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아들’ 이종범 “V10 향해 달린다”

등록 2006.11.11.
지긋지긋한 ‘아홉수’에 시달리고 있는 KIA 타이거즈. 1997년 9번째 우승을 차지한 후 9년 동안 우승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있다.

최고의 팀이었던 타이거즈는 마지막 우승 후 중위권으로 밀려나기 시작했고, 이젠 우승이 아닌 플레이오프 진출에도 환호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렇지만 2007시즌은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우승을 차지한 뒤 맞는 10번째 시즌인데다 팀의 영건들이 올스타급 플레이어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한국 프로야구가 낳은 ‘불세출의 스타’ 이종범이 있다. 한국 프로 스포츠에 단 3명밖에 없는 천재(허재, 박주영, 이종범)중 한 명. 그가 젊은 선수들을 이끌고 다시 한 번 포효할 것이다.

누구보다 우승을 갈망하고 있는 남자, ‘V10’을 마지막 목표로 뛰고 있는 이종범을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만났다.

※천당과 지옥을 오갔던 2006시즌

힘든 시즌을 보낸 탓인지 피곤한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특유의 카리스마는 여전했다. 그의 말과 행동에는 힘이 담겨 있었고, 머지 않아 인터뷰를 리드하기 시작했다.



“시즌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피곤하지만 아픈 곳이 없어 다행이다. 우승을 차지하고 싶었는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해 아쉽다. 그래도 젊은 선수들이 열심히 해줬고 꼴찌에서 벗어나 4강에 오른 의미 있는 시즌이었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가장 먼저 털어 놨다.

하지만 개인 성적에 대해서는 불만을 토로했다.

“WBC 대회 출전으로 평소보다 한 달 가량 페이스를 끌어 올린 게 부진으로 이어진 것 같다. 시즌 초반 잃은 타격감을 회복하기 쉽지 않았다. 수비와 주루는 문제가 없었지만 타격감이 살아나지 않아 2군에도 내려갔고 실망스러운 성적을 남겼다. 모든 결과는 내 책임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WBC 대회에서 소중한 추억을 남길 수 있었고 2군 경기를 치르면서 많은 것을 배운 뜻 깊은 한 해였다”

KIA가 오랫동안 9회 우승에 머물고 있는 원인을 묻자 지체없이 선수들의 희생정신과 적극성 결여라고 답했다. “과거 타이거즈는 선수들이 팀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지만 요즘 젊은 선수들은 그런 점이 부족하다. 또 선배들이 시키지 않더라도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 땀을 흘리고 선배들이나 코칭스태프에게 조언을 구해야 하는데 그런 점들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왼손잡이 유격수의 탄생

잠시 예전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그는 왼손잡이다. 야구만 오른손으로 할 뿐, 다른 모든 일상생활을 왼손으로 한다. 왜 야구를 왼손으로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어릴 때 부모님이 왼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야구를 오른손으로 하게 됐다. 알았더라면 스위치히터라도 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이종범은 야구를 시작한 후 줄곧 유격수와 내야수로 활약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국가대표에서 최고의 유격수였던 그가 프로에서 최고의 유격수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이종범이 일본에서 외야수로 전향했다. 그에게는 시련이나 다름 없었다. 현재 중견수로 활약하고 있는 그는 아직도 유격수 포지션에 그리움을 갖고 있었다.

“지금도 유격수를 맡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팀에서 유격수를 맡게 해준다면 해낼 자신이 있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이어 유격수의 매력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아기자기한 플레이, 경기 내내 집중할 수 있다는 것, 2루수와 함께 하는 키스톤 플레이, 팬들을 매료시킬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그리고 뛰어난 유격수가 되기 위해서는 “수비 능력이 뛰어나야 하며 강한 어깨와 야구센스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메이저리그나 일본처럼 공수주를 겸비한 슈퍼스타 유격수가 부족한 이유에 대해서는 “공, 수, 주를 모두 갖춘 유격수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수비는 노력으로 발전시킬 수 있지만, 공격과 주루 능력은 선천적인 영향이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아마추어 시절에도 ‘야구천재’

광주일고 시절 청룡기 대회 MVP를 수상한 이종범은 명문대 진학을 포기하고 건국대에 입학했다. 이유는 2가지였다. 대학 진학이 힘들었던 동료들의 진학을 도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당시 건국대에는 대학 중 드물게 야구전용구장을 갖고 있어 마음껏 운동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대학에 들어서도 천재성을 발휘한 이종범은 1학년 때부터 팀의 주전 유격수는 물론, 국가대표 주전 유격수까지 차지했다. 비교적 약체였던 건국대는 이종범을 앞세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이종범은 추계리그 MVP를 수상하는 등 대학 최고의 선수로 이름을 떨쳤다.

“즐거웠던 시간이다. 팀 성적도 괜찮았고 홈런왕, 타격왕, 도루왕, MVP도 차지했다. 대표팀에서도 좋은 성적을 남겼으며 오랫동안 꿈꿨던 태극마크를 달고 조국을 위해 뛸 수 있어 행복했다”

당시 이종범이 속했던 대표팀은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강의 멤버로 손색 없다. 이종범과 친한 한화 이글스의 마무리 투수 구대성도 “당시 대표팀이 최강의 멤버였고, WBC 대회 선수들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이종범은 “마찬가지 생각이다. 지금은 대성이와 나만 현역으로 뛰고 있지만 WBC 멤버들 만큼 좋은 선수들로 구성됐다. 박정태, 김동수, 박동희, 조규제, 김기태, 이호성 등 정말 좋은 선수들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일본에서의 아픔과 잃어버린 누적기록

한국에서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었던 이종범은 1997시즌 우승 후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했다. ‘바람의 아들, 용의 군단을 깨워라’는 특명을 받은 그는 일본인들에게 새로운 야구스타일을 선보이며 빠르게 팀의 간판스타로 부상했다.

틀에 박힌 ‘정형화된 야구’, ‘섬세한 스타일의 야구’에 길들어져 있던 일본인들에게 이종범의 ‘화려한 야구’는 충격이었고, 머지 않아 각 팀들의 집중 견제가 시작됐다.

빈볼에 몸이 성할 날이 없었던 이종범은 한신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오른쪽 팔꿈치에 볼을 맞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고, 이 부상은 이종범의 야구인생에 큰 상처를 남겼다. 팔꿈치를 맞은 후 자신 있던 몸쪽 공을 때려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팔꿈치를 맞은 뒤 스윙 궤적이 달라지면서 몸쪽 공에 약해졌다. 오른쪽 팔꿈치가 빨리 배꼽에 붙어야 하는데 그런 역할을 못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노력으로 내가 극복해야 하는 부분이다”

많은 야구팬들은 지금도 호시노 전 주니치 감독을 원망하고 있다. 하지만 이종범은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는 “나는 용병 선수였기 때문에 일본 선수들보다 좋은 기량을 보여줘야 했다. 물론 당시에는 선수 기용 문제에 대해 약간의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감독은 기량이 좋은 선수를 경기에 투입해야 하고, 팔꿈치 부상으로 기량이 떨어진 나를 벤치에 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점에 대한 후회나 미련은 없다. 나중에 내가 지도자가 됐을 때 선수들의 마음을 읽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당시 호시노의 선수 기용에 대해 말했다.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최고 선수답게 이종범은 쉽게 깨지기 힘든 많은 기록을 가지고 있다. 2위 그룹과 큰 격차를 가지고 있는 기록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최단경기 1000안타, 한 시즌 최다도루(84개), 한 경기 최다도루(6개), 29연속 도루성공, 선두타자 홈런, 30홈런-60도루 클럽 가입, 한 시즌 최다안타(196), 100경기 이상 출전 최고타율(0.394) 등등.

그에게 가장 ƒ팁仄힘들 것 같은 기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국내 프로야구도 게임수가 늘어나면 최다안타나 선두타자 홈런 등 타격과 관련된 기록은 어렵지 않게 깨질 것이다. 그리고 잘 하는 선수들이 많이 나와서 빨리 갈아치워주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그래도 깨기 힘든 기록이라면 도루와 관련된 기록이 아닐까 싶다. 요즘 선수들은 힘든 걸 하지 않으려 하는데다 인조잔디 구장도 많아 도루를 쉽게 하기 어렵다”며 도루를 힘든 기록으로 꼽았다.

많은 도루를 성공시킬 수 있는 비결에 대해서는 “발만 빠르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스타트, 슬라이딩 능력을 갖춰야 하며 무엇보다 개인의 노력과 연구가 가장 필요하다. 뛰어난 코치가 설명을 해줘도 쉽게 안 되는 것이 도루다. 투수의 견제 동작과 변화구 타이밍을 읽는 능력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한 탓에 이종범은 누적기록에서 큰 손해를 보고 있다. 전성기였던 1998, 1999, 2000, 2001시즌을 한국에서 보냈다면 그는 지금쯤 2000개의 안타에 근접했을 것이며 700개에 가까운 도루와 20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이종범은 “프로야구 선수에게 3년 반은 적지 않은 기간이다. 만일 계속 한국에서 뛰었다면 준혁이형 이상 가는 기록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생활을 통해 얻은 것도 많기 때문에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누적기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모두가 인정하는 ‘탁월한 리더쉽’

이종범에게는 항상 ‘주장’, ‘리더’, ‘캡틴’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선수들 뿐만 아니라 팬, 코칭 스태프까지 인정하는 최고의 리더다. 믿음의 야구를 펼치는 김인식 감독이 부산 아시안게임과 WBC 대회에서 이종범을 연속으로 주장으로 임명한 것만 보더라도 그의 탁월한 리더쉽을 확인할 수 있다. 한 KBO 관계자는 “다음 WBC 대회 때에는 선발이 안 된다면 코치 자격으로라도 대표팀에 합류 시켜야 한다”고 말하기도.



이종범은 주장이라는 역할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항상 최선을 다하고 팀을 먼저 희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장이라는 역할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후배들에게는 질책과 격려를, 선배들에게는 존경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그의 리더쉽이었다.

스타 선수들로 구성됐던 WBC 대회에서는 “스타급 선수들이 많았지만 팀을 리드하는데 특별한 어려움이 없었다. 돌출행동을 자제하고, 태극마크를 달고 있다는 것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고 언급했다.

이종범은 소속팀 주장 뿐만 아니라 선수협회장도 맡고 있다. 인터뷰에서 이종범은 선수협의 어려움을 털어 놓았다. “프로야구 발전을 위해 양측이 함께 고민하고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하는데 처음부터 평행선을 긋고 있고, 좀처럼 그 간격을 좁히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이어 그는 “프로야구 인기부활은 모든 야구인이 적극적인 노력을 펼쳐야만 해결 가능한 문제”라며 “선수들은 몸을 아까지 않는 허슬플레이와 수준 높은 기량을, 구단에서는 팬들이 즐거워 할 수 있는 마케팅을, 지방자치단체와 정부에서는 돔구장과 같은 시설부분에 투자를 해야만 다시 프로야구의 인기가 살아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마지막 목표는 V10, “은퇴 후에는 지도자의 길 걷겠다”

어느덧 그의 나이도 30대 후반에 접어 들었다. 이젠 은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 이종범에게 언제까지 선수생활을 할 계획인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나이를 정해놓지는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상 없이 선수생활을 마무리 하는 것이며 1년, 1년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이다. 은퇴하기 전 다시 한 번 코리언시리즈에 진출해 꼭 V10을 달성하고 싶다”였다.

이종범은 은퇴 후 지도자가 되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하며 얻은 노하우와 기술을 후배 선수들에게 전수하고, 선수들이 즐거운 분위기에서 야구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 천재의 또다른 목표였다.

이종범에게 후루타 야쿠르트 스왈로스 감독처럼 감독 겸 선수 혹은 코치 겸 선수로 뛰면 좋을 것 같다고 권했다. 이에 이종범은 “일본은 야구 역사가 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도 야구 역사가 더 길어진다면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가끔씩 그런 모습을 떠올리곤 하는데 기회가 닿는다면 한 번쯤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종범의 후계자, 제 2의 이종범은 누구?

공격, 수비, 주루, 야구센스, 파워, 강한 어깨, 탁월한 리더쉽, 뛰어난 클러치 능력 등 야구 선수에게 필요한 모든 걸 갖춘 이종범은 모든 야구 선수들이 닮고 싶은 모델이다.

그래서 공, 수, 주를 겸비한 선수가 나타나면 언론과 팬들은 그에게 ‘제 2의 이종범’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준다. 김종국, 이병규, 이현곤, 정성훈, 박경수 등 많은 선수들이 제 2의 이종범으로 각광 받았지만 그를 닮은 선수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직접 이종범에게 자신의 후계자로 어울리는 선수가 누구냐고 물었다.

“내 스스로 현역 선수들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재능이 뛰어나고 크게 성공할 수 있는 선수들이 많은 건 사실이다. 중요한 점은 선수들 스스로 더 큰 선수가 되기 위해 많은 땀을 흘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 코칭 스태프의 지도와 조언도 선수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 공, 수, 주가 모두 뛰어난 선수와 단기전에 팬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선수가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팀 후배 이용규와 두산 베어스의 이종욱이 그래도 1번 타자 중에서 가장 잘 하는 것 같다”며 두 선수를 칭찬했다. 하지만 이종범과 비슷한 스타일인 화순고의 김선빈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선수”라고 짧게 말했다.

어쩌면 이종범의 진짜 후계자는 아들 정후가 될지 모른다. 정후는 내년부터 야구를 시작할 계획. 이종범은 “내가 어렸을 ‹š와 똑같다. 운동신경도 좋고 본인이 야구를 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일단 시켜볼 생각이다”며 또 다른 야구천재의 탄생을 예고했다.



※‘V10’을 향해 달리는 ‘바람의 아들’

고교최우수선수상, 대학최우수선수상, 프로야구 MVP, 한국시리즈 MVP, 올스타전 MVP, 주니치 드래곤스의 센트럴리그 우승,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 WBC 4강 신화 등 이종범은 이미 많은 것을 이뤘다.

그가 가는 곳에는 항상 우승과 개인타이틀이 뒤따랐고, 그를 뜨겁게 응원하는 수 많은 팬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의 이름에는 ‘야구천재’와 ‘바람의 아들’이라는 수식어가 함께 했다.

수 많은 업적을 이뤘지만 이종범에게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하나 남아 있다. 바로 소속팀 타이거즈의 통산 10번째 우승. 이미 많은 우승을 차지했지만 누구보다 우승에 목말라 있다.

그는 “올해 못했던 것을 내년에는 반드시 만회해 팬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다. 또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구단과 팬들이 바라고 있는 ‘V10’을 달성한 뒤 멋지게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고 싶다. 내년에도 많은 응원 부탁한다. 그리고 동아닷컴의 10주년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1997시즌 우승 후 10번째 맞는 2007시즌, ‘V10’을 달성하고 포효하는 바람의 아들을 볼 수 있길 기대해본다.

광주 = 임동훈 스포츠동아 기자 arod7@donga.com

촬영 = 신세기 동아닷컴 기자 shk919@donga.com

지긋지긋한 ‘아홉수’에 시달리고 있는 KIA 타이거즈. 1997년 9번째 우승을 차지한 후 9년 동안 우승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있다.

최고의 팀이었던 타이거즈는 마지막 우승 후 중위권으로 밀려나기 시작했고, 이젠 우승이 아닌 플레이오프 진출에도 환호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렇지만 2007시즌은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우승을 차지한 뒤 맞는 10번째 시즌인데다 팀의 영건들이 올스타급 플레이어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한국 프로야구가 낳은 ‘불세출의 스타’ 이종범이 있다. 한국 프로 스포츠에 단 3명밖에 없는 천재(허재, 박주영, 이종범)중 한 명. 그가 젊은 선수들을 이끌고 다시 한 번 포효할 것이다.

누구보다 우승을 갈망하고 있는 남자, ‘V10’을 마지막 목표로 뛰고 있는 이종범을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만났다.

※천당과 지옥을 오갔던 2006시즌

힘든 시즌을 보낸 탓인지 피곤한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특유의 카리스마는 여전했다. 그의 말과 행동에는 힘이 담겨 있었고, 머지 않아 인터뷰를 리드하기 시작했다.



“시즌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피곤하지만 아픈 곳이 없어 다행이다. 우승을 차지하고 싶었는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해 아쉽다. 그래도 젊은 선수들이 열심히 해줬고 꼴찌에서 벗어나 4강에 오른 의미 있는 시즌이었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가장 먼저 털어 놨다.

하지만 개인 성적에 대해서는 불만을 토로했다.

“WBC 대회 출전으로 평소보다 한 달 가량 페이스를 끌어 올린 게 부진으로 이어진 것 같다. 시즌 초반 잃은 타격감을 회복하기 쉽지 않았다. 수비와 주루는 문제가 없었지만 타격감이 살아나지 않아 2군에도 내려갔고 실망스러운 성적을 남겼다. 모든 결과는 내 책임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WBC 대회에서 소중한 추억을 남길 수 있었고 2군 경기를 치르면서 많은 것을 배운 뜻 깊은 한 해였다”

KIA가 오랫동안 9회 우승에 머물고 있는 원인을 묻자 지체없이 선수들의 희생정신과 적극성 결여라고 답했다. “과거 타이거즈는 선수들이 팀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지만 요즘 젊은 선수들은 그런 점이 부족하다. 또 선배들이 시키지 않더라도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 땀을 흘리고 선배들이나 코칭스태프에게 조언을 구해야 하는데 그런 점들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왼손잡이 유격수의 탄생

잠시 예전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그는 왼손잡이다. 야구만 오른손으로 할 뿐, 다른 모든 일상생활을 왼손으로 한다. 왜 야구를 왼손으로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어릴 때 부모님이 왼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야구를 오른손으로 하게 됐다. 알았더라면 스위치히터라도 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이종범은 야구를 시작한 후 줄곧 유격수와 내야수로 활약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국가대표에서 최고의 유격수였던 그가 프로에서 최고의 유격수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이종범이 일본에서 외야수로 전향했다. 그에게는 시련이나 다름 없었다. 현재 중견수로 활약하고 있는 그는 아직도 유격수 포지션에 그리움을 갖고 있었다.

“지금도 유격수를 맡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팀에서 유격수를 맡게 해준다면 해낼 자신이 있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이어 유격수의 매력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아기자기한 플레이, 경기 내내 집중할 수 있다는 것, 2루수와 함께 하는 키스톤 플레이, 팬들을 매료시킬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그리고 뛰어난 유격수가 되기 위해서는 “수비 능력이 뛰어나야 하며 강한 어깨와 야구센스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메이저리그나 일본처럼 공수주를 겸비한 슈퍼스타 유격수가 부족한 이유에 대해서는 “공, 수, 주를 모두 갖춘 유격수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수비는 노력으로 발전시킬 수 있지만, 공격과 주루 능력은 선천적인 영향이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아마추어 시절에도 ‘야구천재’

광주일고 시절 청룡기 대회 MVP를 수상한 이종범은 명문대 진학을 포기하고 건국대에 입학했다. 이유는 2가지였다. 대학 진학이 힘들었던 동료들의 진학을 도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당시 건국대에는 대학 중 드물게 야구전용구장을 갖고 있어 마음껏 운동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대학에 들어서도 천재성을 발휘한 이종범은 1학년 때부터 팀의 주전 유격수는 물론, 국가대표 주전 유격수까지 차지했다. 비교적 약체였던 건국대는 이종범을 앞세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이종범은 추계리그 MVP를 수상하는 등 대학 최고의 선수로 이름을 떨쳤다.

“즐거웠던 시간이다. 팀 성적도 괜찮았고 홈런왕, 타격왕, 도루왕, MVP도 차지했다. 대표팀에서도 좋은 성적을 남겼으며 오랫동안 꿈꿨던 태극마크를 달고 조국을 위해 뛸 수 있어 행복했다”

당시 이종범이 속했던 대표팀은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강의 멤버로 손색 없다. 이종범과 친한 한화 이글스의 마무리 투수 구대성도 “당시 대표팀이 최강의 멤버였고, WBC 대회 선수들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이종범은 “마찬가지 생각이다. 지금은 대성이와 나만 현역으로 뛰고 있지만 WBC 멤버들 만큼 좋은 선수들로 구성됐다. 박정태, 김동수, 박동희, 조규제, 김기태, 이호성 등 정말 좋은 선수들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일본에서의 아픔과 잃어버린 누적기록

한국에서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었던 이종범은 1997시즌 우승 후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했다. ‘바람의 아들, 용의 군단을 깨워라’는 특명을 받은 그는 일본인들에게 새로운 야구스타일을 선보이며 빠르게 팀의 간판스타로 부상했다.

틀에 박힌 ‘정형화된 야구’, ‘섬세한 스타일의 야구’에 길들어져 있던 일본인들에게 이종범의 ‘화려한 야구’는 충격이었고, 머지 않아 각 팀들의 집중 견제가 시작됐다.

빈볼에 몸이 성할 날이 없었던 이종범은 한신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오른쪽 팔꿈치에 볼을 맞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고, 이 부상은 이종범의 야구인생에 큰 상처를 남겼다. 팔꿈치를 맞은 후 자신 있던 몸쪽 공을 때려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팔꿈치를 맞은 뒤 스윙 궤적이 달라지면서 몸쪽 공에 약해졌다. 오른쪽 팔꿈치가 빨리 배꼽에 붙어야 하는데 그런 역할을 못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노력으로 내가 극복해야 하는 부분이다”

많은 야구팬들은 지금도 호시노 전 주니치 감독을 원망하고 있다. 하지만 이종범은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는 “나는 용병 선수였기 때문에 일본 선수들보다 좋은 기량을 보여줘야 했다. 물론 당시에는 선수 기용 문제에 대해 약간의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감독은 기량이 좋은 선수를 경기에 투입해야 하고, 팔꿈치 부상으로 기량이 떨어진 나를 벤치에 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점에 대한 후회나 미련은 없다. 나중에 내가 지도자가 됐을 때 선수들의 마음을 읽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당시 호시노의 선수 기용에 대해 말했다.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최고 선수답게 이종범은 쉽게 깨지기 힘든 많은 기록을 가지고 있다. 2위 그룹과 큰 격차를 가지고 있는 기록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최단경기 1000안타, 한 시즌 최다도루(84개), 한 경기 최다도루(6개), 29연속 도루성공, 선두타자 홈런, 30홈런-60도루 클럽 가입, 한 시즌 최다안타(196), 100경기 이상 출전 최고타율(0.394) 등등.

그에게 가장 ƒ팁仄힘들 것 같은 기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국내 프로야구도 게임수가 늘어나면 최다안타나 선두타자 홈런 등 타격과 관련된 기록은 어렵지 않게 깨질 것이다. 그리고 잘 하는 선수들이 많이 나와서 빨리 갈아치워주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그래도 깨기 힘든 기록이라면 도루와 관련된 기록이 아닐까 싶다. 요즘 선수들은 힘든 걸 하지 않으려 하는데다 인조잔디 구장도 많아 도루를 쉽게 하기 어렵다”며 도루를 힘든 기록으로 꼽았다.

많은 도루를 성공시킬 수 있는 비결에 대해서는 “발만 빠르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스타트, 슬라이딩 능력을 갖춰야 하며 무엇보다 개인의 노력과 연구가 가장 필요하다. 뛰어난 코치가 설명을 해줘도 쉽게 안 되는 것이 도루다. 투수의 견제 동작과 변화구 타이밍을 읽는 능력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한 탓에 이종범은 누적기록에서 큰 손해를 보고 있다. 전성기였던 1998, 1999, 2000, 2001시즌을 한국에서 보냈다면 그는 지금쯤 2000개의 안타에 근접했을 것이며 700개에 가까운 도루와 20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이종범은 “프로야구 선수에게 3년 반은 적지 않은 기간이다. 만일 계속 한국에서 뛰었다면 준혁이형 이상 가는 기록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생활을 통해 얻은 것도 많기 때문에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누적기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모두가 인정하는 ‘탁월한 리더쉽’

이종범에게는 항상 ‘주장’, ‘리더’, ‘캡틴’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선수들 뿐만 아니라 팬, 코칭 스태프까지 인정하는 최고의 리더다. 믿음의 야구를 펼치는 김인식 감독이 부산 아시안게임과 WBC 대회에서 이종범을 연속으로 주장으로 임명한 것만 보더라도 그의 탁월한 리더쉽을 확인할 수 있다. 한 KBO 관계자는 “다음 WBC 대회 때에는 선발이 안 된다면 코치 자격으로라도 대표팀에 합류 시켜야 한다”고 말하기도.



이종범은 주장이라는 역할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항상 최선을 다하고 팀을 먼저 희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장이라는 역할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후배들에게는 질책과 격려를, 선배들에게는 존경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그의 리더쉽이었다.

스타 선수들로 구성됐던 WBC 대회에서는 “스타급 선수들이 많았지만 팀을 리드하는데 특별한 어려움이 없었다. 돌출행동을 자제하고, 태극마크를 달고 있다는 것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고 언급했다.

이종범은 소속팀 주장 뿐만 아니라 선수협회장도 맡고 있다. 인터뷰에서 이종범은 선수협의 어려움을 털어 놓았다. “프로야구 발전을 위해 양측이 함께 고민하고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하는데 처음부터 평행선을 긋고 있고, 좀처럼 그 간격을 좁히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이어 그는 “프로야구 인기부활은 모든 야구인이 적극적인 노력을 펼쳐야만 해결 가능한 문제”라며 “선수들은 몸을 아까지 않는 허슬플레이와 수준 높은 기량을, 구단에서는 팬들이 즐거워 할 수 있는 마케팅을, 지방자치단체와 정부에서는 돔구장과 같은 시설부분에 투자를 해야만 다시 프로야구의 인기가 살아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마지막 목표는 V10, “은퇴 후에는 지도자의 길 걷겠다”

어느덧 그의 나이도 30대 후반에 접어 들었다. 이젠 은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 이종범에게 언제까지 선수생활을 할 계획인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나이를 정해놓지는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상 없이 선수생활을 마무리 하는 것이며 1년, 1년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이다. 은퇴하기 전 다시 한 번 코리언시리즈에 진출해 꼭 V10을 달성하고 싶다”였다.

이종범은 은퇴 후 지도자가 되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하며 얻은 노하우와 기술을 후배 선수들에게 전수하고, 선수들이 즐거운 분위기에서 야구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 천재의 또다른 목표였다.

이종범에게 후루타 야쿠르트 스왈로스 감독처럼 감독 겸 선수 혹은 코치 겸 선수로 뛰면 좋을 것 같다고 권했다. 이에 이종범은 “일본은 야구 역사가 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도 야구 역사가 더 길어진다면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가끔씩 그런 모습을 떠올리곤 하는데 기회가 닿는다면 한 번쯤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종범의 후계자, 제 2의 이종범은 누구?

공격, 수비, 주루, 야구센스, 파워, 강한 어깨, 탁월한 리더쉽, 뛰어난 클러치 능력 등 야구 선수에게 필요한 모든 걸 갖춘 이종범은 모든 야구 선수들이 닮고 싶은 모델이다.

그래서 공, 수, 주를 겸비한 선수가 나타나면 언론과 팬들은 그에게 ‘제 2의 이종범’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준다. 김종국, 이병규, 이현곤, 정성훈, 박경수 등 많은 선수들이 제 2의 이종범으로 각광 받았지만 그를 닮은 선수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직접 이종범에게 자신의 후계자로 어울리는 선수가 누구냐고 물었다.

“내 스스로 현역 선수들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재능이 뛰어나고 크게 성공할 수 있는 선수들이 많은 건 사실이다. 중요한 점은 선수들 스스로 더 큰 선수가 되기 위해 많은 땀을 흘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 코칭 스태프의 지도와 조언도 선수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 공, 수, 주가 모두 뛰어난 선수와 단기전에 팬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선수가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팀 후배 이용규와 두산 베어스의 이종욱이 그래도 1번 타자 중에서 가장 잘 하는 것 같다”며 두 선수를 칭찬했다. 하지만 이종범과 비슷한 스타일인 화순고의 김선빈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선수”라고 짧게 말했다.

어쩌면 이종범의 진짜 후계자는 아들 정후가 될지 모른다. 정후는 내년부터 야구를 시작할 계획. 이종범은 “내가 어렸을 ‹š와 똑같다. 운동신경도 좋고 본인이 야구를 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일단 시켜볼 생각이다”며 또 다른 야구천재의 탄생을 예고했다.



※‘V10’을 향해 달리는 ‘바람의 아들’

고교최우수선수상, 대학최우수선수상, 프로야구 MVP, 한국시리즈 MVP, 올스타전 MVP, 주니치 드래곤스의 센트럴리그 우승,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 WBC 4강 신화 등 이종범은 이미 많은 것을 이뤘다.

그가 가는 곳에는 항상 우승과 개인타이틀이 뒤따랐고, 그를 뜨겁게 응원하는 수 많은 팬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의 이름에는 ‘야구천재’와 ‘바람의 아들’이라는 수식어가 함께 했다.

수 많은 업적을 이뤘지만 이종범에게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하나 남아 있다. 바로 소속팀 타이거즈의 통산 10번째 우승. 이미 많은 우승을 차지했지만 누구보다 우승에 목말라 있다.

그는 “올해 못했던 것을 내년에는 반드시 만회해 팬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다. 또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구단과 팬들이 바라고 있는 ‘V10’을 달성한 뒤 멋지게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고 싶다. 내년에도 많은 응원 부탁한다. 그리고 동아닷컴의 10주년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1997시즌 우승 후 10번째 맞는 2007시즌, ‘V10’을 달성하고 포효하는 바람의 아들을 볼 수 있길 기대해본다.

광주 = 임동훈 스포츠동아 기자 arod7@donga.com

촬영 = 신세기 동아닷컴 기자 shk9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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