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1년 稅수입 넘는 100만냥 들여 조선통신사 접대

등록 2014.09.13.
부산에서 49.5km, 맑은 날 부산 태종대에 오르면 맨눈으로 일본 쓰시마가 보인다. ‘국경의 섬’으로 불리는 곳이다. 일요일인 지난달 3일을 전후해 쓰시마 시청 소재지인 이즈하라(嚴原) 항 일대 호텔과 민박집의 방이 동났다.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福岡) 공항과 쓰시마를 오가는 항공편도 일찌감치 만석이었다. 2년 만에 조선통신사 행렬이 재현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일본 각지는 물론이고 부산에서 페리 편으로 들어온 한국 관광객들로 섬 전체가 들썩였다.

쓰시마는 1980년 이즈하라 항 축제 때 처음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했다. 조선통신사 연구의 선구자인 재일교포 신기수 선생이 쓰시마 역사자료관에서 상영한 ‘에도 시대의 조선통신사’라는 영화 한 편이 계기였다. 쓰시마는 1988년 축제 이름을 ‘아리랑축제’로 바꿨다. 2002년부터는 부산 조선통신사 문화사업회를 초청해 함께 행렬을 재현했다. 옛날 정사와 부사, 종사관의 후손들도 초청됐다. 한일 교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선조들의 영광을 되살리려 한 것이다.

그랬던 조선통신사 재현 행렬이 지난해 끊겼다. 고려 후기의 보살좌상과 통일신라시대 금동여래입상 등 불상 2점이 쓰시마에서 반출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조선통신사 행렬을 보지 못한 지난해 쓰시마 섬 전체가 우울증에 빠졌다. 쓰시마의 조선통신사 행렬 진흥회장을 맡고 있는 이나다 미쓰루(稻田充) 씨는 “많이 허전했다”고 말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지만 쓰시마는 올해 다시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기로 했다.

지금도 앙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축제 이름에서 ‘아리랑’은 지워졌다. ‘한국인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내건 선술집도 보였다. 한 20대 남자는 “한국 관광객이 늘면서 일부는 혜택을 보겠지만 섬 주민 대부분은 성가시기만 하다”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환대와 불만은 200년 전에도 교차했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일본을 오간 조선통신사는 그런 상황에서 교류를 이어갔다. 통신사(通信使)에는 ‘믿음을 소통한다’라는 뜻도 담겨 있었다. 그래서인지 한일 양국은 200여 년간 선린 우호의 외교관계를 이어갔다. 당시 일본에서는 원조 ‘한류 붐’이 일었다. 한일 관계가 어느 때보다 악화되고 있는 지금 조선통신사의 의의가 다시 평가받고 있다.  

▼ “200년간 한일 평화, 信을 지키려는 노력 있어 가능” ▼

300년 전의 한류… 우정 뒤엔 팽팽한 긴장

아키에 여사는 이날 저녁 환영행사에서 “정치적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민간 간에는 우호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김치도 만들고 한국말도 배우고 친한 한국인도 많다. 양국이 우호를 빨리 되찾길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시모노세키는 아베 총리의 지역구(야마구치 4구)다.



한류의 원조를 보다

시모노세키에서 재현 행렬에 쏟아진 ‘스고이’ 세례의 원조는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다. 쇄국의 울타리에 갇혀 있던 일본 학자와 문인들은 조선통신사와의 교류를 ‘일생의 영광’으로 알았다. 사절단이 묵는 객사에는 일본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시문이나 서화를 의뢰했다.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확인하고자 필담을 나누려는 학자들도 줄을 이었다. 조선 사신이 쓴 글씨나 그림을 지니면 액운이 달아난다는 믿음이 생겨나기도 했다.

“사관(使館)에 연일 심상한 시인들의 방문이 잇달아 시를 부르고 화답하기와 필담으로 쉴 새가 없어 고통을 겪었다.”

1719년 제9회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으로 일본에 갔던 신유한이 여행기 ‘해유록(海遊錄)’에 남긴 기록이다.

통신사가 지나가는 길은 구경하러 온 인파로 산과 바다를 이뤘다. 조선 영조 때 문인 김인겸은 1764년 통신사 행렬이 에도로 입성할 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에도로 향하는 30리 길이 빈틈없이 인파로 이어져 있으니 대체로 헤아려 보면 수백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인기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오카야마(岡山) 현 우시마도(牛窓) 정에서는 통신사 행렬의 소동들이 추던 춤을 본뜬 ‘가라코 오도리’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통신사를 모티브로 한 인형도 일본 곳곳에서 만들어졌다.

조선통신사 행렬에는 의원들도 동행해 동의보감 등 당시 첨단 의학을 전수했다. 쓰시마 시가 발간한 조선통신사 자료집에는 “조선통신사의 방일로 물자뿐만 아니라 예술 학문 등의 교류도 왕성하게 이뤄져 현재 일본 문화의 주춧돌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통신사 일행이 일방적으로 주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미개하다고 여겼던 일본의 경제적 번성을 본 통신사들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1624년 부사로 일본을 방문했던 강홍중은 “시장에는 물건들이 쌓여 있고 여염집에는 쌀이 넘쳐난다. 백성의 부유함과 물자의 풍부함이 우리나라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라고 했다. 통신사가 일본에서 본 수차 등 앞선 문물은 조선후기 실학 발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교차하는 우정과 미움

통신사 파견이 거듭되면서 한일 간에는 깊은 우정이 싹텄다. 신유한과 교류했던 쓰시마 번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는 조선과의 풍부한 교류 경험을 바탕으로 펴낸 ‘고린테이세이(交隣提醒)’라는 책에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진실한 마음으로 사귀는 성신(誠信)을 바탕으로 조선과 교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도 시대 일본 근린외교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조선어를 배우기 위해 부산 초량 왜관에 3년간 유학했고 일본 최초의 조선어 학습 교재인 고린슈치(交隣須知)를 펴냈다.

쓰시마 역사민속자료관 앞뜰에는 지금도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이라고 새겨진 아메노모리 호슈 현창비가 서 있다. 이에 호응하듯 자료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고려문과 조선통신사비가 세워져 있다.

통신사가 다녀가는 사이 양국 민족감정이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대립했던 적도 적지 않았다. 교토 다이부쓰지(大佛寺) 서쪽에는 조선인 귀무덤(耳塚)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베어낸 조선인의 귀와 코를 항아리에 담아 묻은 것이다. 최소 10만 명 이상의 귀와 코가 묻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1719년 통신사가 교토를 방문했을 때 쓰시마 번주는 막부의 명령이라며 다이부쓰지 연회에 참석할 것을 요구했다. 인근에 있는 귀무덤을 상기시키며 조선 사신들을 은근히 겁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정사 홍치중은 이 절이 도요토미의 원당(願堂·명복을 빌던 법당)이어서 참석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외교 파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교토의 책임자가 꾀를 냈다. ‘일본연대기(日本年代記)’라는 가짜 책을 보여주며 이 절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중건한 절로 도요토미의 원당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홍치중은 결국 부사, 제술관과 함께 연회에 참석했지만 종사관 이명언은 끝까지 참석하지 않았다. 한일 우정의 한편에는 민족의 한(恨)과 자존심이 늘 팽팽한 긴장 속에 잠복해 있었던 것이다.

이번 시모노세키 축제의 뒷마당에도 아픈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조선통신사가 상륙한 옛 항구를 정면으로 내려다보는 언덕 위의 ‘일청강화기념관’. 1895년 4월 17일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 지배권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된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당시 고급 음식점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끌려온 강제징용자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처음 도착했던 곳도 이곳 시모노세키였다.

앞서 쓰시마에서도 역사의 아픔이 느껴졌다. 조선통신사 축제가 펼쳐지는 이즈하라 항 언덕배기에는 백제의 비구니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슈센지(修善寺)라는 절이 있었다. 한말 일제에 항거하다 쓰시마에 유배돼 숨진 최익현의 유해는 이 절에서 장례를 치른 뒤 부산으로 옮겨졌다. 지금 슈센지의 순국비는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1986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세운 것이다. 순국비 앞에는 조화와 물 한 컵이 바쳐져 있었다. 관리인은 “후손들이 매년 한 번씩은 이곳을 찾아 꽃을 바치고 간다”고 전했다.



끊어진 통신, 되풀이된 침략

1800년대 들어 가뭄과 기근으로 재정난과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자 도쿠가와 막부는 우두머리가 바뀌었는데도 조선통신사 파견 요청을 미루다 1811년 쓰시마에서 12번째 조선통신사를 맞았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57년 뒤 일본에서는 근대화 혁명이라는 메이지(明治)유신이 일어나 도쿠가와 막부는 권좌에서 쫓겨났다. 메이지 정부는 1876년 조선 침탈의 신호탄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에 통신사가 아니라 수신사(修信使) 파견을 요청한다. 조선을 새로운 국제질서에 편입시켜 일본의 한반도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전략이었다. 수신사 일행은 통신사가 이용하던 목선 대신 일본이 제공한 증기기관선을 이용했고 일본 방문 비용 일체는 과거와 달리 조선 조정이 부담했다. 조선의 우수한 문화를 전수하던 통신사와 달리 수신사는 선진 문화 수용자였다. 고종은 나름대로 1882년까지 4차례 파견된 수신사를 통해 나라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믿음의 소통이 끊어진 시점에서 양국 교류사에 불행이 찾아온 것이다.

내년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앞둔 최근에도 양국 관계는 오히려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일본의 조선통신사 연구 권위자인 교토조형예술대 나카오 히로시(仲尾宏) 교수는 “전쟁을 하지 말자는 양국 지도자의 강한 결의가 200년간의 평화를 가져왔다”며 “지금 이 시대야말로 당시 외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동철 부산대 사학과 교수는 “통신사의 시대가 평화로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이나 일본 모두 상대를 깔보거나 적으로 여기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 그런 불안정 속에서도 평화를 지속한 것은 ‘믿음의 교류’라는 이상을 유지하려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접국 간의 마찰을 노골적인 대립으로 만들지 않으려 한 외교적 노력이 중단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쓰시마·시모노세키=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부산에서 49.5km, 맑은 날 부산 태종대에 오르면 맨눈으로 일본 쓰시마가 보인다. ‘국경의 섬’으로 불리는 곳이다. 일요일인 지난달 3일을 전후해 쓰시마 시청 소재지인 이즈하라(嚴原) 항 일대 호텔과 민박집의 방이 동났다.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福岡) 공항과 쓰시마를 오가는 항공편도 일찌감치 만석이었다. 2년 만에 조선통신사 행렬이 재현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일본 각지는 물론이고 부산에서 페리 편으로 들어온 한국 관광객들로 섬 전체가 들썩였다.

쓰시마는 1980년 이즈하라 항 축제 때 처음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했다. 조선통신사 연구의 선구자인 재일교포 신기수 선생이 쓰시마 역사자료관에서 상영한 ‘에도 시대의 조선통신사’라는 영화 한 편이 계기였다. 쓰시마는 1988년 축제 이름을 ‘아리랑축제’로 바꿨다. 2002년부터는 부산 조선통신사 문화사업회를 초청해 함께 행렬을 재현했다. 옛날 정사와 부사, 종사관의 후손들도 초청됐다. 한일 교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선조들의 영광을 되살리려 한 것이다.

그랬던 조선통신사 재현 행렬이 지난해 끊겼다. 고려 후기의 보살좌상과 통일신라시대 금동여래입상 등 불상 2점이 쓰시마에서 반출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조선통신사 행렬을 보지 못한 지난해 쓰시마 섬 전체가 우울증에 빠졌다. 쓰시마의 조선통신사 행렬 진흥회장을 맡고 있는 이나다 미쓰루(稻田充) 씨는 “많이 허전했다”고 말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지만 쓰시마는 올해 다시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기로 했다.

지금도 앙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축제 이름에서 ‘아리랑’은 지워졌다. ‘한국인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내건 선술집도 보였다. 한 20대 남자는 “한국 관광객이 늘면서 일부는 혜택을 보겠지만 섬 주민 대부분은 성가시기만 하다”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환대와 불만은 200년 전에도 교차했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일본을 오간 조선통신사는 그런 상황에서 교류를 이어갔다. 통신사(通信使)에는 ‘믿음을 소통한다’라는 뜻도 담겨 있었다. 그래서인지 한일 양국은 200여 년간 선린 우호의 외교관계를 이어갔다. 당시 일본에서는 원조 ‘한류 붐’이 일었다. 한일 관계가 어느 때보다 악화되고 있는 지금 조선통신사의 의의가 다시 평가받고 있다.  

▼ “200년간 한일 평화, 信을 지키려는 노력 있어 가능” ▼

300년 전의 한류… 우정 뒤엔 팽팽한 긴장

아키에 여사는 이날 저녁 환영행사에서 “정치적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민간 간에는 우호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김치도 만들고 한국말도 배우고 친한 한국인도 많다. 양국이 우호를 빨리 되찾길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시모노세키는 아베 총리의 지역구(야마구치 4구)다.



한류의 원조를 보다

시모노세키에서 재현 행렬에 쏟아진 ‘스고이’ 세례의 원조는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다. 쇄국의 울타리에 갇혀 있던 일본 학자와 문인들은 조선통신사와의 교류를 ‘일생의 영광’으로 알았다. 사절단이 묵는 객사에는 일본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시문이나 서화를 의뢰했다.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확인하고자 필담을 나누려는 학자들도 줄을 이었다. 조선 사신이 쓴 글씨나 그림을 지니면 액운이 달아난다는 믿음이 생겨나기도 했다.

“사관(使館)에 연일 심상한 시인들의 방문이 잇달아 시를 부르고 화답하기와 필담으로 쉴 새가 없어 고통을 겪었다.”

1719년 제9회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으로 일본에 갔던 신유한이 여행기 ‘해유록(海遊錄)’에 남긴 기록이다.

통신사가 지나가는 길은 구경하러 온 인파로 산과 바다를 이뤘다. 조선 영조 때 문인 김인겸은 1764년 통신사 행렬이 에도로 입성할 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에도로 향하는 30리 길이 빈틈없이 인파로 이어져 있으니 대체로 헤아려 보면 수백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인기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오카야마(岡山) 현 우시마도(牛窓) 정에서는 통신사 행렬의 소동들이 추던 춤을 본뜬 ‘가라코 오도리’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통신사를 모티브로 한 인형도 일본 곳곳에서 만들어졌다.

조선통신사 행렬에는 의원들도 동행해 동의보감 등 당시 첨단 의학을 전수했다. 쓰시마 시가 발간한 조선통신사 자료집에는 “조선통신사의 방일로 물자뿐만 아니라 예술 학문 등의 교류도 왕성하게 이뤄져 현재 일본 문화의 주춧돌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통신사 일행이 일방적으로 주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미개하다고 여겼던 일본의 경제적 번성을 본 통신사들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1624년 부사로 일본을 방문했던 강홍중은 “시장에는 물건들이 쌓여 있고 여염집에는 쌀이 넘쳐난다. 백성의 부유함과 물자의 풍부함이 우리나라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라고 했다. 통신사가 일본에서 본 수차 등 앞선 문물은 조선후기 실학 발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교차하는 우정과 미움

통신사 파견이 거듭되면서 한일 간에는 깊은 우정이 싹텄다. 신유한과 교류했던 쓰시마 번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는 조선과의 풍부한 교류 경험을 바탕으로 펴낸 ‘고린테이세이(交隣提醒)’라는 책에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진실한 마음으로 사귀는 성신(誠信)을 바탕으로 조선과 교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도 시대 일본 근린외교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조선어를 배우기 위해 부산 초량 왜관에 3년간 유학했고 일본 최초의 조선어 학습 교재인 고린슈치(交隣須知)를 펴냈다.

쓰시마 역사민속자료관 앞뜰에는 지금도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이라고 새겨진 아메노모리 호슈 현창비가 서 있다. 이에 호응하듯 자료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고려문과 조선통신사비가 세워져 있다.

통신사가 다녀가는 사이 양국 민족감정이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대립했던 적도 적지 않았다. 교토 다이부쓰지(大佛寺) 서쪽에는 조선인 귀무덤(耳塚)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베어낸 조선인의 귀와 코를 항아리에 담아 묻은 것이다. 최소 10만 명 이상의 귀와 코가 묻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1719년 통신사가 교토를 방문했을 때 쓰시마 번주는 막부의 명령이라며 다이부쓰지 연회에 참석할 것을 요구했다. 인근에 있는 귀무덤을 상기시키며 조선 사신들을 은근히 겁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정사 홍치중은 이 절이 도요토미의 원당(願堂·명복을 빌던 법당)이어서 참석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외교 파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교토의 책임자가 꾀를 냈다. ‘일본연대기(日本年代記)’라는 가짜 책을 보여주며 이 절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중건한 절로 도요토미의 원당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홍치중은 결국 부사, 제술관과 함께 연회에 참석했지만 종사관 이명언은 끝까지 참석하지 않았다. 한일 우정의 한편에는 민족의 한(恨)과 자존심이 늘 팽팽한 긴장 속에 잠복해 있었던 것이다.

이번 시모노세키 축제의 뒷마당에도 아픈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조선통신사가 상륙한 옛 항구를 정면으로 내려다보는 언덕 위의 ‘일청강화기념관’. 1895년 4월 17일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 지배권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된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당시 고급 음식점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끌려온 강제징용자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처음 도착했던 곳도 이곳 시모노세키였다.

앞서 쓰시마에서도 역사의 아픔이 느껴졌다. 조선통신사 축제가 펼쳐지는 이즈하라 항 언덕배기에는 백제의 비구니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슈센지(修善寺)라는 절이 있었다. 한말 일제에 항거하다 쓰시마에 유배돼 숨진 최익현의 유해는 이 절에서 장례를 치른 뒤 부산으로 옮겨졌다. 지금 슈센지의 순국비는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1986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세운 것이다. 순국비 앞에는 조화와 물 한 컵이 바쳐져 있었다. 관리인은 “후손들이 매년 한 번씩은 이곳을 찾아 꽃을 바치고 간다”고 전했다.



끊어진 통신, 되풀이된 침략

1800년대 들어 가뭄과 기근으로 재정난과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자 도쿠가와 막부는 우두머리가 바뀌었는데도 조선통신사 파견 요청을 미루다 1811년 쓰시마에서 12번째 조선통신사를 맞았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57년 뒤 일본에서는 근대화 혁명이라는 메이지(明治)유신이 일어나 도쿠가와 막부는 권좌에서 쫓겨났다. 메이지 정부는 1876년 조선 침탈의 신호탄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에 통신사가 아니라 수신사(修信使) 파견을 요청한다. 조선을 새로운 국제질서에 편입시켜 일본의 한반도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전략이었다. 수신사 일행은 통신사가 이용하던 목선 대신 일본이 제공한 증기기관선을 이용했고 일본 방문 비용 일체는 과거와 달리 조선 조정이 부담했다. 조선의 우수한 문화를 전수하던 통신사와 달리 수신사는 선진 문화 수용자였다. 고종은 나름대로 1882년까지 4차례 파견된 수신사를 통해 나라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믿음의 소통이 끊어진 시점에서 양국 교류사에 불행이 찾아온 것이다.

내년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앞둔 최근에도 양국 관계는 오히려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일본의 조선통신사 연구 권위자인 교토조형예술대 나카오 히로시(仲尾宏) 교수는 “전쟁을 하지 말자는 양국 지도자의 강한 결의가 200년간의 평화를 가져왔다”며 “지금 이 시대야말로 당시 외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동철 부산대 사학과 교수는 “통신사의 시대가 평화로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이나 일본 모두 상대를 깔보거나 적으로 여기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 그런 불안정 속에서도 평화를 지속한 것은 ‘믿음의 교류’라는 이상을 유지하려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접국 간의 마찰을 노골적인 대립으로 만들지 않으려 한 외교적 노력이 중단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쓰시마·시모노세키=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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