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금을 들었다… 더 늙기전에 나는 이구아수 폭포로 간다

등록 2012.08.14.

해마다 여름이 되면 나는 집을 떠나 강원도에서 글을 쓰며 지낸다. 집필 공간은 일정하지 않아서 사찰일 때도 있고 원주 토지문화관일 때도 있다. 올해는 모 대학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도서관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 집에는 주말에 들렀다가 일요일 오후에 다시 강원도로 돌아온다. 이런 패턴의 여름나기를 10년 이상 지속해 오고 있다.

나는 성격이 단순해서 무언가를 결정할 때는 신중한 편이지만 결정한 이후에는 단호한 척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이런 단순함을 나는 스스로 대견스럽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한 곳만을 응시하는 자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야 나는 대부분의 다른 남자들처럼 내가 ‘직진형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좌우를 살필 겨를 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면서 삶의 변화를 가늠하거나 즐길 줄 모르는 무표정한 중년의 사내 말이다.

지난주 일요일에도 나는 서울에서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강원도로 돌아오고 있었다. 수도 없이 오간 길이었다. 무심코 라디오를 켜자 레너드 스키너드의 ‘프리 버드’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청년시절에 내가 아주 좋아하던 노래였다. 순간 가슴에서 묘한 진동이 느껴지면서 곧 파문처럼 번져나갔다. 땅거미가 지는 고속도로는 한적했고 후면경 속으로는 노을이 장엄한 빛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길을 잘못 들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영동고속도로가 아닌 대전 방향 중부고속도로로 계속 달려가고 있었다. 호법 나들목으로 U턴해 오는 사이 나는 오랫동안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살아왔음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러자 돌연 참기 힘든 고통이 엄습하면서 잊었던 꿈들이 하나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10대 때 나의 꿈은 여행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출가해 법(法)을 구하는 사문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20대에서 30대 후반까지 나는 사막과 설국(雪國)을 거쳐 많은 곳을 여행했다. 또 긴 시간을 절에 머물며 은둔과 명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내가 소설가가 된 것은 아마도 여행자와 승려 사이의 타협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선택을 나는 기꺼이 운명으로 받아들였으며 크게 후회한 적도 없다. 그런데 뜻밖에 찾아온 U턴의 상황 속에서 나는 어느덧 내 나이가 오십이라는 것과 더는 여행을 하거나 꿈을 꾸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전에 가려 했으나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곳으로 가기 위해 적금을 들기로 했다. 그러니까 다시 첫 번째 여행지는 아르헨티나의 이구아수 폭포로 정했다. 그곳에 다녀오면 영혼이 변한다는데, 뒤늦게나마 ‘한 소식’ 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두 번째 나의 버킷 리스트는 그동안 잊고 살았던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는 일이다. 머지않은 미래의 어느 해 봄이 되겠지. 개화가 시작되면 제주도로 내려가 그리웠던 사람을 만나 한 끼의 식사와 술을 나눠 마시고 헤어지련다. 그리고 개화 지점을 따라 북상하면서 부산 통영 경주 안동 광주 전주 대전 강릉 속초를 거쳐 고성에 닿을 때까지 그곳에 사는 사람을 만나 역시 한 끼의 식사와 술을 나누고 홀가분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한반도 봄꽃 여행을 하리라.

한 가지 더. 나는 연극계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곤 하는데 어느 날 원로 연출가 한 분이 내게 희곡을 한 번 써보라고 진지하게 권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극작은 아무나 하나요”라며 얼버무렸다. 사실 나는 그분이 내게 이렇게 말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언제 연극에 출연해 보지 않겠소?” 연전에 나는 내 소설을 무대화한 연극에 카메오로 5분쯤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때 야릇한 영감이 뒤통수를 치고 지나갔다. 어? 내게 혹시 배우의 기질이 숨어있는 건가? 그렇다면 언젠가 한 번은 제대로 무대에 서 봐야 하지 않을까? 주연 배우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연극 연출가가 있다면 금명간 연락 좀 주셨으면 합니다만….

윤대녕 소설가 ·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해마다 여름이 되면 나는 집을 떠나 강원도에서 글을 쓰며 지낸다. 집필 공간은 일정하지 않아서 사찰일 때도 있고 원주 토지문화관일 때도 있다. 올해는 모 대학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도서관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 집에는 주말에 들렀다가 일요일 오후에 다시 강원도로 돌아온다. 이런 패턴의 여름나기를 10년 이상 지속해 오고 있다.

나는 성격이 단순해서 무언가를 결정할 때는 신중한 편이지만 결정한 이후에는 단호한 척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이런 단순함을 나는 스스로 대견스럽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한 곳만을 응시하는 자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야 나는 대부분의 다른 남자들처럼 내가 ‘직진형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좌우를 살필 겨를 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면서 삶의 변화를 가늠하거나 즐길 줄 모르는 무표정한 중년의 사내 말이다.

지난주 일요일에도 나는 서울에서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강원도로 돌아오고 있었다. 수도 없이 오간 길이었다. 무심코 라디오를 켜자 레너드 스키너드의 ‘프리 버드’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청년시절에 내가 아주 좋아하던 노래였다. 순간 가슴에서 묘한 진동이 느껴지면서 곧 파문처럼 번져나갔다. 땅거미가 지는 고속도로는 한적했고 후면경 속으로는 노을이 장엄한 빛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길을 잘못 들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영동고속도로가 아닌 대전 방향 중부고속도로로 계속 달려가고 있었다. 호법 나들목으로 U턴해 오는 사이 나는 오랫동안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살아왔음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러자 돌연 참기 힘든 고통이 엄습하면서 잊었던 꿈들이 하나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10대 때 나의 꿈은 여행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출가해 법(法)을 구하는 사문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20대에서 30대 후반까지 나는 사막과 설국(雪國)을 거쳐 많은 곳을 여행했다. 또 긴 시간을 절에 머물며 은둔과 명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내가 소설가가 된 것은 아마도 여행자와 승려 사이의 타협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선택을 나는 기꺼이 운명으로 받아들였으며 크게 후회한 적도 없다. 그런데 뜻밖에 찾아온 U턴의 상황 속에서 나는 어느덧 내 나이가 오십이라는 것과 더는 여행을 하거나 꿈을 꾸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전에 가려 했으나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곳으로 가기 위해 적금을 들기로 했다. 그러니까 다시 첫 번째 여행지는 아르헨티나의 이구아수 폭포로 정했다. 그곳에 다녀오면 영혼이 변한다는데, 뒤늦게나마 ‘한 소식’ 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두 번째 나의 버킷 리스트는 그동안 잊고 살았던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는 일이다. 머지않은 미래의 어느 해 봄이 되겠지. 개화가 시작되면 제주도로 내려가 그리웠던 사람을 만나 한 끼의 식사와 술을 나눠 마시고 헤어지련다. 그리고 개화 지점을 따라 북상하면서 부산 통영 경주 안동 광주 전주 대전 강릉 속초를 거쳐 고성에 닿을 때까지 그곳에 사는 사람을 만나 역시 한 끼의 식사와 술을 나누고 홀가분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한반도 봄꽃 여행을 하리라.

한 가지 더. 나는 연극계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곤 하는데 어느 날 원로 연출가 한 분이 내게 희곡을 한 번 써보라고 진지하게 권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극작은 아무나 하나요”라며 얼버무렸다. 사실 나는 그분이 내게 이렇게 말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언제 연극에 출연해 보지 않겠소?” 연전에 나는 내 소설을 무대화한 연극에 카메오로 5분쯤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때 야릇한 영감이 뒤통수를 치고 지나갔다. 어? 내게 혹시 배우의 기질이 숨어있는 건가? 그렇다면 언젠가 한 번은 제대로 무대에 서 봐야 하지 않을까? 주연 배우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연극 연출가가 있다면 금명간 연락 좀 주셨으면 합니다만….

윤대녕 소설가 ·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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