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복서-3> 19명을 차례로 KO시킨 돌주먹, 지금은...

등록 2012.04.12.

경기도 남양주 수락산 초입에 있는 한 음식점. 하산을 한 등산객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백발이 희끗희끗한 장년 남성이 반갑게 맞는다. 남성은 난로에 불을 떼며 사투리억양이 남아있는 정겨운 목소리로 추억 한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그는 바로 주먹으로 세계를 호령했던 박종팔(54)이다. 그가 산에 들어와 사는 사연은 과연 무엇일까.

19연속 KO승의 하드펀처
박종팔이 복싱을 시작한 건 18세 때다. 처음엔 복싱을 하려던 것도 아니었다. 레슬링 체육관을 찾다가 힘들어 포기한 순간 복싱 체육관의 간판이 눈에 들어온 것. 복싱을 시작했지만 아마추어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다. 당시만해도 중량급은 선수가 많지 않았는데 거기서도 번번히 우승을 놓쳤다. 그러던 그가 프로 데뷔 후 달라졌다. 챔피언의 산실로 불리는 신인왕전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이듬해에는 한국 챔피언에 올랐다. 그 다음해에는 동양 챔피언 타이틀도 차지했다. 19연승을 거두는 동안 모든 경기를 KO로 이겼고 대부분 5라운드를 넘기지 않았다. 아시아무대에서는 더 이상 적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맞으면 (KO로 나가)떨어지더라고요. 중량 빼기가 힘들었지요. 중량을 12~13kg 씩 뺐으니까. ‘중량만 빼만 시합은 이긴다’ 그런 생각이었어요”

‘끝판왕’ 마빈 헤글러를 앞에 두고…
박종팔의 목표는 미들급 역대 최고의 복서로 꼽히는 마빈 헤글러였다. 둘의 경기는 거의 성사될 뻔했다. 그러나 박종팔은 전초전이었던 풀헨시오 오벨메이아스 전에서 허무하게 KO패하며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베네수엘라로 원정을 갔는데 고지대여서 몸이 붕붕 떠있는 것 같았어요. 주먹이 꽂혀야 되는데 밀리더라고. 우리 고향말로 ‘헤메다’ 온 시합 같아요.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오벨메이야스는 7년 후 WBA 챔피언이 된 박종팔을 다시 꺾으며 타이틀을 빼앗아가 버리기도 했다. 박종팔로서는 악연 중의 악연인 셈. 그때 만약 그를 이기고 헤글러와 싸웠다면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한국 사람이 강자한테 강하잖아요. 헤글러 스타일도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고. 승패를 떠나서 멋진 경기했을 겁니다.”

연이은 사기에 사업실패. 몰락한 챔피언
복싱이 흥행이 되던 시절, 흔히 볼 수 없었던 중량급 KO펀처 박종팔은 최고의 상품성을 가지고 있었다. 동양 챔피언, IBF 챔피언 시절 한 경기를 뛰면 2~3천만원 정도의 돈이 수중에 들어왔다. 많게는 15만 달러를 받기도 했다. 당시 시세로 아파트 한 채를 사고도 남는 돈이다. 돈이 생기니 사람들이 모여들어 사업제안을 했다. 귀가 솔깃 해질만한 것들이었지만 듣지 말았어야 했다. 은퇴 후 동아프로모션을 인수했다가 동업자가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 바람에 큰 손해를 봤다.

“복싱 선수들이 운동만 하던 사람들이라 순수해요. 남들이 다 자기 같은 줄 알고 믿다가 뒤통수 맞는거죠.”

그래도 복싱은 내 희망
링 밖으로 나온 박종팔은 무기력했다. 사업은 연이어 실패했고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당뇨, 뇌졸중 등 앓고 있던 질환이 4가지나 돼 수락산을 다니면서 죽을 자리를 5군데 봐뒀다. 그러던 중 지금의 아내 이정희(54)씨를 만나 수락산 기슭에 정착했다. 그에게 이정희 씨는 생명의 은인이자 가장 힘들 때 힘이 되어준 사람이다. 다 죽어가던 박종팔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혈색이 돌아왔다.

“인생 참 재밌는 것 같아요. 그때 죽으려고 봐뒀던 자리를 지금은 보면서 피해다녀요. 집사람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도 모르죠”

음식점을 하고 있지만 복싱을 향한 애정의 끈은 놓지 않고 있다. 그의 가게 한쪽 구석에는 사각의 링이 설치돼있다. 박종팔은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제자를 양성해 볼 계획이다. 영광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준 복싱. 그에게 복싱이란 무엇일까.

“복싱이 없었다면 제 이름 석 자가 없었을 거 아닙니까. 복싱은 저에게 희망이자 모든 것입니다.”

동아닷컴 동영상뉴스팀 I 백완종 기자 100p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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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양주 수락산 초입에 있는 한 음식점. 하산을 한 등산객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백발이 희끗희끗한 장년 남성이 반갑게 맞는다. 남성은 난로에 불을 떼며 사투리억양이 남아있는 정겨운 목소리로 추억 한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그는 바로 주먹으로 세계를 호령했던 박종팔(54)이다. 그가 산에 들어와 사는 사연은 과연 무엇일까.

19연속 KO승의 하드펀처
박종팔이 복싱을 시작한 건 18세 때다. 처음엔 복싱을 하려던 것도 아니었다. 레슬링 체육관을 찾다가 힘들어 포기한 순간 복싱 체육관의 간판이 눈에 들어온 것. 복싱을 시작했지만 아마추어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다. 당시만해도 중량급은 선수가 많지 않았는데 거기서도 번번히 우승을 놓쳤다. 그러던 그가 프로 데뷔 후 달라졌다. 챔피언의 산실로 불리는 신인왕전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이듬해에는 한국 챔피언에 올랐다. 그 다음해에는 동양 챔피언 타이틀도 차지했다. 19연승을 거두는 동안 모든 경기를 KO로 이겼고 대부분 5라운드를 넘기지 않았다. 아시아무대에서는 더 이상 적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맞으면 (KO로 나가)떨어지더라고요. 중량 빼기가 힘들었지요. 중량을 12~13kg 씩 뺐으니까. ‘중량만 빼만 시합은 이긴다’ 그런 생각이었어요”

‘끝판왕’ 마빈 헤글러를 앞에 두고…
박종팔의 목표는 미들급 역대 최고의 복서로 꼽히는 마빈 헤글러였다. 둘의 경기는 거의 성사될 뻔했다. 그러나 박종팔은 전초전이었던 풀헨시오 오벨메이아스 전에서 허무하게 KO패하며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베네수엘라로 원정을 갔는데 고지대여서 몸이 붕붕 떠있는 것 같았어요. 주먹이 꽂혀야 되는데 밀리더라고. 우리 고향말로 ‘헤메다’ 온 시합 같아요.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오벨메이야스는 7년 후 WBA 챔피언이 된 박종팔을 다시 꺾으며 타이틀을 빼앗아가 버리기도 했다. 박종팔로서는 악연 중의 악연인 셈. 그때 만약 그를 이기고 헤글러와 싸웠다면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한국 사람이 강자한테 강하잖아요. 헤글러 스타일도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고. 승패를 떠나서 멋진 경기했을 겁니다.”

연이은 사기에 사업실패. 몰락한 챔피언
복싱이 흥행이 되던 시절, 흔히 볼 수 없었던 중량급 KO펀처 박종팔은 최고의 상품성을 가지고 있었다. 동양 챔피언, IBF 챔피언 시절 한 경기를 뛰면 2~3천만원 정도의 돈이 수중에 들어왔다. 많게는 15만 달러를 받기도 했다. 당시 시세로 아파트 한 채를 사고도 남는 돈이다. 돈이 생기니 사람들이 모여들어 사업제안을 했다. 귀가 솔깃 해질만한 것들이었지만 듣지 말았어야 했다. 은퇴 후 동아프로모션을 인수했다가 동업자가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 바람에 큰 손해를 봤다.

“복싱 선수들이 운동만 하던 사람들이라 순수해요. 남들이 다 자기 같은 줄 알고 믿다가 뒤통수 맞는거죠.”

그래도 복싱은 내 희망
링 밖으로 나온 박종팔은 무기력했다. 사업은 연이어 실패했고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당뇨, 뇌졸중 등 앓고 있던 질환이 4가지나 돼 수락산을 다니면서 죽을 자리를 5군데 봐뒀다. 그러던 중 지금의 아내 이정희(54)씨를 만나 수락산 기슭에 정착했다. 그에게 이정희 씨는 생명의 은인이자 가장 힘들 때 힘이 되어준 사람이다. 다 죽어가던 박종팔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혈색이 돌아왔다.

“인생 참 재밌는 것 같아요. 그때 죽으려고 봐뒀던 자리를 지금은 보면서 피해다녀요. 집사람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도 모르죠”

음식점을 하고 있지만 복싱을 향한 애정의 끈은 놓지 않고 있다. 그의 가게 한쪽 구석에는 사각의 링이 설치돼있다. 박종팔은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제자를 양성해 볼 계획이다. 영광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준 복싱. 그에게 복싱이란 무엇일까.

“복싱이 없었다면 제 이름 석 자가 없었을 거 아닙니까. 복싱은 저에게 희망이자 모든 것입니다.”

동아닷컴 동영상뉴스팀 I 백완종 기자 100p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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