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情에 울린 전화벨 “입안 혀처럼 놀던 자들이 반기를…”

등록 2014.09.13.
국가재건최고회의 전체회의에서 ‘긴급통화조치법’을 의결한 다음 날부터 화폐를 교환하려는 사람들로 은행마다 장사진을 이루었다. 세상이 뒤집혀진 것 같았다. 최고회의 안에는 긴급통화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김동하 장군이 위원장이 됐다. 그러나 그는 계획단계부터 참여하지도 않았고 명색이 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장이었지만 사실 소외되어 있었다. 모든 일은 유원식 재정위원이 도맡아 처리했다. 물론 김 위원장에게 보고도 안 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긴급조치법을 시행하면서 사전에 미국 정부나 원조기구 등과 일언반구 협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당시 정부 예산구조를 살펴보면 우리나라가 자력으로 마련한 수입 대금은 국가 예산의 3분의 2도 안 됐고, 나머지는 미국의 원조로 나라살림을 겨우 꾸려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미국 원조는 한미 간에 설치한 합동경제위원회(CEB)에서 용도를 심의해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미국 측 대표인 킬렌은 즉각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에게는 원조중단이라는 잘 드는 칼이 있었다.

미국 측이 강하게 반발하자, 최고회의 내부에서도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다. 김동하 재정경제위원장은 자기도 전혀 모르는 가운데 비상조치가 취해졌다는 사실에 격분했고, 최고회의 이주일 부의장도 회의석상에서 노골적으로 유 장군을 몰아세웠다.

“알라스카 놈들, 일제히 반격이 시작됐군.” 그는 공공연히 함경도 출신 장군들을 ‘알라스카 놈들’이라고 비난했다. 중앙정보부 김종필 부장이 유 장군에게 메모를 전해왔다.

‘고군분투하고 있는 유 장군의 노고에 위로를 보냅니다. 일단 출발한 이 계획이 차질 없이 추진되기 바라며 유 장군이 이를 잘 수습하리라 믿습니다. 누차 말씀드렸지만 우리의 생일은 각각 다르다 하더라도 우리의 제삿날은 같다는 저의 결심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습니다….’ 나는 ‘제삿날은 같을 것’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종필은 훗날 월간조선 오효진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화폐개혁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고 발을 뺐다.

“내가 불려간 것은 주문한 화폐가 홍콩에 도착하고 난 다음입니다. 그 화폐가 곧 부산에 도착할 터이니 그때부터 보호하라는 지시를 받은 겁니다. 내가 여기서 확실히 얘기하지만 그 (통화개혁)계획을 우리가 세워서 추진한 것처럼 아는데 그건 잘못입니다.”

날이 갈수록 통화개혁 조치에 대한 내외의 반발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이규행 기자가 서울 삼선동 유 장군 집으로 아침 일찍 찾아왔다. 개별적으로 기자를 일절 만나지 않던 유 장군에게 그는 취재가 아니라 해명의 기회를 준다고 설득했다.

“긴급통화조치에 대해 미국과 일부 국민 간에 오해가 있습니다. 그 조치가 사회주의적인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현재 이 조치에 대하여 자본국유화라는 비난의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유 장군은 속으로 뜨끔한 모양이다. 그는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번 통화긴급조치의 발상은 내가 처음으로 제기하여 박정희 의장이 받아들인 것이다.”

“사회주의적 방식이란 말도 안 된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기 위하여 내자동원의 한 방법으로 추진한 것뿐이다.”

“미국과 사전에 협의하지 않은 것은 보안 때문이었지 절대 민족주의적 접근은 아니다.”

다음 날 동아일보에 대문짝만 한 기사가 났다. 해명을 해준 것이 아니라 유 장군이 마치 ‘내가 다 한 것이다’라고 원맨쇼를 한 것 같았다.

유 장군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아니 이렇게 기사를 쓰다니…. 언제 내가 다 했다고 했나?” 그는 항상 박정희 의장보다 앞서 가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과도하게 신경을 써왔다. 그가 통화개혁의 아이디어도 자기가 제안했다는 말은 사실 ‘사회주의적 조치’라는 비난을 박 의장이 받을 것 같아서 방탄용으로 한 말이었는데 신문에는 마치 ‘박 의장은 결재도장만 찍었을 뿐 사실은 내가 주인공이다’라는 식으로 표현이 돼있었다.

최고회의 의장실에서는 미국 측을 설득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유 장군은 의장실 의전담당인 조상호 중령을 대동하고 현재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맞은편에 있는 주한 미대사관으로 갔다.

버거 대사와 면담 후 유 장군은 상황을 낙관했던 것 같다. 기자들이 몰려와 물었다. 유 장군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약간의 오해가 있었지만 곧 이해가 되었고요. 이번 통화조치에 대하여 적극 협조하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자 미 대사관 측은 즉각 부인 성명을 냈다. “아무 것도 양해한 사실이 없다.”

그러던 차에 송요찬 내각 수반이 사의를 표했다. 송 수반은 증권파동 때부터 이미 정면으로 최고회의와 이견을 드러냈다. 그는 중앙정보부가 증권시장에 개입하고 금융통화위원회가 돈을 푼 것에 대하여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내각수반은 결국 바지저고리 아니냐?”고 불만을 토했다.

유 장군은 김종필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까지는 입안에 혀처럼 놀던 친구들이 오늘 모두 반기를 들고 있어요!”  

국가재건최고회의 전체회의에서 ‘긴급통화조치법’을 의결한 다음 날부터 화폐를 교환하려는 사람들로 은행마다 장사진을 이루었다. 세상이 뒤집혀진 것 같았다. 최고회의 안에는 긴급통화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김동하 장군이 위원장이 됐다. 그러나 그는 계획단계부터 참여하지도 않았고 명색이 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장이었지만 사실 소외되어 있었다. 모든 일은 유원식 재정위원이 도맡아 처리했다. 물론 김 위원장에게 보고도 안 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긴급조치법을 시행하면서 사전에 미국 정부나 원조기구 등과 일언반구 협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당시 정부 예산구조를 살펴보면 우리나라가 자력으로 마련한 수입 대금은 국가 예산의 3분의 2도 안 됐고, 나머지는 미국의 원조로 나라살림을 겨우 꾸려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미국 원조는 한미 간에 설치한 합동경제위원회(CEB)에서 용도를 심의해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미국 측 대표인 킬렌은 즉각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에게는 원조중단이라는 잘 드는 칼이 있었다.

미국 측이 강하게 반발하자, 최고회의 내부에서도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다. 김동하 재정경제위원장은 자기도 전혀 모르는 가운데 비상조치가 취해졌다는 사실에 격분했고, 최고회의 이주일 부의장도 회의석상에서 노골적으로 유 장군을 몰아세웠다.

“알라스카 놈들, 일제히 반격이 시작됐군.” 그는 공공연히 함경도 출신 장군들을 ‘알라스카 놈들’이라고 비난했다. 중앙정보부 김종필 부장이 유 장군에게 메모를 전해왔다.

‘고군분투하고 있는 유 장군의 노고에 위로를 보냅니다. 일단 출발한 이 계획이 차질 없이 추진되기 바라며 유 장군이 이를 잘 수습하리라 믿습니다. 누차 말씀드렸지만 우리의 생일은 각각 다르다 하더라도 우리의 제삿날은 같다는 저의 결심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습니다….’ 나는 ‘제삿날은 같을 것’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종필은 훗날 월간조선 오효진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화폐개혁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고 발을 뺐다.

“내가 불려간 것은 주문한 화폐가 홍콩에 도착하고 난 다음입니다. 그 화폐가 곧 부산에 도착할 터이니 그때부터 보호하라는 지시를 받은 겁니다. 내가 여기서 확실히 얘기하지만 그 (통화개혁)계획을 우리가 세워서 추진한 것처럼 아는데 그건 잘못입니다.”

날이 갈수록 통화개혁 조치에 대한 내외의 반발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이규행 기자가 서울 삼선동 유 장군 집으로 아침 일찍 찾아왔다. 개별적으로 기자를 일절 만나지 않던 유 장군에게 그는 취재가 아니라 해명의 기회를 준다고 설득했다.

“긴급통화조치에 대해 미국과 일부 국민 간에 오해가 있습니다. 그 조치가 사회주의적인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현재 이 조치에 대하여 자본국유화라는 비난의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유 장군은 속으로 뜨끔한 모양이다. 그는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번 통화긴급조치의 발상은 내가 처음으로 제기하여 박정희 의장이 받아들인 것이다.”

“사회주의적 방식이란 말도 안 된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기 위하여 내자동원의 한 방법으로 추진한 것뿐이다.”

“미국과 사전에 협의하지 않은 것은 보안 때문이었지 절대 민족주의적 접근은 아니다.”

다음 날 동아일보에 대문짝만 한 기사가 났다. 해명을 해준 것이 아니라 유 장군이 마치 ‘내가 다 한 것이다’라고 원맨쇼를 한 것 같았다.

유 장군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아니 이렇게 기사를 쓰다니…. 언제 내가 다 했다고 했나?” 그는 항상 박정희 의장보다 앞서 가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과도하게 신경을 써왔다. 그가 통화개혁의 아이디어도 자기가 제안했다는 말은 사실 ‘사회주의적 조치’라는 비난을 박 의장이 받을 것 같아서 방탄용으로 한 말이었는데 신문에는 마치 ‘박 의장은 결재도장만 찍었을 뿐 사실은 내가 주인공이다’라는 식으로 표현이 돼있었다.

최고회의 의장실에서는 미국 측을 설득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유 장군은 의장실 의전담당인 조상호 중령을 대동하고 현재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맞은편에 있는 주한 미대사관으로 갔다.

버거 대사와 면담 후 유 장군은 상황을 낙관했던 것 같다. 기자들이 몰려와 물었다. 유 장군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약간의 오해가 있었지만 곧 이해가 되었고요. 이번 통화조치에 대하여 적극 협조하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자 미 대사관 측은 즉각 부인 성명을 냈다. “아무 것도 양해한 사실이 없다.”

그러던 차에 송요찬 내각 수반이 사의를 표했다. 송 수반은 증권파동 때부터 이미 정면으로 최고회의와 이견을 드러냈다. 그는 중앙정보부가 증권시장에 개입하고 금융통화위원회가 돈을 푼 것에 대하여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내각수반은 결국 바지저고리 아니냐?”고 불만을 토했다.

유 장군은 김종필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까지는 입안에 혀처럼 놀던 친구들이 오늘 모두 반기를 들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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