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복서-14> 두 손으로도 힘든 세계 챔피언 한 손으로…

등록 2012.09.11.

1975년 11월 7일 일본 오사카. OPBF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 염동균은 일본의 다나카 후타로를 상대로 판정승을 거두며 5차 방어에 성공했다. 그러나 귀국길에 오른 염동균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시합 중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부러져버린 것. 그는 귀국하자마자 고향인 대전으로 돌아가 극비리에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수술결과는 좋지 않았다. 엄지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아 글러브를 제대로 낄 수 없었고 통증때문에 오른손 펀치를 낼 수도 없었다. 연승행진에 환호하는 팬들을 뒤로하고 은퇴를 준비해야하는 염동균의 심경은 착잡하기만 했다.

한국 챔피언 최다방어의 스타
염동균은 최고의 스타였다. 거북이처럼 잔뜩 웅크린채 가드를 바짝 올린 일명 ‘터틀가드’ 는 난공불락이었다. 동양챔피언 시절까지 패배는 단 한번. 그나마도 괌 원정에서 일방적인 편파판정을 당한 것으로 경기내용은 염동균의 완벽한 승리였다. 한국 챔피언 시절 이룬 14차 방어는 한국 권투 사상 최고의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가장 선수층이 두터웠던 체급에서 라이벌들을 모두 물리치고 지킨 벨트였기에 더욱 갚지게 평가되는 업적이었다. 염동균이 승승장구 할수록 팬들의 기대도 커졌다. 은퇴를 고려하고 있는 염동균의 마음 고생은 점점 심해졌다. 팬들의 눈에는 염동균이 세계 챔피언을 목전에 둔 것처럼 보였을 터였다.

아웃복싱에 눈뜨다
1976년 2월 . 세계권투평의회(이하 WBC)에 슈퍼 밴텀급이 신설되며 세계랭킹이 발표됐다. 염동균의 랭킹은 2위. 랭킹 1위인 리고베르토 리아스코와 결정전을 치러 승리하면 초대 챔피언에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염동균은 고민에 빠졌다. 부상으로 인해 특기인 오른손 훅을 못치는 상황에서 승리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평생 한번 올까 말까 한 세계 챔피언 도전을 포기할 순 없었다.
무하마드 알리의 시합을 보게 된 것은 그 쯤이다. 염동균은 알리의 복싱에서 답을 찾았다. 바로 빠른 풋워크를 바탕으로 한 아웃복싱. 부상을 당한 오른손을 많이 내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밖에는 없을 것 같았다. 염동균은 매니저를 통해 리아스코와의 타이틀 결정전을 미루고 5개월간 풋워크를 연마했다.
1976년 8월 1일. 부산 야외 링에서 염동균은 시종 리아스코를 몰아붙이며 무더위에 지친 관중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버렸다.리아스코는 염동균의 풋워크를 따라잡지 못했다. 누가봐도 염동균의 압도적인 승리. 그러나 15라운드 종료 후 채점표를 받은 로자 딜라 주심은 리아스코의 손을 들어올렸다. 어처구니 없는 결과에 성난 관중들은 몰래 경기장을 빠져나가려던 주심을 잡아 링으로 끌어올렸고 주심은 다시 염동균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러나 WBC는 일주일 후 리아스코의 승리를 다시 선언했다. 유례없는 해프닝에 복싱 팬들은 반발했다.

한국 최초 WBC 챔피언
반발이 거세지자 WBC는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염동균에게 리아스코와 로얄 고바야시 전의 승자와 타이틀전을 치를 수 있게 한 것. 염동균은 리아스코를 누르고 새 챔피언이 된 고바야시를 상대로 운명을 건 일전에 나섰다. 당시 고바야시는 KO율이 90%에 이르는 강타자였다. 게다가 한국선수 킬러로도 유명했다. 황복수, 윤석태, 이대환, 유화룡, 이종윤 등이 그의 희생양이 됐다. 염동균은 내심 걱정이 됐다. 유화룡을 2회 KO로 눌러버린 경기는 일본에 가서 직접 봤을 정도로 고바야시의 실력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묘책은 있었다. KO펀처인 고바야시와 난타전을 피하고 더욱 철저하게 풋워크를 살려 아웃복싱을 한다는 작전이었다. 운 좋게도 고바야시를 1라운드에 한 차례 다운시킬 수 있었고 그 다음부터는 작전대로 철저한 아웃복싱을 했다. 고바야시는 펀치력은 강했지만 염동균의 풋워크를 따라오지 못했다. 흡사 ‘도망가는 토끼와 쫓는 거북의 싸움’ 같았다. 결국 염동균은 다운시켜 얻은 점수를 15라운드 내내 잘 지키고 WBC 슈퍼밴텀급 챔피언에 등극했다.
염동균은 챔피언벨트를 오래 지키지는 못했다. 2차 방어전에서 강타자 윌프레도 고메즈를 만나 1라운드에 다운을 뺏는 등 선전했지만 결국 12라운드에 KO패를 당하고 만다. 그러나 전혀 아쉽지 않다는 게 염동균의 말이다. 그는 “두 손으로도 이루기 힘든 챔피언을 한 손으로 이뤘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운아”라고 말했다.

집념은 태산도 움직인다
염동균은 은퇴 후 여러 일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결국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말처럼 그도 복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79년부터 프로모터로 변신해 흥행을 책임졌다. 장정구, 유명우, 박종팔 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세계 챔피언이 됐다. 지금까지 세계 타이틀전만 30여 차례, 동양타이틀 전과 논타이틀 전을 포함하면 300차례 이상의 대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복싱대회를 개최 할 수 있는 환경은 어려워지고 있다. 염동균은 유료관중을 모집하기 위해 길거리에서 티켓을 팔기도 했다. 염동균은 “챔피언 자존심도 다 버렸다”고 말했다. 무엇이 이토록 염동균을 복싱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걸까. 염동균은 “복싱을 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그렇기 때문에 복싱을 다시 살려야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또 “나는 한손이 성치 않은 상태에서 챔피언이 된 사람”이라고 말하고 “복싱을 하며 ‘집념은 태산도 움직인다’ 라는 걸 배웠다”면서 복싱의 흥행을 위해 노력할 것임을 밝혔다.

백완종 동아닷컴 기자 100p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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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1월 7일 일본 오사카. OPBF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 염동균은 일본의 다나카 후타로를 상대로 판정승을 거두며 5차 방어에 성공했다. 그러나 귀국길에 오른 염동균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시합 중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부러져버린 것. 그는 귀국하자마자 고향인 대전으로 돌아가 극비리에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수술결과는 좋지 않았다. 엄지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아 글러브를 제대로 낄 수 없었고 통증때문에 오른손 펀치를 낼 수도 없었다. 연승행진에 환호하는 팬들을 뒤로하고 은퇴를 준비해야하는 염동균의 심경은 착잡하기만 했다.

한국 챔피언 최다방어의 스타
염동균은 최고의 스타였다. 거북이처럼 잔뜩 웅크린채 가드를 바짝 올린 일명 ‘터틀가드’ 는 난공불락이었다. 동양챔피언 시절까지 패배는 단 한번. 그나마도 괌 원정에서 일방적인 편파판정을 당한 것으로 경기내용은 염동균의 완벽한 승리였다. 한국 챔피언 시절 이룬 14차 방어는 한국 권투 사상 최고의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가장 선수층이 두터웠던 체급에서 라이벌들을 모두 물리치고 지킨 벨트였기에 더욱 갚지게 평가되는 업적이었다. 염동균이 승승장구 할수록 팬들의 기대도 커졌다. 은퇴를 고려하고 있는 염동균의 마음 고생은 점점 심해졌다. 팬들의 눈에는 염동균이 세계 챔피언을 목전에 둔 것처럼 보였을 터였다.

아웃복싱에 눈뜨다
1976년 2월 . 세계권투평의회(이하 WBC)에 슈퍼 밴텀급이 신설되며 세계랭킹이 발표됐다. 염동균의 랭킹은 2위. 랭킹 1위인 리고베르토 리아스코와 결정전을 치러 승리하면 초대 챔피언에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염동균은 고민에 빠졌다. 부상으로 인해 특기인 오른손 훅을 못치는 상황에서 승리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평생 한번 올까 말까 한 세계 챔피언 도전을 포기할 순 없었다.
무하마드 알리의 시합을 보게 된 것은 그 쯤이다. 염동균은 알리의 복싱에서 답을 찾았다. 바로 빠른 풋워크를 바탕으로 한 아웃복싱. 부상을 당한 오른손을 많이 내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밖에는 없을 것 같았다. 염동균은 매니저를 통해 리아스코와의 타이틀 결정전을 미루고 5개월간 풋워크를 연마했다.
1976년 8월 1일. 부산 야외 링에서 염동균은 시종 리아스코를 몰아붙이며 무더위에 지친 관중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버렸다.리아스코는 염동균의 풋워크를 따라잡지 못했다. 누가봐도 염동균의 압도적인 승리. 그러나 15라운드 종료 후 채점표를 받은 로자 딜라 주심은 리아스코의 손을 들어올렸다. 어처구니 없는 결과에 성난 관중들은 몰래 경기장을 빠져나가려던 주심을 잡아 링으로 끌어올렸고 주심은 다시 염동균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러나 WBC는 일주일 후 리아스코의 승리를 다시 선언했다. 유례없는 해프닝에 복싱 팬들은 반발했다.

한국 최초 WBC 챔피언
반발이 거세지자 WBC는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염동균에게 리아스코와 로얄 고바야시 전의 승자와 타이틀전을 치를 수 있게 한 것. 염동균은 리아스코를 누르고 새 챔피언이 된 고바야시를 상대로 운명을 건 일전에 나섰다. 당시 고바야시는 KO율이 90%에 이르는 강타자였다. 게다가 한국선수 킬러로도 유명했다. 황복수, 윤석태, 이대환, 유화룡, 이종윤 등이 그의 희생양이 됐다. 염동균은 내심 걱정이 됐다. 유화룡을 2회 KO로 눌러버린 경기는 일본에 가서 직접 봤을 정도로 고바야시의 실력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묘책은 있었다. KO펀처인 고바야시와 난타전을 피하고 더욱 철저하게 풋워크를 살려 아웃복싱을 한다는 작전이었다. 운 좋게도 고바야시를 1라운드에 한 차례 다운시킬 수 있었고 그 다음부터는 작전대로 철저한 아웃복싱을 했다. 고바야시는 펀치력은 강했지만 염동균의 풋워크를 따라오지 못했다. 흡사 ‘도망가는 토끼와 쫓는 거북의 싸움’ 같았다. 결국 염동균은 다운시켜 얻은 점수를 15라운드 내내 잘 지키고 WBC 슈퍼밴텀급 챔피언에 등극했다.
염동균은 챔피언벨트를 오래 지키지는 못했다. 2차 방어전에서 강타자 윌프레도 고메즈를 만나 1라운드에 다운을 뺏는 등 선전했지만 결국 12라운드에 KO패를 당하고 만다. 그러나 전혀 아쉽지 않다는 게 염동균의 말이다. 그는 “두 손으로도 이루기 힘든 챔피언을 한 손으로 이뤘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운아”라고 말했다.

집념은 태산도 움직인다
염동균은 은퇴 후 여러 일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결국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말처럼 그도 복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79년부터 프로모터로 변신해 흥행을 책임졌다. 장정구, 유명우, 박종팔 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세계 챔피언이 됐다. 지금까지 세계 타이틀전만 30여 차례, 동양타이틀 전과 논타이틀 전을 포함하면 300차례 이상의 대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복싱대회를 개최 할 수 있는 환경은 어려워지고 있다. 염동균은 유료관중을 모집하기 위해 길거리에서 티켓을 팔기도 했다. 염동균은 “챔피언 자존심도 다 버렸다”고 말했다. 무엇이 이토록 염동균을 복싱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걸까. 염동균은 “복싱을 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그렇기 때문에 복싱을 다시 살려야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또 “나는 한손이 성치 않은 상태에서 챔피언이 된 사람”이라고 말하고 “복싱을 하며 ‘집념은 태산도 움직인다’ 라는 걸 배웠다”면서 복싱의 흥행을 위해 노력할 것임을 밝혔다.

백완종 동아닷컴 기자 100p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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