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의 경쟁력] 한경희 대표의 ‘다독(多讀)’

등록 2008.12.28.
최근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발표한 `주목할 만한 여성 기업인 50인` 중에는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한경희생활과학의 한경희 대표이사(44) 이름이 들어 있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스팀청소기로 유명한 그녀가 작은 중소기업에서 출발해 가전제품 부문에서 삼성, LG와 겨루게 되기까지 과정을 소개하며 "물려받은 유산 없이 성공한 기업을 일궈낸 이례적 사례"라고 평가했다.

한 대표의 삶의 궤적 역시 이례적이다.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모자란 1%를 채우기 위한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1986년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한 뒤 첫 직장은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사무국이었다.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1990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MBA를 마친 뒤 미국 호텔과 부동산개발회사에서 일했다. 그러다 오랜 이방인 생활을 청산하고 싶어 1997년 귀국, 교육부 교육행정사무관 고시에 합격해 공무원이 되었다. 2년간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이번엔 `스팀 청소기`라는 아이디어만을 가지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현재 ㈜한경희생활과학은 연간 1000억 원대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했으며 지난해에는 미국 펜실베니아주 지사를 설립, 미국 시장 개척에 나섰다. `스팀 청소기`는 미국 홈쇼핑 채널 QVC에서 7분 만에 매진되는 기록을 세우며 올해 1000만 달러 수출을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

세계에 통하는 한국 대표 여성 기업인이 된 한대표의 경쟁력은 무엇일까? 그녀가 "세상에 관한 모든 정답은 책 안에 있더라"고 감탄했듯 정답은 바로 `다독(多讀)`이었다.

● 칭찬 받고 싶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니, 우리 경희가 이렇게 어려운 책을 보다니 대단하구나."

한 대표는 초등학생 때 책장에서 우연히 꺼내든 펄벅의 `대지`를 읽다가 크게 칭찬을 받은 일을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3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녀는 특출 날 것 없는 평범한 아이였다. 부모도 공부 잘 하는 두 오빠들에게만 기대가 클 뿐 그녀는 관심 밖이었다. 늘 소외감을 느끼던 차에 뜻밖의 칭찬을 받았고 너무 기뻤던 나머지 그 후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 졸업 직후 첫 직장으로 스위스 제네바의 IOC에 가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책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등 고 전혜린 씨의 에세이를 읽고 외국생활을 동경해오던 차에 88올림픽 이전 서울에서 열린 IOC 회의에서 통역 자원봉사를 하게 됐고 취업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녀의 다독 습관은 유명하다. 평소 읽는 신문ㆍ경영 잡지만 10여종이고 지금껏 모아둔 신문 기사만 해도 스크랩북으로 50권이 넘는다. 지난해에는 한국신문협회의 `신문읽기 캠페인` 모델로 서기도 했다.

문학서부터 실용서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읽은 책들은 모아 두었다 매달 수십 권씩 회사 도서관에 기증한다.

"고객의 삶의 질을 높이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입니다. 신문을 읽으면 시장의 변화가 보이고 책을 읽으면 소비자의 욕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책 속 주인공이 겪던 고난들이 내 앞에 펼쳐졌다"

그녀가 직장일과 가사를 병행하며 가장 힘에 부쳤던 일은 바로 걸레질이었다. 제법 가사 분담을 하던 남편도 "걸레질만은 인체공학 상 남자가 할 수 없다"며 절대 도와주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과 싸우는 대신 걸레질을 쉽게 하는 방법을 고민했고 `스팀 청소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대걸레질 하듯 서서 청소하면 편할 텐데`, `뜨거운 스팀을 이용하면 깨끗할 텐데` 라는 주부의 욕구가 그대로 반영된 제품이 바로 스팀청소기다다.

과감히 사표를 제출하고 스팀 청소기 제작에 나섰다. 그러나 아이디어가 실현되어 소비자들이 만질 수 있는 제품으로 탄생하는 과정은 되돌아보고 싶지 않을 만큼 고달팠다.

"사업에 있어서 아이디어는 20%, 과정이 80%였어요. 누구나 `내가 생각했던 제품이잖아`라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누구나 제품을 만드는 과정을 해낼 수 있는 건 아니죠."

지금도 그렇지만 가전제품의 연구, 기술, 생산, 유통 전 과정은 남성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1999년부터 스팀 청소기에 필요한 부품을 생산 의뢰하러 공장들을 찾아다니면 `여자가 무슨…` 이라며 문전박대도 많이 당했다. 엔지니어들과 미팅 중에 기술 부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이 들통 나면 제대로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그 때 한 대표는 다시 책을 꺼내들었다. `기초 전기전자` `전기전자공학` 등 개론서부터 독학을 시작했다. 책에 줄을 치며 달달 외우고, 귀동냥을 하면서 기본 지식을 쌓았다.

●철학책이 `삶의 정답`을 제시

사업을 하며 여자로서 넘은 장벽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여성 기업인으로서 장단점을 묻는 질문에 그녀는 "온통 단점만 생각난다"고 대답할 정도다.

2002년 ㈜한경희생활과학을 법인으로 등록하고 정부에서 지원하는 중소기업 사업 자금을 신청했을 때 일이다. 자금 지원 적정성 여부를 심사하러 나온 심사관이 사무실을 들어서며 한 첫 마디는 "당신 남편이 ○○사업을 하다 망했는데 당신이 바지 사장을 하고 있는 거 아니냐"였다. 심지어 "조사하면 나오니 먼저 실토하라"고 윽박지르기까지 했다.

그녀는 "지금도 설움이 솟아오른다"며 "동년배 남자보다 사회경력도 많고 5급 사무관까지 한 내게 그럴 정도면 다른 여성들에게는 오죽하겠냐"며 답답해했다.

책 속 주인공들이 겪던 온갖 고난들이 그녀 눈앞에 실제로 펼쳐졌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길바닥에 나앉을 때까지 도전하겠다는 `긍정의 힘` 역시 책을 읽으며 다져진 것이다.

고등학생 때 그녀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에 푹 빠져 있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권력에의 의지` 등 니체 저작은 모두 읽었다. 성공한 기업가를 만든 책이 실용적인 경제서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철학서라니….

"단 한 번뿐인 삶에 대한 경외, 건강한 생명력에 대한 예찬 등 실존주의 사상이 머리 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몸에 배어버린 것 같아요. 한계에 부닥쳐도 다시 도전한다는 제 삶을 지배하는 가치가 니체를 읽으며 형성되었어요."

2001년 스팀청소기 3000대가 처음 생산되었다. 그런데 시판을 며칠 앞두고 품질 테스트 도중 문제가 생겼다. 스팀을 발생시키는 열융착 부위가 2~3년이면 벌어질 가능성이 발견된 것이었다. 빚더미에 올라 앉아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제품 전량을 폐기하는 쪽을 선택했다. 당장 3000대를 파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길게 보면 품질로 승부해야만 하는데 제품에 하자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출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다시 기술 개발에 들어갔다.

2003년 드디어 스팀 청소기가 출시되었다. 그러나 "만들기만 하면 대박일 것"이라는 그녀의 예상은 빗나갔다. 제품 개발도 험난했지만 제품 판로를 개척하는 것은 더 힘들었다. 여성 속옷 바이어까지 전부 남성인 유통업계에서 스팀 청소기는 통하지 않았다.

"진공 청소기가 있는데 스팀 청소기를 왜 사느냐며 걸레 청소의 필요성 자체를 이해하지 못 했죠. 여성이라면 설명 없이도 이해할 부분인데 설득이 되지 않았죠."

결국 대형마트에 납품하는 한 유통업체 여성 사장님, 홈쇼핑 여성 바이어가 처음 판로를 열어주었다. 그리고 말 그대로 `대박`이 났다.

그녀는 "직원들의 월급을 밀리지 않고 줄 수 있게 돼서 가장 뿌듯했다"고 회상했다. 스팀 청소기가 성공하자 2005년에는 한달에 2대 꼴로 중국산, 국산 스팀청소기가 쏟아져 나왔지만 `한경희 스팀청소기`는 여전히 시장점유율 70%에 이른다.

● 아이들과의 추억 만화책으로 만들어

최근 미국 출장이 잦아지면서 일정이 더욱 빡빡해졌다. 올해 11살, 10살인 연년생 아들 둘과 보내는 시간은 더욱 줄어들었다. 집에 일찍 귀가하는 날에는 반드시 침대 맡에서 책을 읽어준다.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항상 그리워하고,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연인 같아요."

그래도 엄마의 부재는 티가 난다. 아이들 사진이나 비디오를 많이 찍어주지 못해 기록이 별로 없는 것이다. 그녀는 다시 아이디어를 냈다. 아이들과의 일화를 정리해 `가족 만화책`을 만들었다. 첫 선물로 꼬마병정인형을 받은 첫째 아이의 이야기, 엄마가 집에 빨리 오게 동생이 생기라고 주문을 외는 둘째 이야기 등 소중한 추억들이 차곡차곡 담겨 있다. 사랑 표현도 책으로 하는 그녀다.

"나중에 아이들이 엄마가 얼마나 최선을 다해 살았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이 책을 통해 자연스레 알게 되길 바래요."

현실에서 살아 볼 수 없는 다른 삶을 책을 통해 살아본 것이 사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한 대표. 특히 펄 벅, 헤르만 헤세의 책은 모조리 다 읽었고 톨스토이의 `부활`, 사르트르의 `구토`,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내 인생의 책`으로 꼽았다.

책을 통해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잘난 사람이 되어 보고 못난 사람이 되어 보고, 남자가 되어 보고 여자도 되어보고, 부자도 되어보고 가난한 삶도 되어보고… 그런 간접 경험들이 사업에 상상력을 불어 넣어 준다고 믿는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타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사업가로 성공할 수 있어요. 저는 책에서 그걸 얻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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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의 경쟁력]한경희 대표의 ‘다독(多讀)’

우경임기자 woohaha@donga.com

영상 = 이철 동아닷컴 기자 kino27@donga.com

최근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발표한 `주목할 만한 여성 기업인 50인` 중에는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한경희생활과학의 한경희 대표이사(44) 이름이 들어 있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스팀청소기로 유명한 그녀가 작은 중소기업에서 출발해 가전제품 부문에서 삼성, LG와 겨루게 되기까지 과정을 소개하며 "물려받은 유산 없이 성공한 기업을 일궈낸 이례적 사례"라고 평가했다.

한 대표의 삶의 궤적 역시 이례적이다.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모자란 1%를 채우기 위한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1986년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한 뒤 첫 직장은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사무국이었다.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1990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MBA를 마친 뒤 미국 호텔과 부동산개발회사에서 일했다. 그러다 오랜 이방인 생활을 청산하고 싶어 1997년 귀국, 교육부 교육행정사무관 고시에 합격해 공무원이 되었다. 2년간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이번엔 `스팀 청소기`라는 아이디어만을 가지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현재 ㈜한경희생활과학은 연간 1000억 원대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했으며 지난해에는 미국 펜실베니아주 지사를 설립, 미국 시장 개척에 나섰다. `스팀 청소기`는 미국 홈쇼핑 채널 QVC에서 7분 만에 매진되는 기록을 세우며 올해 1000만 달러 수출을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

세계에 통하는 한국 대표 여성 기업인이 된 한대표의 경쟁력은 무엇일까? 그녀가 "세상에 관한 모든 정답은 책 안에 있더라"고 감탄했듯 정답은 바로 `다독(多讀)`이었다.

● 칭찬 받고 싶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니, 우리 경희가 이렇게 어려운 책을 보다니 대단하구나."

한 대표는 초등학생 때 책장에서 우연히 꺼내든 펄벅의 `대지`를 읽다가 크게 칭찬을 받은 일을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3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녀는 특출 날 것 없는 평범한 아이였다. 부모도 공부 잘 하는 두 오빠들에게만 기대가 클 뿐 그녀는 관심 밖이었다. 늘 소외감을 느끼던 차에 뜻밖의 칭찬을 받았고 너무 기뻤던 나머지 그 후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 졸업 직후 첫 직장으로 스위스 제네바의 IOC에 가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책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등 고 전혜린 씨의 에세이를 읽고 외국생활을 동경해오던 차에 88올림픽 이전 서울에서 열린 IOC 회의에서 통역 자원봉사를 하게 됐고 취업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녀의 다독 습관은 유명하다. 평소 읽는 신문ㆍ경영 잡지만 10여종이고 지금껏 모아둔 신문 기사만 해도 스크랩북으로 50권이 넘는다. 지난해에는 한국신문협회의 `신문읽기 캠페인` 모델로 서기도 했다.

문학서부터 실용서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읽은 책들은 모아 두었다 매달 수십 권씩 회사 도서관에 기증한다.

"고객의 삶의 질을 높이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입니다. 신문을 읽으면 시장의 변화가 보이고 책을 읽으면 소비자의 욕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책 속 주인공이 겪던 고난들이 내 앞에 펼쳐졌다"

그녀가 직장일과 가사를 병행하며 가장 힘에 부쳤던 일은 바로 걸레질이었다. 제법 가사 분담을 하던 남편도 "걸레질만은 인체공학 상 남자가 할 수 없다"며 절대 도와주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과 싸우는 대신 걸레질을 쉽게 하는 방법을 고민했고 `스팀 청소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대걸레질 하듯 서서 청소하면 편할 텐데`, `뜨거운 스팀을 이용하면 깨끗할 텐데` 라는 주부의 욕구가 그대로 반영된 제품이 바로 스팀청소기다다.

과감히 사표를 제출하고 스팀 청소기 제작에 나섰다. 그러나 아이디어가 실현되어 소비자들이 만질 수 있는 제품으로 탄생하는 과정은 되돌아보고 싶지 않을 만큼 고달팠다.

"사업에 있어서 아이디어는 20%, 과정이 80%였어요. 누구나 `내가 생각했던 제품이잖아`라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누구나 제품을 만드는 과정을 해낼 수 있는 건 아니죠."

지금도 그렇지만 가전제품의 연구, 기술, 생산, 유통 전 과정은 남성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1999년부터 스팀 청소기에 필요한 부품을 생산 의뢰하러 공장들을 찾아다니면 `여자가 무슨…` 이라며 문전박대도 많이 당했다. 엔지니어들과 미팅 중에 기술 부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이 들통 나면 제대로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그 때 한 대표는 다시 책을 꺼내들었다. `기초 전기전자` `전기전자공학` 등 개론서부터 독학을 시작했다. 책에 줄을 치며 달달 외우고, 귀동냥을 하면서 기본 지식을 쌓았다.

●철학책이 `삶의 정답`을 제시

사업을 하며 여자로서 넘은 장벽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여성 기업인으로서 장단점을 묻는 질문에 그녀는 "온통 단점만 생각난다"고 대답할 정도다.

2002년 ㈜한경희생활과학을 법인으로 등록하고 정부에서 지원하는 중소기업 사업 자금을 신청했을 때 일이다. 자금 지원 적정성 여부를 심사하러 나온 심사관이 사무실을 들어서며 한 첫 마디는 "당신 남편이 ○○사업을 하다 망했는데 당신이 바지 사장을 하고 있는 거 아니냐"였다. 심지어 "조사하면 나오니 먼저 실토하라"고 윽박지르기까지 했다.

그녀는 "지금도 설움이 솟아오른다"며 "동년배 남자보다 사회경력도 많고 5급 사무관까지 한 내게 그럴 정도면 다른 여성들에게는 오죽하겠냐"며 답답해했다.

책 속 주인공들이 겪던 온갖 고난들이 그녀 눈앞에 실제로 펼쳐졌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길바닥에 나앉을 때까지 도전하겠다는 `긍정의 힘` 역시 책을 읽으며 다져진 것이다.

고등학생 때 그녀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에 푹 빠져 있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권력에의 의지` 등 니체 저작은 모두 읽었다. 성공한 기업가를 만든 책이 실용적인 경제서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철학서라니….

"단 한 번뿐인 삶에 대한 경외, 건강한 생명력에 대한 예찬 등 실존주의 사상이 머리 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몸에 배어버린 것 같아요. 한계에 부닥쳐도 다시 도전한다는 제 삶을 지배하는 가치가 니체를 읽으며 형성되었어요."

2001년 스팀청소기 3000대가 처음 생산되었다. 그런데 시판을 며칠 앞두고 품질 테스트 도중 문제가 생겼다. 스팀을 발생시키는 열융착 부위가 2~3년이면 벌어질 가능성이 발견된 것이었다. 빚더미에 올라 앉아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제품 전량을 폐기하는 쪽을 선택했다. 당장 3000대를 파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길게 보면 품질로 승부해야만 하는데 제품에 하자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출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다시 기술 개발에 들어갔다.

2003년 드디어 스팀 청소기가 출시되었다. 그러나 "만들기만 하면 대박일 것"이라는 그녀의 예상은 빗나갔다. 제품 개발도 험난했지만 제품 판로를 개척하는 것은 더 힘들었다. 여성 속옷 바이어까지 전부 남성인 유통업계에서 스팀 청소기는 통하지 않았다.

"진공 청소기가 있는데 스팀 청소기를 왜 사느냐며 걸레 청소의 필요성 자체를 이해하지 못 했죠. 여성이라면 설명 없이도 이해할 부분인데 설득이 되지 않았죠."

결국 대형마트에 납품하는 한 유통업체 여성 사장님, 홈쇼핑 여성 바이어가 처음 판로를 열어주었다. 그리고 말 그대로 `대박`이 났다.

그녀는 "직원들의 월급을 밀리지 않고 줄 수 있게 돼서 가장 뿌듯했다"고 회상했다. 스팀 청소기가 성공하자 2005년에는 한달에 2대 꼴로 중국산, 국산 스팀청소기가 쏟아져 나왔지만 `한경희 스팀청소기`는 여전히 시장점유율 70%에 이른다.

● 아이들과의 추억 만화책으로 만들어

최근 미국 출장이 잦아지면서 일정이 더욱 빡빡해졌다. 올해 11살, 10살인 연년생 아들 둘과 보내는 시간은 더욱 줄어들었다. 집에 일찍 귀가하는 날에는 반드시 침대 맡에서 책을 읽어준다.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항상 그리워하고,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연인 같아요."

그래도 엄마의 부재는 티가 난다. 아이들 사진이나 비디오를 많이 찍어주지 못해 기록이 별로 없는 것이다. 그녀는 다시 아이디어를 냈다. 아이들과의 일화를 정리해 `가족 만화책`을 만들었다. 첫 선물로 꼬마병정인형을 받은 첫째 아이의 이야기, 엄마가 집에 빨리 오게 동생이 생기라고 주문을 외는 둘째 이야기 등 소중한 추억들이 차곡차곡 담겨 있다. 사랑 표현도 책으로 하는 그녀다.

"나중에 아이들이 엄마가 얼마나 최선을 다해 살았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이 책을 통해 자연스레 알게 되길 바래요."

현실에서 살아 볼 수 없는 다른 삶을 책을 통해 살아본 것이 사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한 대표. 특히 펄 벅, 헤르만 헤세의 책은 모조리 다 읽었고 톨스토이의 `부활`, 사르트르의 `구토`,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내 인생의 책`으로 꼽았다.

책을 통해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잘난 사람이 되어 보고 못난 사람이 되어 보고, 남자가 되어 보고 여자도 되어보고, 부자도 되어보고 가난한 삶도 되어보고… 그런 간접 경험들이 사업에 상상력을 불어 넣어 준다고 믿는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타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사업가로 성공할 수 있어요. 저는 책에서 그걸 얻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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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경임기자 woohaha@donga.com

영상 = 이철 동아닷컴 기자 kino2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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