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복서-2> 빈민가에서 독기 키운 짱구, 세계를 정복하다

등록 2012.04.03.


1960년대 부산의 한 빈민가. 6.25 피난민들이 무허가 판자집을 짓고 살던 그곳은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밀림 같은 곳’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터전을 잃을까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동네에서는 싸움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어린 짱구’는 ‘빼앗기지 않으려면 싸워야하고 지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12세가 되던 해에 복싱 체육관의 문을 두드렸다.

‘짱구’ 장정구(49, 전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가 어린 나이에 복싱을 시작한 사연이다. 한창 뛰놀던 나이였던 장정구에게 복싱체육관은 놀이터였다.

“복싱이 재미있었어요. 선배들도 많이 가르쳐주시고. 어리니까 귀여움 받으면서 운동했죠. ”
14세때부터 대회 석권한 복싱 천재
장정구의 재능은 남달랐다. 남들이 6개월 걸려 익히는 동작들을 장정구는 2개월 만에 배웠다. 복싱을 시작한지 2년 후부터는 출전하는 대회마다 준우승과 우승을 휩쓸었다. 장정구가 두각을 나타내자 다른 체육관들이 견제하기 시작했다. 학생선수권을 앞두고는 장정구가 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점을 끄집어내 “짱구는 학생이 아닌데 왜 학생부에 출전하느냐”며 반발했다. 전국체전 출전선수 선발전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타 체육관과 기존 대표선수의 텃세로 출전이 무산됐다. 아마추어무대에서 설 곳이 없다고 생각한 장정구는 80년 프로로 전향했다.

프로무대에서는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다. 챔피언의 산실인 신인왕전에서 6전 전승으로 우승, 우수선수로 선정됐고, 이후로도 12연승을 거두며 챔피언 타이틀에 빠르게 다가갔다. 프로 전향 후 1년 10개월 만에 타이틀에 도전하게 된 장정구는 시합을 한 달 앞두고 발 부상을 당해제 실력을 펼쳐 보이지 못한 채 첫 패배를 당했다.

“꿈을 꾼 것만 같았죠. 너무 억울해서 내려오는 길에 다시 한번 하자고 했어요. 그리고 6개월 후에 다시 도전해서 이겼습니다. 그 전까지는 주먹구구식으로 운동했는데 비디오를 보면서 상대를 연구했습니다. 상대의 장단점을 분석하는 습관이 이때 생겼는데 이게 15차 방어전까지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습니다. 첫 패배가 약이 됐던 거죠”
준비 완벽하면 상대 누구든 자신있어
83년 3월 챔피언이 된 장정구는 88년 10월 타이틀을 자진 반납할 때까지 15차 방어에 성공했다. 그 당시로서는 전무했던 대기록이었다. (후에 유명우가 18차 방어에 성공하면서 기록을 경신한다.) 그러나 대기록의 이면에는 ‘안방 챔피언’이라는 오명도 따랐다. 15번의 방어전 중 원정 경기는 단 1차례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정구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인정받았다. 장정구가 돌려세운 도전자 중 7명이 다른 단체, 다른 체급에서 챔피언이 됐을 정도로 그는 강한 챔피언이었다.

“기록보면 시합 연기한 게 많을 겁니다. 준비상태가 완벽하지 않으면 시합을 안 했어요. 상대가 무서운 게 아니라 준비하는 과정이 무서운 겁니다. 준비과정만 완벽하면 상대가 누구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복싱은 내 모든 것전처와의 문제, 신경쇠약 등을 이유로 은퇴를 선언한 장정구는 다시 복귀했지만 2승 3패의 초라한 성적을 거두고 쓸쓸히 링을 떠났다. 이후 여러 사업에 손을 대봤지만 번번히 쓴물을 마셨다. 사회에서는 계속된 실패를 맛봤지만 복싱계는 여전히 그를 전설로 기억하고 있다. 장정구는 2000년 ‘20세기를 위대한 복서 25인’에 선정된데 이어 2009년에는 ‘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장정구도 자신이 돌아갈 곳이 복싱임을 알고 있다. 그는 모든 사업을 접고 다시 복싱체육관을 차려 후진을 양성할 계획이다.

“복싱이 아니었다면 저같은 사람이 어떻게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겠습니까. 복싱은 저의 모든 것입니다”

동아닷컴 동영상뉴스팀 I 백완종 기자 100pd@donga.com



1960년대 부산의 한 빈민가. 6.25 피난민들이 무허가 판자집을 짓고 살던 그곳은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밀림 같은 곳’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터전을 잃을까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동네에서는 싸움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어린 짱구’는 ‘빼앗기지 않으려면 싸워야하고 지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12세가 되던 해에 복싱 체육관의 문을 두드렸다.

‘짱구’ 장정구(49, 전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가 어린 나이에 복싱을 시작한 사연이다. 한창 뛰놀던 나이였던 장정구에게 복싱체육관은 놀이터였다.

“복싱이 재미있었어요. 선배들도 많이 가르쳐주시고. 어리니까 귀여움 받으면서 운동했죠. ”
14세때부터 대회 석권한 복싱 천재
장정구의 재능은 남달랐다. 남들이 6개월 걸려 익히는 동작들을 장정구는 2개월 만에 배웠다. 복싱을 시작한지 2년 후부터는 출전하는 대회마다 준우승과 우승을 휩쓸었다. 장정구가 두각을 나타내자 다른 체육관들이 견제하기 시작했다. 학생선수권을 앞두고는 장정구가 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점을 끄집어내 “짱구는 학생이 아닌데 왜 학생부에 출전하느냐”며 반발했다. 전국체전 출전선수 선발전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타 체육관과 기존 대표선수의 텃세로 출전이 무산됐다. 아마추어무대에서 설 곳이 없다고 생각한 장정구는 80년 프로로 전향했다.

프로무대에서는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다. 챔피언의 산실인 신인왕전에서 6전 전승으로 우승, 우수선수로 선정됐고, 이후로도 12연승을 거두며 챔피언 타이틀에 빠르게 다가갔다. 프로 전향 후 1년 10개월 만에 타이틀에 도전하게 된 장정구는 시합을 한 달 앞두고 발 부상을 당해제 실력을 펼쳐 보이지 못한 채 첫 패배를 당했다.

“꿈을 꾼 것만 같았죠. 너무 억울해서 내려오는 길에 다시 한번 하자고 했어요. 그리고 6개월 후에 다시 도전해서 이겼습니다. 그 전까지는 주먹구구식으로 운동했는데 비디오를 보면서 상대를 연구했습니다. 상대의 장단점을 분석하는 습관이 이때 생겼는데 이게 15차 방어전까지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습니다. 첫 패배가 약이 됐던 거죠”
준비 완벽하면 상대 누구든 자신있어
83년 3월 챔피언이 된 장정구는 88년 10월 타이틀을 자진 반납할 때까지 15차 방어에 성공했다. 그 당시로서는 전무했던 대기록이었다. (후에 유명우가 18차 방어에 성공하면서 기록을 경신한다.) 그러나 대기록의 이면에는 ‘안방 챔피언’이라는 오명도 따랐다. 15번의 방어전 중 원정 경기는 단 1차례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정구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인정받았다. 장정구가 돌려세운 도전자 중 7명이 다른 단체, 다른 체급에서 챔피언이 됐을 정도로 그는 강한 챔피언이었다.

“기록보면 시합 연기한 게 많을 겁니다. 준비상태가 완벽하지 않으면 시합을 안 했어요. 상대가 무서운 게 아니라 준비하는 과정이 무서운 겁니다. 준비과정만 완벽하면 상대가 누구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복싱은 내 모든 것전처와의 문제, 신경쇠약 등을 이유로 은퇴를 선언한 장정구는 다시 복귀했지만 2승 3패의 초라한 성적을 거두고 쓸쓸히 링을 떠났다. 이후 여러 사업에 손을 대봤지만 번번히 쓴물을 마셨다. 사회에서는 계속된 실패를 맛봤지만 복싱계는 여전히 그를 전설로 기억하고 있다. 장정구는 2000년 ‘20세기를 위대한 복서 25인’에 선정된데 이어 2009년에는 ‘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장정구도 자신이 돌아갈 곳이 복싱임을 알고 있다. 그는 모든 사업을 접고 다시 복싱체육관을 차려 후진을 양성할 계획이다.

“복싱이 아니었다면 저같은 사람이 어떻게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겠습니까. 복싱은 저의 모든 것입니다”

동아닷컴 동영상뉴스팀 I 백완종 기자 100p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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