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최영훈]청와대의 ‘인사 포비아’

등록 2014.07.18.
노무현 정부 출범 초기 모 부처 차관급 인사에 얽힌 얘기는 당시 청와대의 속살을 보여준다. 정찬용 인사보좌관이 3배수 명단을 노 대통령에게 내밀자 “3순위가 일을 잘하는 사람인데…”라고 말했다. 며칠 뒤 똑같은 안을 다시 가져가니까 노 대통령이 “알았어요”라며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다. 정 보좌관은 깨질 각오를 하고 원안대로 1순위 인사로 발표를 해버렸다.

다음 날 오전 수석보좌관회의가 끝나자 노 대통령이 그를 따로 불렀다. “항명하시는 겁니까.” 정 보좌관은 “잘못됐습니다. 정정하겠습니다”라고 답한 뒤 한마디 덧붙였다. “바보 같은 인사보좌관도 사표를 내겠습니다.” 그러자 노 대통령도 굳은 표정을 풀고는 씩 웃고 넘어갔다고 한다. 요즘 같으면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랄 ‘무거운 죄’를 저지른 그는 나중에 첫 인사수석비서관으로 중용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인사수석비서관으로 정진철 대전복지재단 대표를 임명한 날 필자는 광주에 낙향해 있는 정찬용 전 수석에게 전화를 했다. 박근혜 정부의 2기 내각 인사는 참사 수준이다. 의견을 묻자 그는 “대통령이 문제”라는 투로 짧게 답했다. 좁은 인재풀에서 많은 일을 혼자 결정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박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 변할 것으로 기대하긴 어렵다는 얘기다.

박 정부의 인사는 김기춘 비서실장이 위원장인 인사위원회가 맡지만 ‘윗분의 뜻’을 받드는 데 머문다는 혹평을 받고 있다. 정 수석은 간사를 맡게 된다. ‘노(NO)’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은 구조다. ‘국회의원은 아무리 부패해도 유권자의 눈치를 보지만, 관료 출신은 아무리 훌륭해도 인사권자의 눈치만 살핀다’는 말이 있다. 관료 출신인 정 수석도 ‘받아쓰기’만 하면 보좌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있는 청와대 본관 집무실은 천장이 높고, 문을 열고도 스무 걸음은 걸어가야 한다. 혼자 보고를 하러 가게 되면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긴장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에게 통상의 3배수 명단에 2명을 늘려 5배수로 인사안을 보고하더라도 대통령이 “이 사람은 어때요”라며 다른 사람을 들이밀면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다. 그렇게 ‘수첩 속의 인사’가 낙점된 사례가 여럿이라는 소문이 꼬리를 문다.

그러다 보니 인사 참사가 벌어져 청와대 내에 인사 포비아(공포증)라는 말까지 나와도 누가 잘못했는지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 노 정부 때는 이기준 교육부총리가 아들의 부정입학 의혹으로 재임 사흘 만에 사퇴하자 당시 박정규 민정수석과 정찬용 인사수석도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인사 추천과 검증의 권한을 주고 책임을 묻는 시스템을 확립하지 않으면 인사 실패 때마다 대통령에게 바로 화살이 날아올 수밖에 없다.

정 수석이 코드인사 비판을 부른 노무현 청와대의 인사시스템을 그대로 벤치마킹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박 대통령도, 김 비서실장도 달라질 가능성이 없다면 정 수석이라도 새 바람을 불어넣어야 한다. 시간이 날 때 인사수석으론 선배 격인 정찬용 전 수석에게 한 수 배우러 가면 어떨까. 인사의 디테일보다, 지엄한 대통령에게 ‘항명’까지는 아니더라도 할 말을 하는 기개는 배우면 좋겠다.

용인 에버랜드에는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의 묘소가 있다. 그의 묘비명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자기보다 현명한 인재를 모아들이고자 노력을 했던 사나이 여기 잠들다.”

박 대통령은 2012년 대선 후보 때 “성별과 지역과 여야를 떠나서 천하의 인재를 등용해서 최고의 일류 정부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인사 검증을 걱정할 게 아니라 삼고초려를 해서 널리 인재를 구하는 일에 진력하면 된다. 박 대통령은 초심(初心)을 벌써 잊어버린 것인가.

최영훈 논설위원 tao4@donga.com

노무현 정부 출범 초기 모 부처 차관급 인사에 얽힌 얘기는 당시 청와대의 속살을 보여준다. 정찬용 인사보좌관이 3배수 명단을 노 대통령에게 내밀자 “3순위가 일을 잘하는 사람인데…”라고 말했다. 며칠 뒤 똑같은 안을 다시 가져가니까 노 대통령이 “알았어요”라며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다. 정 보좌관은 깨질 각오를 하고 원안대로 1순위 인사로 발표를 해버렸다.

다음 날 오전 수석보좌관회의가 끝나자 노 대통령이 그를 따로 불렀다. “항명하시는 겁니까.” 정 보좌관은 “잘못됐습니다. 정정하겠습니다”라고 답한 뒤 한마디 덧붙였다. “바보 같은 인사보좌관도 사표를 내겠습니다.” 그러자 노 대통령도 굳은 표정을 풀고는 씩 웃고 넘어갔다고 한다. 요즘 같으면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랄 ‘무거운 죄’를 저지른 그는 나중에 첫 인사수석비서관으로 중용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인사수석비서관으로 정진철 대전복지재단 대표를 임명한 날 필자는 광주에 낙향해 있는 정찬용 전 수석에게 전화를 했다. 박근혜 정부의 2기 내각 인사는 참사 수준이다. 의견을 묻자 그는 “대통령이 문제”라는 투로 짧게 답했다. 좁은 인재풀에서 많은 일을 혼자 결정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박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 변할 것으로 기대하긴 어렵다는 얘기다.

박 정부의 인사는 김기춘 비서실장이 위원장인 인사위원회가 맡지만 ‘윗분의 뜻’을 받드는 데 머문다는 혹평을 받고 있다. 정 수석은 간사를 맡게 된다. ‘노(NO)’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은 구조다. ‘국회의원은 아무리 부패해도 유권자의 눈치를 보지만, 관료 출신은 아무리 훌륭해도 인사권자의 눈치만 살핀다’는 말이 있다. 관료 출신인 정 수석도 ‘받아쓰기’만 하면 보좌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있는 청와대 본관 집무실은 천장이 높고, 문을 열고도 스무 걸음은 걸어가야 한다. 혼자 보고를 하러 가게 되면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긴장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에게 통상의 3배수 명단에 2명을 늘려 5배수로 인사안을 보고하더라도 대통령이 “이 사람은 어때요”라며 다른 사람을 들이밀면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다. 그렇게 ‘수첩 속의 인사’가 낙점된 사례가 여럿이라는 소문이 꼬리를 문다.

그러다 보니 인사 참사가 벌어져 청와대 내에 인사 포비아(공포증)라는 말까지 나와도 누가 잘못했는지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 노 정부 때는 이기준 교육부총리가 아들의 부정입학 의혹으로 재임 사흘 만에 사퇴하자 당시 박정규 민정수석과 정찬용 인사수석도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인사 추천과 검증의 권한을 주고 책임을 묻는 시스템을 확립하지 않으면 인사 실패 때마다 대통령에게 바로 화살이 날아올 수밖에 없다.

정 수석이 코드인사 비판을 부른 노무현 청와대의 인사시스템을 그대로 벤치마킹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박 대통령도, 김 비서실장도 달라질 가능성이 없다면 정 수석이라도 새 바람을 불어넣어야 한다. 시간이 날 때 인사수석으론 선배 격인 정찬용 전 수석에게 한 수 배우러 가면 어떨까. 인사의 디테일보다, 지엄한 대통령에게 ‘항명’까지는 아니더라도 할 말을 하는 기개는 배우면 좋겠다.

용인 에버랜드에는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의 묘소가 있다. 그의 묘비명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자기보다 현명한 인재를 모아들이고자 노력을 했던 사나이 여기 잠들다.”

박 대통령은 2012년 대선 후보 때 “성별과 지역과 여야를 떠나서 천하의 인재를 등용해서 최고의 일류 정부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인사 검증을 걱정할 게 아니라 삼고초려를 해서 널리 인재를 구하는 일에 진력하면 된다. 박 대통령은 초심(初心)을 벌써 잊어버린 것인가.

최영훈 논설위원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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