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소행 아직도 못믿겠다니… 지금도 피가 거꾸로 솟아”

등록 2013.03.26.
26일 천안함 폭침 3년… 장병 56명 구한 고영재 당시 해경함장



25일 오전 9시경 경기 평택시 해군 2함대사령부. 고영재 평택해양경찰서 경무기획과장(58·경정)과 동료들이 3년 전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인천 옹진군 백령도 앞바다에서 두 동강 난 채 침몰했다가 인양된 천안함의 안보전시관에 모였다.

고 과장은 2010년 3월 26일 천안함이 폭침될 때 대청도 인근 해역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인천해경 501함의 함장이었다. 당시 501함은 해군에서 ‘천안함 침몰’이라는 무전연락을 받고, 22km 거리를 40여 분 만에 달려 도착해 생존 장병 56명을 구했다. 어선이 구한 2명을 빼고는 501함이 큰 역할을 한 것.

하얀 국화꽃을 천안함 아래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그와 동료들은 고개를 숙인 채 산화한 46용사에 대한 명복을 빌었다. 묵념을 끝낸 고 과장의 시선이 천안함의 절단면을 응시했다. 종이처럼 구겨져 빨갛게 녹슨 선체와 이리저리 뒤엉킨 전선들, 휘어진 프로펠러를 보며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 과장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천안함은 이미 90도가량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선체의 3분의 2 정도가 침수돼 함미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며 “당시 해군 함정 4척이 있었지만 천안함에 접근할 경우 충격으로 가라앉을 가능성이 있어 주변에서 서치라이트만 비추며 접근 가능한 배를 애타게 기다리던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고 과장의 지휘 아래 501함 해경들은 3m의 높은 파도 속에서 고무보트 2척을 바다에 내려 천안함에 접근했다. 함수 부위 포탑과 난간에 있던 승조원들은 차례로 고무보트로 옮겨 탔다. 구조를 시작한 지 30분 만에 함수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상황이 더욱 긴박해졌지만 승조원은 끝까지 질서를 지키며 구조 순서를 기다렸다. 고무보트 2척이 수차례 왕복하며 정신없이 실어 날랐다.

501함에 오른 생존 장병은 식당과 숙소 등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큰 충격을 받은 장병들은 해군 고속정에 인계될 때까지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동이 틀 무렵 천안함이 함수를 하늘로 들어올리며 가라앉는 모습을 보니 정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는 “20년 동안 경비함을 탔던 경험과 수심이 깊은 백령도 앞바다의 해저지형 등을 감안했을 때 좌초로 선체가 두 동강이 나는 건 불가능하다고 본다”며 “아직도 북한의 공격이라는 데 의문을 던지는 것은 46용사와 그 유족들에게 더 큰 아픔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 과장은 생존 장병을 신속하게 구조한 공로로 2010년 10월 경정으로 특진하고, 옥조근정훈장을 받았다. 당시 501함에 타고 있던 동료들 모두 훈·포장과 표창을 받았다. 그는 이듬해 목포해경서로 발령받아 불법조업 중국어선을 나포하다 올 1월 천안함이 전시된 평택 앞바다를 지키는 평택해경서에 배치됐다. 내년 명예퇴직을 앞두고 있는 그는 “천안함 구조작전에 나서 역사의 비극을 경험했지만 이 때문에 과분한 특진도 했다”며 “하늘의 뜻인지 이제는 천안함과 함께 평택에서 공직생활을 마감해야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생존 장병을 구조한 501함도 더이상 바다에서 볼 수 없다. 1978년 건조돼 선령(船齡)이 33년이 넘어 해상경비 임무를 마치고, 2011년 퇴역함에 따라 지난해 해체됐다.

참배를 마치고 2함대사령부 정문을 나서던 그가 기자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우리 국민들이 꼭 한 번 시간을 내서 2함대사령부에 다녀가라는 기사를 써 주셨으면 좋겠어요. 북한의 만행으로 두 동강 난 천안함을 떠올리면서 그날의 비극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국민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2010년 5월 이곳에 전시된 천안함을 보기 위해 지금까지 57만여 명이 다녀갔다.



평택2함대사령부=황금천 기자 kchwang@donga.com

26일 천안함 폭침 3년… 장병 56명 구한 고영재 당시 해경함장



25일 오전 9시경 경기 평택시 해군 2함대사령부. 고영재 평택해양경찰서 경무기획과장(58·경정)과 동료들이 3년 전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인천 옹진군 백령도 앞바다에서 두 동강 난 채 침몰했다가 인양된 천안함의 안보전시관에 모였다.

고 과장은 2010년 3월 26일 천안함이 폭침될 때 대청도 인근 해역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인천해경 501함의 함장이었다. 당시 501함은 해군에서 ‘천안함 침몰’이라는 무전연락을 받고, 22km 거리를 40여 분 만에 달려 도착해 생존 장병 56명을 구했다. 어선이 구한 2명을 빼고는 501함이 큰 역할을 한 것.

하얀 국화꽃을 천안함 아래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그와 동료들은 고개를 숙인 채 산화한 46용사에 대한 명복을 빌었다. 묵념을 끝낸 고 과장의 시선이 천안함의 절단면을 응시했다. 종이처럼 구겨져 빨갛게 녹슨 선체와 이리저리 뒤엉킨 전선들, 휘어진 프로펠러를 보며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 과장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천안함은 이미 90도가량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선체의 3분의 2 정도가 침수돼 함미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며 “당시 해군 함정 4척이 있었지만 천안함에 접근할 경우 충격으로 가라앉을 가능성이 있어 주변에서 서치라이트만 비추며 접근 가능한 배를 애타게 기다리던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고 과장의 지휘 아래 501함 해경들은 3m의 높은 파도 속에서 고무보트 2척을 바다에 내려 천안함에 접근했다. 함수 부위 포탑과 난간에 있던 승조원들은 차례로 고무보트로 옮겨 탔다. 구조를 시작한 지 30분 만에 함수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상황이 더욱 긴박해졌지만 승조원은 끝까지 질서를 지키며 구조 순서를 기다렸다. 고무보트 2척이 수차례 왕복하며 정신없이 실어 날랐다.

501함에 오른 생존 장병은 식당과 숙소 등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큰 충격을 받은 장병들은 해군 고속정에 인계될 때까지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동이 틀 무렵 천안함이 함수를 하늘로 들어올리며 가라앉는 모습을 보니 정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는 “20년 동안 경비함을 탔던 경험과 수심이 깊은 백령도 앞바다의 해저지형 등을 감안했을 때 좌초로 선체가 두 동강이 나는 건 불가능하다고 본다”며 “아직도 북한의 공격이라는 데 의문을 던지는 것은 46용사와 그 유족들에게 더 큰 아픔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 과장은 생존 장병을 신속하게 구조한 공로로 2010년 10월 경정으로 특진하고, 옥조근정훈장을 받았다. 당시 501함에 타고 있던 동료들 모두 훈·포장과 표창을 받았다. 그는 이듬해 목포해경서로 발령받아 불법조업 중국어선을 나포하다 올 1월 천안함이 전시된 평택 앞바다를 지키는 평택해경서에 배치됐다. 내년 명예퇴직을 앞두고 있는 그는 “천안함 구조작전에 나서 역사의 비극을 경험했지만 이 때문에 과분한 특진도 했다”며 “하늘의 뜻인지 이제는 천안함과 함께 평택에서 공직생활을 마감해야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생존 장병을 구조한 501함도 더이상 바다에서 볼 수 없다. 1978년 건조돼 선령(船齡)이 33년이 넘어 해상경비 임무를 마치고, 2011년 퇴역함에 따라 지난해 해체됐다.

참배를 마치고 2함대사령부 정문을 나서던 그가 기자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우리 국민들이 꼭 한 번 시간을 내서 2함대사령부에 다녀가라는 기사를 써 주셨으면 좋겠어요. 북한의 만행으로 두 동강 난 천안함을 떠올리면서 그날의 비극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국민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2010년 5월 이곳에 전시된 천안함을 보기 위해 지금까지 57만여 명이 다녀갔다.



평택2함대사령부=황금천 기자 kc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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