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복서-11> 안 맞고 이기는 것도 실력, 최고의 아웃복서

등록 2012.07.06.

“9대 맞고 10대 때리면 뭐합니까? 한 대 때려도 한 대도 안 맞으면 이기는 겁니다, 그게 복싱입니다.”

전 WBC 슈퍼 플라이급 챔피언 조인주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그는 좀처럼 맞지 않는 복서였다. 먼저 치고, 상대가 받아치려고 하면 빠졌다.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상대들은 조인주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의 빠른 발은 상대가 그의 거리 그 이상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덫에 걸린 짐승이 몸부림치다 스스로 지쳐가는 듯 자신의 거리안에 상대를 가두고 서서히 침몰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조인주의 복싱 스타일이었다.

아웃복싱으로 세계 정상에
1979년 소년 조인주는 박찬희가 미구엘 칸토를 꺾고 챔피언에 오르는 장면을 보고 복싱에 매료됐다. 부모님의 만류를 이기고 본격적으로 복싱을 시작하게 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조인주는 아마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87년 세계주니어 선수권대회 은메달,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금메달 등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러나 모든 아마추어 체육인들의 최종 목표인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과는 인연이 없었다. 1990년 아시안게임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한 조인주는 메달의 꿈을 접고 프로로 전향했다.
프로에서도 조인주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외국 선수만을 상대하면서 연승가도를 달렸다. 그리고 만 29세의 늦은 나이에 챔피언 제리 페날로사에게 도전했다.

“그 경기는 작전에서 이겼어요. 페날로사가 사우스포에 파워도 있는데 스텝이 없더라구요. 아웃복싱으로 점수 싸움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한거죠.”

당초 전문가들은 대체로 챔피언 페날로사의 우세를 점쳤다. 그러나 조인주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이거성 프로머터의 예상은 달랐다. 발이 빠른 조인주에게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고 거액을 배팅해 챔피언을 홈으로 불러들였다. 프로모터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아마추어에서 100전 이상을 경험한 조인주는 노련하게 빠른 발로 상대에게 거리를 주지 않으면서도 연이어 클린히트를 성공시켰다. 시종 주도권을 가지고 경기를 운영한 조인주는 판정승을 거두고 챔피언에 올랐다.

재미없는 복서?, 인기없는 챔피언?
국내 유일의 챔피언에 대한 국내 복싱팬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아웃복싱 스타일의 조인주가 ‘재미없는 복싱’을 한다는 것이다. 복싱 팬들은 아웃복서보다는 화끈한 인파이터에 환호했다. 복싱 팬들의 시선은 1차 방어전을 마치고 나자 더욱 차가워졌다.

“그 경기는 진 게임이었습니다. 멕시코 갔으면 졌을 거예요. 그 게임은 제가 1~2점차로 진 걸 인정합니다. 그런데 판정으로 이겼어요. 홈링의 이점이죠.”

언론들도 등을 돌렸다. 신문들은 ‘졸전을 폈쳤다’, ‘도망다니기로 일관했다’고 보도했다. 조인주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묵묵히 자기 스타일을 고집했다. 실력으로 결과를 보여주자는 생각이었다. 조인주는 2차 방어전을 KO로 이기더니 일본 원정 방어전에서도 타이틀을 지켰다. 페날로사와의 2차전도 승리했다. 국내에서는 인기없는 복서였지만 해외에서는 좀처럼 공략하기 어려운 발빠른 챔피언으로 인정받았다.

맞수에서 친구로
조인주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6차 방어전에서 조총련계 복서 홍창수(일본명 도쿠야마 마사모리)에게 패하며 타이틀을 잃었다. 당시 전문가들은 조인주의 무난한 승리를 점쳤었다. 그러나 조인주는 무기력한 경기 끝에 패하고 만다. 홍창수가 준비를 잘 한 것도 있지만 훈련 도중 가슴에 담이 걸려 스파링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것이 또 한 가지 이유였다.
이듬해 서울에서 재대결을 펼치지만 이번에는 프로 데뷔 후 첫 다운을 당하며 5회 KO패하고 만다.

“마음이 쳐져있었어요. 나이도 그렇고 체중감량도 실패했고. 프로와서 다운 당한 게 처음이거든요. KO 당한 것도 처음이고. 그래서 미련이 전혀 없습니다. 깨끗하게 내려놓은 거죠”

이후 홍창수는 조인주를 종종 찾아왔다. 홍창수는 조인주를 형님이라 부른다. 조인주도 홍창수를 좋은 동생이라 생각한다. 복싱이 만들어준 귀한 인연이다.

복싱의 매력 ‘마지막 30초’
조인주는 은퇴 후 지금까지 복싱 체육관을 하고 있다. ‘배운게 복싱밖에 없는 데 다른 무엇을 하겠느냐’ 며 차린 것이 어느덧 11년이 훌쩍 넘었다. 관원은 100여명이 넘는다. 소지섭, 공형진 같은 유명인들도 찾아오기도 했다. 그래도 조인주는 아직 아쉬운 점이 있다. 선수를 지망하고자 하는 관원이 없다는 것. 열정을 가진 제자를 만나 복싱의 매력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것이 그의 작은 바람이다.

“한 개 라운드가 3분인데 라운드 끝나기 전 마지막 30초가 정말 고통스러워요. 그게 2~3시간 가는 것 같거든요. 그걸 이겨냈을 때의 희열. 그게 복싱의 매력이죠.”

그런 면에서 보면 ‘조인주 복싱’은 매력적이다.

“사람들은 조인주 복싱을 재미없다고 말합니다. 안 맞는 것도 실력인데 그런 걸 안쳐주더라고요. 아웃복서였기 때문에 인파이터보다 배로 했다는 것. 스텝도 많이 움직여야 되고 손도 많이 뻗어야 되기 때문에 배로 운동 했다는 것. 그것만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백완종 동아닷컴 기자 100p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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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맞고 10대 때리면 뭐합니까? 한 대 때려도 한 대도 안 맞으면 이기는 겁니다, 그게 복싱입니다.”

전 WBC 슈퍼 플라이급 챔피언 조인주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그는 좀처럼 맞지 않는 복서였다. 먼저 치고, 상대가 받아치려고 하면 빠졌다.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상대들은 조인주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의 빠른 발은 상대가 그의 거리 그 이상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덫에 걸린 짐승이 몸부림치다 스스로 지쳐가는 듯 자신의 거리안에 상대를 가두고 서서히 침몰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조인주의 복싱 스타일이었다.

아웃복싱으로 세계 정상에
1979년 소년 조인주는 박찬희가 미구엘 칸토를 꺾고 챔피언에 오르는 장면을 보고 복싱에 매료됐다. 부모님의 만류를 이기고 본격적으로 복싱을 시작하게 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조인주는 아마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87년 세계주니어 선수권대회 은메달,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금메달 등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러나 모든 아마추어 체육인들의 최종 목표인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과는 인연이 없었다. 1990년 아시안게임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한 조인주는 메달의 꿈을 접고 프로로 전향했다.
프로에서도 조인주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외국 선수만을 상대하면서 연승가도를 달렸다. 그리고 만 29세의 늦은 나이에 챔피언 제리 페날로사에게 도전했다.

“그 경기는 작전에서 이겼어요. 페날로사가 사우스포에 파워도 있는데 스텝이 없더라구요. 아웃복싱으로 점수 싸움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한거죠.”

당초 전문가들은 대체로 챔피언 페날로사의 우세를 점쳤다. 그러나 조인주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이거성 프로머터의 예상은 달랐다. 발이 빠른 조인주에게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고 거액을 배팅해 챔피언을 홈으로 불러들였다. 프로모터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아마추어에서 100전 이상을 경험한 조인주는 노련하게 빠른 발로 상대에게 거리를 주지 않으면서도 연이어 클린히트를 성공시켰다. 시종 주도권을 가지고 경기를 운영한 조인주는 판정승을 거두고 챔피언에 올랐다.

재미없는 복서?, 인기없는 챔피언?
국내 유일의 챔피언에 대한 국내 복싱팬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아웃복싱 스타일의 조인주가 ‘재미없는 복싱’을 한다는 것이다. 복싱 팬들은 아웃복서보다는 화끈한 인파이터에 환호했다. 복싱 팬들의 시선은 1차 방어전을 마치고 나자 더욱 차가워졌다.

“그 경기는 진 게임이었습니다. 멕시코 갔으면 졌을 거예요. 그 게임은 제가 1~2점차로 진 걸 인정합니다. 그런데 판정으로 이겼어요. 홈링의 이점이죠.”

언론들도 등을 돌렸다. 신문들은 ‘졸전을 폈쳤다’, ‘도망다니기로 일관했다’고 보도했다. 조인주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묵묵히 자기 스타일을 고집했다. 실력으로 결과를 보여주자는 생각이었다. 조인주는 2차 방어전을 KO로 이기더니 일본 원정 방어전에서도 타이틀을 지켰다. 페날로사와의 2차전도 승리했다. 국내에서는 인기없는 복서였지만 해외에서는 좀처럼 공략하기 어려운 발빠른 챔피언으로 인정받았다.

맞수에서 친구로
조인주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6차 방어전에서 조총련계 복서 홍창수(일본명 도쿠야마 마사모리)에게 패하며 타이틀을 잃었다. 당시 전문가들은 조인주의 무난한 승리를 점쳤었다. 그러나 조인주는 무기력한 경기 끝에 패하고 만다. 홍창수가 준비를 잘 한 것도 있지만 훈련 도중 가슴에 담이 걸려 스파링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것이 또 한 가지 이유였다.
이듬해 서울에서 재대결을 펼치지만 이번에는 프로 데뷔 후 첫 다운을 당하며 5회 KO패하고 만다.

“마음이 쳐져있었어요. 나이도 그렇고 체중감량도 실패했고. 프로와서 다운 당한 게 처음이거든요. KO 당한 것도 처음이고. 그래서 미련이 전혀 없습니다. 깨끗하게 내려놓은 거죠”

이후 홍창수는 조인주를 종종 찾아왔다. 홍창수는 조인주를 형님이라 부른다. 조인주도 홍창수를 좋은 동생이라 생각한다. 복싱이 만들어준 귀한 인연이다.

복싱의 매력 ‘마지막 30초’
조인주는 은퇴 후 지금까지 복싱 체육관을 하고 있다. ‘배운게 복싱밖에 없는 데 다른 무엇을 하겠느냐’ 며 차린 것이 어느덧 11년이 훌쩍 넘었다. 관원은 100여명이 넘는다. 소지섭, 공형진 같은 유명인들도 찾아오기도 했다. 그래도 조인주는 아직 아쉬운 점이 있다. 선수를 지망하고자 하는 관원이 없다는 것. 열정을 가진 제자를 만나 복싱의 매력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것이 그의 작은 바람이다.

“한 개 라운드가 3분인데 라운드 끝나기 전 마지막 30초가 정말 고통스러워요. 그게 2~3시간 가는 것 같거든요. 그걸 이겨냈을 때의 희열. 그게 복싱의 매력이죠.”

그런 면에서 보면 ‘조인주 복싱’은 매력적이다.

“사람들은 조인주 복싱을 재미없다고 말합니다. 안 맞는 것도 실력인데 그런 걸 안쳐주더라고요. 아웃복서였기 때문에 인파이터보다 배로 했다는 것. 스텝도 많이 움직여야 되고 손도 많이 뻗어야 되기 때문에 배로 운동 했다는 것. 그것만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백완종 동아닷컴 기자 100p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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