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발로 다시 찾은 삶, 런던 패럴림픽 육상 은메달 전민재 선수

등록 2012.10.04.
“스무 살까지만 살래” 엄마 가슴에 못 박더니…
엄마는 눈을 의심했다. 평소처럼 방에 틀어박혀 있다 나온 딸이 던지고 간 편지 한 장. 거기에는 ‘엄마, 나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라는 글자가 삐뚤빼뚤 적혀 있었다.

“이게 부모한테 할 소리냐.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엄마는 딸에게 소리를 질렀다. 단단히 혼을 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오죽했으면 이랬을까, 자식의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딸은 열다섯 살이 돼서도 집에만 있었다. 친구들과 동생들이 모두 학교에 갈 때 그는 외톨이였다. TV를 보는 게 유일한 낙이자 소일거리였다. 당시 TV를 통해 알게 된 영화 제목이 바로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백혈병에 걸린 소녀가 의연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청춘 영화의 주인공처럼 딸은 그렇게 세상과 이별하고 싶은 듯했다. 사춘기의 딸에게 당시처럼 사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었다.

○ 생사의 기로: 죽음과 맞바꾼 장애

“바로 큰 병원에 갔으면 괜찮았을 거예요. 아니, 추석 연휴만 아니었어도 제대로 치료를 받았을 텐데….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너무 후회스러워요.”

전민재(35)의 어머니 한재영 씨(61)는 30년 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전북 진안군 진안읍 반월리. 전민재는 읍내에서 십 리를 더 들어가야 마주치는 그곳에서 6녀 1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또래에게 무엇 하나 뒤지지 않는 아이였다. 영리하고 말 잘 듣는 착한 딸이었다. 다섯 살 때 원인 모를 뇌염에 걸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1982년 추석을 앞둔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난 딸은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복통도 호소했다. 온몸이 불덩이 같았다. 아버지가 안고 집을 나섰다. 읍내 작은 병원에서는 장염이라고 진단했다. 사흘 동안 약을 먹이고 주사를 맞혔지만 나아지기는커녕 몸이 더 끓었다. 부랴부랴 전주에 있는 큰 병원을 알아봤지만 하필 연휴라 의사가 없었다. 사경을 헤매는 딸을 데리고 일주일 만에 전주로 갔지만 이미 늦었다. 원인 모를 뇌염으로 인한 뇌성마비였다.

농사일을 나간 부모를 대신해 갓 태어난 여동생을 등에 업고 토닥거렸던 전민재의 손은 며칠 새 뒤틀려 있었다. 자장가를 불러 주던 입은 외마디 소리만 토해낼 뿐이었다. 말을 못하고 손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여자아이는 언니들이 다니는 학교에 갈 수 없었다.

부모는 딸이 놀림을 받을까 입학을 미뤘다지만 그런 딸을 받아 줄 학교는 인근에 없었다.

○ 다시 찾은 삶: 고통을 감내하다

죽음을 생각하던 딸은 고통스러운 사춘기를 보낸 뒤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래 봤자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외출이라고는 마을 교회에 가는 게 전부였다. 그게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늦긴 했지만 민재를 학교에 보내는 게 어떨까요.”

교회 목사님의 이 한마디가 갇혀 있던 전민재를 끌어냈다. 목사님은 전민재의 첫 번째 은인이었다. 기숙사를 갖춘 전주의 특수 초등학교를 알려줬고, 월요일이면 차로 학교에 데려다 주고 토요일에 집으로 데려오는 일을 자처했다. 1996년 열아홉 살 늦은 나이로 초등학생이 된 전민재는 덕분에 원하던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발로 그림도 그리게 됐다.

전민재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교 과정이 함께 있는 전주 동암재활학교에 진학했다. 거기서 두 번째 은인을 만났다. 중학교 2학년이던 2003년 육상을 권유한 체육선생님이었다.

“별생각 없이 시작했는데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달릴 때 가슴이 뻥 뚫리는 것도 좋았죠. 선생님도 가능성을 보셨는지 끊임없이 채찍질과 격려를 해주셨어요.”(전민재)

달릴 때는 말이 필요 없었다. 바람을 가르는 짜릿한 느낌은 덤이었다. 그해 충남 천안에서 열린 장애인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해 금메달과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육상선수’ 전민재는 그렇게 세상으로 나왔다.

이듬해부터 각종 대회 금메달을 휩쓸었다. 자연스럽게 태극마크도 달았다. 2006년 말레이시아 아태장애인경기 100m, 200m에 출전해 각각 동메달을 땄다. 내친 김에 2008년 베이징 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에 출전했지만 200m에서 4위, 100m에서는 6위에 그쳤다. 국내에는 적수가 없었지만 세계의 벽은 높았다. 혹독한 훈련. 전민재가 생각한 해결책이었다.

마음을 다잡았다고 여건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당시만 해도 대표팀은 허름한 여인숙을 전전하며 빈 운동장에서 훈련을 했다. 영양을 갖춘 식사는 사치였다. 김칫국에 밥 말아먹는 것도 감지덕지했다. 그나마 짧은 합숙기간이 끝나면 소속팀이 없는 전민재는 혼자가 됐다.

“내 딸이지만 정말 독해요. 직접 시간표를 짜서 붙여놓은 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훈련을 했죠. 집 근처에 운동장이 없어 골목길을 뛰고 차도를 달렸어요. 줄자로 100m 거리를 표시한 뒤 발톱이 빠져 피를 흘리면서도 쉬지 않고 뛰었어요. 하루는 고물상에서 차 발통(폐타이어)을 사달라더니 그걸 허리에 묶고 고추밭과 논두렁을 달리더라고요.”(한재영 씨)

혼자 하는 훈련은 한계가 뚜렷했다. 체력은 좋아졌지만 기록은 제자리였다. 육상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질주는 나의 힘: 발로 세상을 얻다“힘든 육상을 포기하고 구족화가(입 또는 발로 붓을 사용하는 화가)가 되려 했어요. 그러다 지금 대표팀 성희준 감독님을 만나면서 다시 희망을 갖게 됐죠. 2010년 광저우 장애인아시아경기에서 바라던 금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어요.”(전민재)

전민재가 만난 세 번째 은인이 성 감독이다. 비장애인 육상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두 차례 올림픽에 출전했고 전국체육대회에서 금메달 7개를 딴 그는 자신이 받았던 체계적인 방식으로 제자를 가르쳤다. 2009년 말 이천 장애인체육종합훈련원이 문을 연 것도 행운이었다. 이미 30대 초반의 늦은 나이였지만 전민재의 기록은 나날이 향상됐다. 전문 지도자를 만났고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곳을 얻은 덕분이었다.

지난달 1일 런던 올림픽스타디움. 전민재는 육상 여자 200m(T36등급·뇌성마비 장애)에서 은메달을 땄다. 키 146cm의 그가 자신보다 한 뼘은 더 큰 선수들을 제치고 질주하는 모습에 관객 8만여 명은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다.
일주일 뒤. 전민재는 기대하지 않았던 100m에서 14초70의 개인 최고기록으로 두 번째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결승선을 통과한 전민재는 언론의 인터뷰 요청에 미리 준비한 ‘발로 쓴 편지’를 보여줬다. 성 감독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사춘기에 발로 쓴 편지는 엄마를 울렸고 올 런던에서 쓴 편지는 세상을 울렸다. 이번에는 회한의 눈물이 아니라 감동의 눈물이었다.

제자의 깜짝 편지에 성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정말 고마웠지만 이번에도 내색을 안했다. 또 다른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2년 전 광저우에서 은메달 2개를 딴 뒤 기뻐서 울 때 일부러 매몰차게 대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런던 패럴림픽에서 보여 주자고. 나이는 있지만 기록 단축 가능성이 충분하다. 2014년 인천 장애인아시아경기에서는 2관왕이 유력하고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패럴림픽에서 다시 한 번 금메달에 도전해볼 만하다.”

전민재는 이제 매달 연금을 받는다. 나이 서른이 넘어 처음으로 벌게 된 돈이다. 딸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모님을 위해 낡은 세탁기를 바꿔주고 싶다”고 했다. 평생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던 엄마가 “우리 딸이 최고 효녀”라며 활짝 웃는다.

살아 있는 한, 살아 숨쉬고 있는 한 누구에게나 희망은 있다.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었던 전민재는 이제 2016년을 바라보고 있다. 마흔을 눈앞에 둔 그가 쓸 편지는 어떤 내용일까.
○ 에필로그

전민재와의 인터뷰는 어머니 한재영 씨가 함께한 자리에서 이뤄졌다. 엄마가 기자의 질문에 답변을 하면 딸은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을 해줬다. 엄마의 기억이 사실과 다를 때는 딸이 정정을 했다. 큰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가로저은 뒤 손가락으로 테이블에 무언가를 적었다. 발로 쓰는 게 정확하고 편하지만 낯선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애써 움직이기 힘든 손을 사용했다. 기자는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엄마는 달랐다. 세상 모든 뇌성마비 장애인의 부모가 그렇듯 어머니는 최고의 통역이었다. 전민재는 최근 기자에게 200자 원고지 10장 분량의 e메일을 보내 왔다. 작성하는 데 3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기사에 쓴 전민재의 말은 여기서 따왔다. e메일에서 전민재는 목숨을 얻은 대신 장애를 갖게 된 얘기와 런던 패럴림픽에서 메달을 따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썼다.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맺었다.

“저처럼 연습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선수들을 위해 다른 종목처럼 실업팀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관계자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장애인 육상도 실업팀을 만들어 주세요.”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스무 살까지만 살래” 엄마 가슴에 못 박더니…
엄마는 눈을 의심했다. 평소처럼 방에 틀어박혀 있다 나온 딸이 던지고 간 편지 한 장. 거기에는 ‘엄마, 나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라는 글자가 삐뚤빼뚤 적혀 있었다.

“이게 부모한테 할 소리냐.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엄마는 딸에게 소리를 질렀다. 단단히 혼을 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오죽했으면 이랬을까, 자식의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딸은 열다섯 살이 돼서도 집에만 있었다. 친구들과 동생들이 모두 학교에 갈 때 그는 외톨이였다. TV를 보는 게 유일한 낙이자 소일거리였다. 당시 TV를 통해 알게 된 영화 제목이 바로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백혈병에 걸린 소녀가 의연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청춘 영화의 주인공처럼 딸은 그렇게 세상과 이별하고 싶은 듯했다. 사춘기의 딸에게 당시처럼 사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었다.

○ 생사의 기로: 죽음과 맞바꾼 장애

“바로 큰 병원에 갔으면 괜찮았을 거예요. 아니, 추석 연휴만 아니었어도 제대로 치료를 받았을 텐데….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너무 후회스러워요.”

전민재(35)의 어머니 한재영 씨(61)는 30년 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전북 진안군 진안읍 반월리. 전민재는 읍내에서 십 리를 더 들어가야 마주치는 그곳에서 6녀 1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또래에게 무엇 하나 뒤지지 않는 아이였다. 영리하고 말 잘 듣는 착한 딸이었다. 다섯 살 때 원인 모를 뇌염에 걸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1982년 추석을 앞둔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난 딸은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복통도 호소했다. 온몸이 불덩이 같았다. 아버지가 안고 집을 나섰다. 읍내 작은 병원에서는 장염이라고 진단했다. 사흘 동안 약을 먹이고 주사를 맞혔지만 나아지기는커녕 몸이 더 끓었다. 부랴부랴 전주에 있는 큰 병원을 알아봤지만 하필 연휴라 의사가 없었다. 사경을 헤매는 딸을 데리고 일주일 만에 전주로 갔지만 이미 늦었다. 원인 모를 뇌염으로 인한 뇌성마비였다.

농사일을 나간 부모를 대신해 갓 태어난 여동생을 등에 업고 토닥거렸던 전민재의 손은 며칠 새 뒤틀려 있었다. 자장가를 불러 주던 입은 외마디 소리만 토해낼 뿐이었다. 말을 못하고 손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여자아이는 언니들이 다니는 학교에 갈 수 없었다.

부모는 딸이 놀림을 받을까 입학을 미뤘다지만 그런 딸을 받아 줄 학교는 인근에 없었다.

○ 다시 찾은 삶: 고통을 감내하다

죽음을 생각하던 딸은 고통스러운 사춘기를 보낸 뒤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래 봤자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외출이라고는 마을 교회에 가는 게 전부였다. 그게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늦긴 했지만 민재를 학교에 보내는 게 어떨까요.”

교회 목사님의 이 한마디가 갇혀 있던 전민재를 끌어냈다. 목사님은 전민재의 첫 번째 은인이었다. 기숙사를 갖춘 전주의 특수 초등학교를 알려줬고, 월요일이면 차로 학교에 데려다 주고 토요일에 집으로 데려오는 일을 자처했다. 1996년 열아홉 살 늦은 나이로 초등학생이 된 전민재는 덕분에 원하던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발로 그림도 그리게 됐다.

전민재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교 과정이 함께 있는 전주 동암재활학교에 진학했다. 거기서 두 번째 은인을 만났다. 중학교 2학년이던 2003년 육상을 권유한 체육선생님이었다.

“별생각 없이 시작했는데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달릴 때 가슴이 뻥 뚫리는 것도 좋았죠. 선생님도 가능성을 보셨는지 끊임없이 채찍질과 격려를 해주셨어요.”(전민재)

달릴 때는 말이 필요 없었다. 바람을 가르는 짜릿한 느낌은 덤이었다. 그해 충남 천안에서 열린 장애인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해 금메달과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육상선수’ 전민재는 그렇게 세상으로 나왔다.

이듬해부터 각종 대회 금메달을 휩쓸었다. 자연스럽게 태극마크도 달았다. 2006년 말레이시아 아태장애인경기 100m, 200m에 출전해 각각 동메달을 땄다. 내친 김에 2008년 베이징 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에 출전했지만 200m에서 4위, 100m에서는 6위에 그쳤다. 국내에는 적수가 없었지만 세계의 벽은 높았다. 혹독한 훈련. 전민재가 생각한 해결책이었다.

마음을 다잡았다고 여건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당시만 해도 대표팀은 허름한 여인숙을 전전하며 빈 운동장에서 훈련을 했다. 영양을 갖춘 식사는 사치였다. 김칫국에 밥 말아먹는 것도 감지덕지했다. 그나마 짧은 합숙기간이 끝나면 소속팀이 없는 전민재는 혼자가 됐다.

“내 딸이지만 정말 독해요. 직접 시간표를 짜서 붙여놓은 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훈련을 했죠. 집 근처에 운동장이 없어 골목길을 뛰고 차도를 달렸어요. 줄자로 100m 거리를 표시한 뒤 발톱이 빠져 피를 흘리면서도 쉬지 않고 뛰었어요. 하루는 고물상에서 차 발통(폐타이어)을 사달라더니 그걸 허리에 묶고 고추밭과 논두렁을 달리더라고요.”(한재영 씨)

혼자 하는 훈련은 한계가 뚜렷했다. 체력은 좋아졌지만 기록은 제자리였다. 육상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질주는 나의 힘: 발로 세상을 얻다“힘든 육상을 포기하고 구족화가(입 또는 발로 붓을 사용하는 화가)가 되려 했어요. 그러다 지금 대표팀 성희준 감독님을 만나면서 다시 희망을 갖게 됐죠. 2010년 광저우 장애인아시아경기에서 바라던 금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어요.”(전민재)

전민재가 만난 세 번째 은인이 성 감독이다. 비장애인 육상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두 차례 올림픽에 출전했고 전국체육대회에서 금메달 7개를 딴 그는 자신이 받았던 체계적인 방식으로 제자를 가르쳤다. 2009년 말 이천 장애인체육종합훈련원이 문을 연 것도 행운이었다. 이미 30대 초반의 늦은 나이였지만 전민재의 기록은 나날이 향상됐다. 전문 지도자를 만났고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곳을 얻은 덕분이었다.

지난달 1일 런던 올림픽스타디움. 전민재는 육상 여자 200m(T36등급·뇌성마비 장애)에서 은메달을 땄다. 키 146cm의 그가 자신보다 한 뼘은 더 큰 선수들을 제치고 질주하는 모습에 관객 8만여 명은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다.
일주일 뒤. 전민재는 기대하지 않았던 100m에서 14초70의 개인 최고기록으로 두 번째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결승선을 통과한 전민재는 언론의 인터뷰 요청에 미리 준비한 ‘발로 쓴 편지’를 보여줬다. 성 감독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사춘기에 발로 쓴 편지는 엄마를 울렸고 올 런던에서 쓴 편지는 세상을 울렸다. 이번에는 회한의 눈물이 아니라 감동의 눈물이었다.

제자의 깜짝 편지에 성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정말 고마웠지만 이번에도 내색을 안했다. 또 다른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2년 전 광저우에서 은메달 2개를 딴 뒤 기뻐서 울 때 일부러 매몰차게 대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런던 패럴림픽에서 보여 주자고. 나이는 있지만 기록 단축 가능성이 충분하다. 2014년 인천 장애인아시아경기에서는 2관왕이 유력하고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패럴림픽에서 다시 한 번 금메달에 도전해볼 만하다.”

전민재는 이제 매달 연금을 받는다. 나이 서른이 넘어 처음으로 벌게 된 돈이다. 딸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모님을 위해 낡은 세탁기를 바꿔주고 싶다”고 했다. 평생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던 엄마가 “우리 딸이 최고 효녀”라며 활짝 웃는다.

살아 있는 한, 살아 숨쉬고 있는 한 누구에게나 희망은 있다.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었던 전민재는 이제 2016년을 바라보고 있다. 마흔을 눈앞에 둔 그가 쓸 편지는 어떤 내용일까.
○ 에필로그

전민재와의 인터뷰는 어머니 한재영 씨가 함께한 자리에서 이뤄졌다. 엄마가 기자의 질문에 답변을 하면 딸은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을 해줬다. 엄마의 기억이 사실과 다를 때는 딸이 정정을 했다. 큰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가로저은 뒤 손가락으로 테이블에 무언가를 적었다. 발로 쓰는 게 정확하고 편하지만 낯선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애써 움직이기 힘든 손을 사용했다. 기자는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엄마는 달랐다. 세상 모든 뇌성마비 장애인의 부모가 그렇듯 어머니는 최고의 통역이었다. 전민재는 최근 기자에게 200자 원고지 10장 분량의 e메일을 보내 왔다. 작성하는 데 3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기사에 쓴 전민재의 말은 여기서 따왔다. e메일에서 전민재는 목숨을 얻은 대신 장애를 갖게 된 얘기와 런던 패럴림픽에서 메달을 따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썼다.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맺었다.

“저처럼 연습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선수들을 위해 다른 종목처럼 실업팀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관계자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장애인 육상도 실업팀을 만들어 주세요.”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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