집을 나가겠으니 찾지 말라’는 편지를 써놓고 가출을 했다. 정신없이 일하느라 아이들한테 소홀했다는 후회와 반성으로 가슴을 치던 엄마는 결국 딸의 손을 잡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울며 끌려간 이탈리아에서 패션에 대한 열정 생겨

“가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얼마나 화가 났던지 스위스 거쳐서 이탈리아까지 가는 16시간 동안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엄마와 한 마디도 안 했어요.”

이 탈리아는 박명복 디자이너가 딸 윤경씨 세 살 때 속옷 디자인을 공부하러 떠나 머물던 곳이었다. 동네 양품점 주인이었던 ‘윤경 엄마’가 우연히 속옷 시장의 가능성에 관심을 갖게 되고 제대로 속옷 디자인을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어린 두 자녀를 떼어놓고 유학을 떠났던 것이다. 1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 남대문에서 제일 잘나가는 속옷 도매상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일본에서 체형보정 기능성 속옷을 공부하고 돌아와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만든 그는 한국 여성의 체형에 잘 맞고 착용감이 편안한 속옷을 만들어 소비자들의 인정을 받아왔다. 그는 자신의 열정의 원천이었던 이곳에서 딸도 무엇인가를 얻기를 바랐지만 윤경씨는 한국에 다시 데려가 달라고 조르기만 했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이고 엄마 덕분에 누릴 수 있는 혜택인지 그런 생각은 하나도 못했어요. 그저 한국의 친구들과 떨어진 것만 싫어서 돌아가게 해달라고 매달렸지요.”

“한국에 다시 데려가 주면 진짜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어찌나 울고 매달리는지 그냥 데려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굳게 먹었죠.”

떠 나는 날까지도 울며 매달리는 딸 때문에 그는 윤경씨가 잠든 사이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야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윤경씨는 그토록 남기 싫다고 했던 이탈리아에서 엄마가 떠난 지 일주일도 안 돼 친구를 사귀고 유학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머 물던 수녀원에서 같은 나이 친구가 생겨서 이탈리아어를 조금씩 배웠어요. 어학 코스를 시작했을 때는 아는 단어가 꽤 생겼고 그러자 선생님이 잘 한다며 칭찬해주시더라고요. 칭찬과 관심을 받으니까 어학에 흥미가 붙어 1년 코스를 6개월 안에 끝냈어요. 그 때부터 어학과 패션 공부에 불이 붙어 열심히 할 수 있었죠.”

그렇게 윤경씨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패션전문학교 마랑고니를 졸업하고 세콜리에서 마스터 속옷 디자인을 공부한 뒤 6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엄마의 부도…,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딸의 격려

패션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윤경씨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처럼 속옷 디자인을 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기능성 속옷은 말 그대로 기능에 중점을 둔 패턴 설계인데 저는 패션 공부하면서도 패턴 만드는 것이 제일 싫었어요.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예쁘고 화사한 디자인을 하고 싶었지요.”

엄 마 회사에서 잠시 인턴을 해봤지만 아무래도 속옷에는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앙증맞고 귀여운 아동복 디자인을 하고 싶었다. 결국 인형옷 만드는 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석달 동안 월급도 못 받고 일하다가 회사가 문을 닫고 말았다. 엄마 품에 다시 들어갈 때쯤에는 사회가 만만한 곳이 아니고 엄마의 지원이 사회 초년생에게 얼마나 큰 도움인지 잘 알게 됐다.

엄마 사장님 밑에서 신참 속옷 디자이너로 출발해 엄한 훈련을 받았다. 원단 나르는 일부터 시작해서 사업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들을 꾸중들어가며 익히고 배웠다. 속옷의 패턴을 그리고 디자인을 만들고 사장님의 ‘OK’가 떨어질 때까지 버리고 다시 만들고 또 버리는 작업을 무수히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아직 속옷 디자인이 평생의 자기 일로 완전히 마음에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던 윤경씨가 속옷 디자이너로 다시 태어나게 된 계기는 엄마의 사업 실패라는 시련이었다.

그 무서운 IMF 위기도 간신히 겪어내고 회사 규모가 계속 성장해 이제 대기업으로 가는 마지막 발돋움이 남았다 싶었던 순간, 박명복 디자이너에게 인생 최대의 고난이 닥쳤던 것이다. 유통망을 확장하려던 계약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최악의 사태, 부도를 맞았다. 서초동 300평 규모의 회사 건물이 순식간에 날아가버렸고 그가 만든 고가의 명품 속옷들이 길거리에서 땡처리 물건으로 팔려나갔다.

“이제 죽어야 되나 싶어 절망과 무력감에 빠져 도저히 일어날 기운이 없었던 그 때 딸이 옆에서 ‘엄마는 오뚝이잖아. 엄마는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날 수 있어!’ 라고 말해줘서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딸 윤경씨는 “그 때는 엄마가 너무 불쌍했다. 그렇게 화려하고 당당했던 엄마가 모든 걸 다 잃고 쓰러진 모습을 그냥 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내가 도와서 엄마의 화려한 모습을 꼭 다시 찾아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1 백명 넘던 직원 중 4명 남고 다 떠난 마당에 모녀가 서로를 의지하며 다시 시작한 곳이 지금의 사무실 근처, 분당 구미동의 보증금 5백만원에 40만원 월세 지하실이었다. 제대로 된 취사 시설도 없어 화장실에서 물을 받아 라면을 끓여 먹고 재봉틀을 돌리고 실밥을 따가며 재기를 도모했다.

큰 회사와 화려한 사장님 직함이 한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진 자리에서 맨손의 지하실 디자이너로 다시 시작하던 그 때 그가 다시 한번 인생 역전을 이룰 각오로 향한 곳이 찜질방이었다. 찜질방에서 만난 뚱뚱하고 골반이 큰 50대, 가슴이 작고 납작한 30대, 허벅지만 유독 굵은 여성 등 수많은 체형의 몸을 석고로 뜨고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디자인과 아이템을 개발했다. 이 때 얻은 아이디어의 결과물이 실용특허를 받은 수지침올인원과 유방암 환자를 위한 브래지어였다. 마침 불어온 웰빙 바람과 맞물려 건강에 좋은 기능성 속옷이라는 입소문이 나 빠른 속도로 팔려나갔고 그는 재기의 발판을 다질 수 있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윤경씨도 진정한 속옷 디자이너로서의 내실을 다져나갔다.

“그 전에는 딸이랑 같이 외국에 나가서 패션 시장을 다녀도 딸 눈엔 속옷이 안 들어오는구나, 라고 느껴졌어요. 속옷과 상관없는 다른 이야기만 자꾸 하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어딜 가도 속옷 디자인부터 눈에 들어오는가 봐요. 저와 생각과 아이디어도 잘 맞아 디자인도 비슷하게 나오게 됐지요.”

“전에는 엄마가 시키는 일이 뭔지 몰라 화도 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는데 이제는 척척 알아듣는 수준이 됐어요.”

이젠 말하지 않아도 뜻이 통하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친구 같은 모녀

오 윤경 디자인 실장이 작년에 디자인해 내놓은 작품은 유럽에서 유행하는 복고풍 코르셋에 착안해 만든, 겉옷처럼 입을 수 있는 속옷이다. 속옷은 살구색이나 흰색이어야 한다거나 안에 받쳐입는 옷이라는 고정관념을 떠나서 보석을 뿌린 듯 화려한 무늬의 속옷으로 몸매의 실루엣을 멋지게 드러내는 디자인으로 대박 히트를 친 상품이 됐다.

“10대 후반부터 이탈리아에 가 살면서 명품 디자인을 많이 보고 입어보고 공부했던 것이 지금 젊고 독특한 디자인 감각으로 발휘돼 나오는 것 같아요. 딸한테 투자한만큼 열매를 잘 거두고 있다고 지금은 웃으며 말하고 있답니다.”

톱처럼 입는 코르셋에 다양한 디자인과 데코레이션의 칼라를 탈부착하는 이 디자인으로 박명복 디자이너는 지난해 이탈리아 코모와 올해 피렌체에서 열린 박람회에서 디자인 상을 수상하고 수출 제안도 받았다.

회 사 규모가 다시 커진 지금도 ‘에띠임 by 박명복’의 디자인은 오윤경 디자인 실장과 박명복 수석 디자이너가 다 맡아 하고 있다. 디자이너를 고용해 기껏 일을 가르치면 나가서 디자인을 복제해 파는 일들을 겪으며 엄마가 힘들어했던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윤경씨는 “얼마 전 결혼해 내 살림도 해야 하는데 지금도 회사 일과 디자인에 24시간 매달려 살고 있다. 결국 그렇게 닮고 싶지 않았던 엄마 모습 그대로 된 것”이라며 웃는다.

요즘 오윤경씨의 관심사는 출산을 경험한 30대 여성을 겨냥한 속옷이다. 그는 엄마가 내준, “30대 여성들의 처지기 시작하는 힙을 올려주는 기능성 속옷을 디자인하라”는 과제를 수행 중인데 젊은 여성들의 관심사를 모니터링한 결과 가장 많은 여성이 원하는 것이 ‘처지는 힙을 가려주고 보완해 주는 디자인’이었다고 한다. 그는 힙업 기능이 있는 수지침올인원 속옷을 디자인하기 위해 하루에 수 십 개의 패턴을 그리고 찢고 다시 그리는 작업을 반복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디자인의 정석을 배우고 엄마 밑에서 일하면서 실무를 톡톡히 익힌 오 디자인 실장은 새해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기능성 보정 속옷에 대해 더 심층적인 공부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엄마가 배웠던 일본의 은사에게 사사해 기능성 속옷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 목표다.

“기능성 속옷이라고 하면 흔히 몸매가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중년 여성들이 관심 갖는 아이템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어려서부터 예쁜 몸매를 만들어주는 것도 기능성 속옷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청소년이 입을 수 있는 앙증맞고 귀여운 디자인의 기능성 속옷을 만들고 싶어요.”

청소년들을 위해 아름다운 몸의 기초를 잡아주는 속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결의를 밝히는 딸을 엄마는 옆에서 조용히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



글·오진영

사진·조영철

동영상·이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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