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아픈데, 고국엔 못 가고…” 난민들의 현주소

등록 2011.06.21.
어제는 세계 난민의 날이었습니다. 정치·종교·인종적인 차이로 인한 박해를 피해 고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탈출한 이들을 난민이라고 하는데요. 김민지 기자가 한국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난민들의 실생활을 심층 취재했습니다.

[기자]

경기도 부천의 한적한 도로변의 허름한 상가입니다.

이 건물 1층에 미얀마에서 온 아웅나이윙 씨가 살고 있습니다.

함께 사는 친구들은 일하러 나갔지만 그는 세 평도 되지 않는 작은 방에서 하루 종일 홀로 지냅니다.

지난해 여름 설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한 뒤 몸을 추스르고 있습니다.

건강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마음은 무겁습니다.

2000만 원의 수술비와 400여만 원의 치료비 때문입니다.

수술 전엔 식품공장을 다니며 100만 원의 월급을 받았지만 지금은 아예 벌이가 없습니다.

[인터뷰 : 아웅나이윙 / 난민 신청자]

"진짜 순간순간 불안해요. 불안하고 아 진짜…. 어떡해…."

그는 미얀마 군부 정권의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 12년 전 한국으로 왔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어 4년 전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법무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법원에 소송을 냈지만 1,2심 모두 패소했습니다.

대법원에서도 패소판결이 확정되면 아무런 기약 없이 한국을 떠나야 합니다.

[인터뷰 : 아웅나이윙 / 난민 신청자]

"이제 몸 아프죠. 고국에 갈 수도 없고 현재 2차까지 실패하고 나가라고 그러니까…. 난민 인정받으면 좀 나아질까 해서 희망이 있어서…."

미얀마 출신 마웅저 씨는 8년이나 걸려 어렵게 난민 자격을 얻었습니다.

고국에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다 박해를 받게 되자 민주화된 나라인 한국으로 왔습니다.

2000년 난민 신청을 했지만 법무부는 5년이나 시간을 끌다 출국을 권고했습니다.

그는 법원에 소송을 내는 우여곡절 끝에 난민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인터뷰 : 마웅저 / 난민 인정자]

"우린 너무나 섭섭했어요. 우리가 미얀마에서 운동한 것에 대해 심사도 안해, 미얀마에 대해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고…."

마웅저 씨는 한국 정부의 무관심이 가장 큰 장벽이라고 말했습니다.

난민심사 절차가 복잡하지는 않지만 증거만 요구할 뿐 자신들이 처한 사정을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터뷰 : 마웅저 / 난민 인정자]

"한국 정부가 우리 난민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대해 서류상으로 해결하고 싶은 모양이에요. 우리 미얀마 민주화 친구들 말고도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도 보여주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해요."

[스탠드업]

올해 초 법무부가 내놓은 난민 실태조사와 국가인권위원회의 난민 인권 순회상담 결과를 보면 난민 신청자들이 겪는 어려움이 너무나 많습니다.

무엇보다 선진국에 비해 난민 인정심사 기간이 오래 걸립니다.

생계를 꾸려 갈 수 있는 직업 교육이나 주거 시설 같은 지원은 전혀 없습니다.

지난해부터 난민 신청 1년 뒤 취업을 할 수 있게 했지만 현실적으로 취업 허가를 받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취업자격이 없는 난민 신청자들에게 먼저 취업을 한 뒤 이를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말을 모르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통역 서비스도 없습니다.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같은 주요국 언어를 제외하고는 원활한 통역이 제공되지 않고 있습니다.

[인터뷰 : 황필규 / 변호사]

"그동안 난민 인정 과정에서 여러 가지 절차적 보장에서 통역을 문제라든지 변호인 조력을 받을 문제라든지, 아니면 이의 신청하는 심사하는 기관의 독립성 문제라든지 전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별도의 규정도 없었고요."

해마다 난민 인정자가 늘고는 있지만 법무부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는 사례는 드뭅니다.

1994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한 사람은 모두 3000여명.

이 가운데 2백22명이 난민 지위를 얻었습니다.

10퍼센트가 채 안 되는 수치입니다.

[인터뷰 : 황필규 / 변호사]

"관행을 통해서나 드러나는 바에 의하면 (정부는) 난민은 없다고 거의 보고 있고요. 대부분 체류자격 없는 사람들이 난민제도를 악용해서 경제활동 하려고 한다는 의식 수준으로 난민 문제를 대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 앤 메리 캠벨 /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

" 난민 신청한 사람들이 심사가 진행되는 1년간 사실상 제대로 일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대부분 가난한 분들이다. 떠나고 싶어서 떠난 게 아니라 박해를 피해서 국제 보호를 받기 위해서 도망 나온 건데 한국에서 첨 경험하는 이런 것들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난민의 처우 개선을 위해선 현재 국회에 계류돼 있는 `난민 등의 지위와 처우에 관한 법률안`이 하루빨리 통과돼야 한다고 입을 모읍니다.

이 법안은 정부가 난민 신청자에 대한 생계비 지원을 의무화하고 취업 허가 시점을 신청 후 6개월 이상으로 줄이자는 내용입니다.

[인터뷰 : 황우여 / 한나라당 원내대표]

" 제가 2년 전에 난민법에 대한 기본법을 발의한 바가 있죠. 그 법이 빨리 통과됐으면 합니다. 이 법은 난민 60주년을 기념하는 아주 중요한 법이 될 것이고… 동북아 지역에선 난민 문제가 교착상태고 답보상탠데 거기에 큰 기본적인 원칙과 타개책을 제시하는 귀중한 법이 될 것입니다."

어제 세계 난민의 날에는 다채로운 행사들이 열렸습니다.

난민들이 직접 찍은 사진들로 꾸며진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란 이름의 사진전이 열렸습니다.

[녹취 : 마야(가명) / 난민 신청자]

"사진 속 둥지처럼 나만의 둥지를 갖고 싶어요."

[녹취 : 프란시스(가명) / 난민 인정자]

"열쇠는 모든 걸 열 수 있어서 좋아요."

정치적인 이유나 민족 갈등으로 아프리카 땅을 떠나 온 6명의 여성들.

작품 수는 많지 않았지만 이들의 소망은 한결 같았습니다.

힘들지만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둥지를 촬영한 마야는 저 새들처럼 나만의 둥지를 꾸려 살고 싶다고 얘기합니다.

이들 중 유일하게 난민 인정 자격을 얻은 프란시스는 모든 걸 열 수 있는 열쇠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뷰 : 프란시스 / 난민 인정자]

"한국에 온 것은 운명이었죠. 남편 덕분에 왔으니까요.…한국에서의 문화적 차이와 아무리 일해도 돈 벌기가 쉽지 않고 아이들 사교육비가 부담돼 걱정이에요."

[인터뷰 : 장민정 / 난민인권센터 긴급구호팀장]

"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라든가 살 수 있는 지원 없다보니까 거기서부터 지치게 되고 난민 인정이 된다고 했을 때 사실은 신분은 주어졌지만 이제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부분에서 또 공허해지는 상황이거든요."

고국을 떠난 이후 힘든 나날을 보내왔지만 오늘만큼은 그 모든 시름을 잊고 춤을 춥니다.

분명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그 마음 하나로 모두 하나가 된 듯합니다.

[인터뷰 : 이선호 / 대학생]

"난민은 그냥 가난하고 불쌍하고 그런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사진전을 통해서 난민들도 저희랑 다르지 않은 똑같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됐어요."

`난민`이란 두 글자에 보이지 않는 차별의 시선을 보내는 시민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시민단체들과 난민 신청자 등 30여 명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잔디밭에 모였습니다.

[현장음]

"우리는 난민입니다~우리는 떠나온 사람들. 우리는 하나입니다."

마이클 잭슨이 부른 인종 차별을 없애자는 노래 블랙 오얼 화이트에 맞춰 정해진 시간에 다 같이 춤추고 흩어지는 플래시몹 행사를 벌였습니다.

[녹취 : 홍일표 / 한나라당 의원]

"웨디, 한국에서 보람 있는 생활 보내요."

[인터뷰 : 웨디 / 난민 신청자]

"대학생이 돼서 공부를 더 하고 싶어요. 학교 공부…. 로스쿨…. I need to stay KOREA."

정처 없이 지구촌을 떠도는 난민은 모두 4천여 명, 그 중 4분의 1이 아시아 지역에 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에 속한 대부분의 나라가 인구 500명당 평균 1명의 난민을 보호하는데 비해 한국은 아직 인구 20만 명당 1명에 불과합니다.

선진국의 문턱에 진입한 나라로서는 부끄러운 수치입니다.

곤궁한 처지에 빠져 고국을 버리고 멀리서 찾아온 지구촌의 이웃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야 할 때입니다.

채널A 뉴스 김민지입니다.

어제는 세계 난민의 날이었습니다. 정치·종교·인종적인 차이로 인한 박해를 피해 고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탈출한 이들을 난민이라고 하는데요. 김민지 기자가 한국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난민들의 실생활을 심층 취재했습니다.

[기자]

경기도 부천의 한적한 도로변의 허름한 상가입니다.

이 건물 1층에 미얀마에서 온 아웅나이윙 씨가 살고 있습니다.

함께 사는 친구들은 일하러 나갔지만 그는 세 평도 되지 않는 작은 방에서 하루 종일 홀로 지냅니다.

지난해 여름 설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한 뒤 몸을 추스르고 있습니다.

건강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마음은 무겁습니다.

2000만 원의 수술비와 400여만 원의 치료비 때문입니다.

수술 전엔 식품공장을 다니며 100만 원의 월급을 받았지만 지금은 아예 벌이가 없습니다.

[인터뷰 : 아웅나이윙 / 난민 신청자]

"진짜 순간순간 불안해요. 불안하고 아 진짜…. 어떡해…."

그는 미얀마 군부 정권의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 12년 전 한국으로 왔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어 4년 전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법무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법원에 소송을 냈지만 1,2심 모두 패소했습니다.

대법원에서도 패소판결이 확정되면 아무런 기약 없이 한국을 떠나야 합니다.

[인터뷰 : 아웅나이윙 / 난민 신청자]

"이제 몸 아프죠. 고국에 갈 수도 없고 현재 2차까지 실패하고 나가라고 그러니까…. 난민 인정받으면 좀 나아질까 해서 희망이 있어서…."

미얀마 출신 마웅저 씨는 8년이나 걸려 어렵게 난민 자격을 얻었습니다.

고국에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다 박해를 받게 되자 민주화된 나라인 한국으로 왔습니다.

2000년 난민 신청을 했지만 법무부는 5년이나 시간을 끌다 출국을 권고했습니다.

그는 법원에 소송을 내는 우여곡절 끝에 난민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인터뷰 : 마웅저 / 난민 인정자]

"우린 너무나 섭섭했어요. 우리가 미얀마에서 운동한 것에 대해 심사도 안해, 미얀마에 대해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고…."

마웅저 씨는 한국 정부의 무관심이 가장 큰 장벽이라고 말했습니다.

난민심사 절차가 복잡하지는 않지만 증거만 요구할 뿐 자신들이 처한 사정을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터뷰 : 마웅저 / 난민 인정자]

"한국 정부가 우리 난민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대해 서류상으로 해결하고 싶은 모양이에요. 우리 미얀마 민주화 친구들 말고도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도 보여주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해요."

[스탠드업]

올해 초 법무부가 내놓은 난민 실태조사와 국가인권위원회의 난민 인권 순회상담 결과를 보면 난민 신청자들이 겪는 어려움이 너무나 많습니다.

무엇보다 선진국에 비해 난민 인정심사 기간이 오래 걸립니다.

생계를 꾸려 갈 수 있는 직업 교육이나 주거 시설 같은 지원은 전혀 없습니다.

지난해부터 난민 신청 1년 뒤 취업을 할 수 있게 했지만 현실적으로 취업 허가를 받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취업자격이 없는 난민 신청자들에게 먼저 취업을 한 뒤 이를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말을 모르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통역 서비스도 없습니다.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같은 주요국 언어를 제외하고는 원활한 통역이 제공되지 않고 있습니다.

[인터뷰 : 황필규 / 변호사]

"그동안 난민 인정 과정에서 여러 가지 절차적 보장에서 통역을 문제라든지 변호인 조력을 받을 문제라든지, 아니면 이의 신청하는 심사하는 기관의 독립성 문제라든지 전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별도의 규정도 없었고요."

해마다 난민 인정자가 늘고는 있지만 법무부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는 사례는 드뭅니다.

1994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한 사람은 모두 3000여명.

이 가운데 2백22명이 난민 지위를 얻었습니다.

10퍼센트가 채 안 되는 수치입니다.

[인터뷰 : 황필규 / 변호사]

"관행을 통해서나 드러나는 바에 의하면 (정부는) 난민은 없다고 거의 보고 있고요. 대부분 체류자격 없는 사람들이 난민제도를 악용해서 경제활동 하려고 한다는 의식 수준으로 난민 문제를 대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 앤 메리 캠벨 /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

" 난민 신청한 사람들이 심사가 진행되는 1년간 사실상 제대로 일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대부분 가난한 분들이다. 떠나고 싶어서 떠난 게 아니라 박해를 피해서 국제 보호를 받기 위해서 도망 나온 건데 한국에서 첨 경험하는 이런 것들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난민의 처우 개선을 위해선 현재 국회에 계류돼 있는 `난민 등의 지위와 처우에 관한 법률안`이 하루빨리 통과돼야 한다고 입을 모읍니다.

이 법안은 정부가 난민 신청자에 대한 생계비 지원을 의무화하고 취업 허가 시점을 신청 후 6개월 이상으로 줄이자는 내용입니다.

[인터뷰 : 황우여 / 한나라당 원내대표]

" 제가 2년 전에 난민법에 대한 기본법을 발의한 바가 있죠. 그 법이 빨리 통과됐으면 합니다. 이 법은 난민 60주년을 기념하는 아주 중요한 법이 될 것이고… 동북아 지역에선 난민 문제가 교착상태고 답보상탠데 거기에 큰 기본적인 원칙과 타개책을 제시하는 귀중한 법이 될 것입니다."

어제 세계 난민의 날에는 다채로운 행사들이 열렸습니다.

난민들이 직접 찍은 사진들로 꾸며진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란 이름의 사진전이 열렸습니다.

[녹취 : 마야(가명) / 난민 신청자]

"사진 속 둥지처럼 나만의 둥지를 갖고 싶어요."

[녹취 : 프란시스(가명) / 난민 인정자]

"열쇠는 모든 걸 열 수 있어서 좋아요."

정치적인 이유나 민족 갈등으로 아프리카 땅을 떠나 온 6명의 여성들.

작품 수는 많지 않았지만 이들의 소망은 한결 같았습니다.

힘들지만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둥지를 촬영한 마야는 저 새들처럼 나만의 둥지를 꾸려 살고 싶다고 얘기합니다.

이들 중 유일하게 난민 인정 자격을 얻은 프란시스는 모든 걸 열 수 있는 열쇠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뷰 : 프란시스 / 난민 인정자]

"한국에 온 것은 운명이었죠. 남편 덕분에 왔으니까요.…한국에서의 문화적 차이와 아무리 일해도 돈 벌기가 쉽지 않고 아이들 사교육비가 부담돼 걱정이에요."

[인터뷰 : 장민정 / 난민인권센터 긴급구호팀장]

"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라든가 살 수 있는 지원 없다보니까 거기서부터 지치게 되고 난민 인정이 된다고 했을 때 사실은 신분은 주어졌지만 이제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부분에서 또 공허해지는 상황이거든요."

고국을 떠난 이후 힘든 나날을 보내왔지만 오늘만큼은 그 모든 시름을 잊고 춤을 춥니다.

분명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그 마음 하나로 모두 하나가 된 듯합니다.

[인터뷰 : 이선호 / 대학생]

"난민은 그냥 가난하고 불쌍하고 그런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사진전을 통해서 난민들도 저희랑 다르지 않은 똑같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됐어요."

`난민`이란 두 글자에 보이지 않는 차별의 시선을 보내는 시민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시민단체들과 난민 신청자 등 30여 명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잔디밭에 모였습니다.

[현장음]

"우리는 난민입니다~우리는 떠나온 사람들. 우리는 하나입니다."

마이클 잭슨이 부른 인종 차별을 없애자는 노래 블랙 오얼 화이트에 맞춰 정해진 시간에 다 같이 춤추고 흩어지는 플래시몹 행사를 벌였습니다.

[녹취 : 홍일표 / 한나라당 의원]

"웨디, 한국에서 보람 있는 생활 보내요."

[인터뷰 : 웨디 / 난민 신청자]

"대학생이 돼서 공부를 더 하고 싶어요. 학교 공부…. 로스쿨…. I need to stay KOREA."

정처 없이 지구촌을 떠도는 난민은 모두 4천여 명, 그 중 4분의 1이 아시아 지역에 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에 속한 대부분의 나라가 인구 500명당 평균 1명의 난민을 보호하는데 비해 한국은 아직 인구 20만 명당 1명에 불과합니다.

선진국의 문턱에 진입한 나라로서는 부끄러운 수치입니다.

곤궁한 처지에 빠져 고국을 버리고 멀리서 찾아온 지구촌의 이웃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야 할 때입니다.

채널A 뉴스 김민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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