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대선때 구로구청 농성중 추락 양원태 씨…“병상서 웃고 또 웃었다”

등록 2013.05.25.
내가 좌절하면 너무 초라해질까봐… 병상서 웃고 또 웃었다

부모님은 울고 계셨다.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실려 온 지 일주일 만에 눈을 떴다. 부러진 척추를 철골로 고정시키는 수술을 받고서는 잠만 잤다고 했다. 누워 있는 것 자체는 자기 몸이지만 자기 몸이 아닌 듯했다. 하반신 마비.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최루탄 연기 자욱한 서울 구로구청 5층 강당, 눈물 콧물 뒤범벅된 얼굴로 창가에서 가쁜 숨을 몰아쉴 때 머리 위로 쏟아지던 전경들의 쇠파이프 세례. 그리고 이어진 추락. 기억나는 건 그게 전부였다. 노동현장으로의 ‘하방(下放)’을 계획하던 서울대 경영학과 3학년 양원태(48·현 한국장애인인권포럼 대표)의 인생은 거기서 일단 멈췄다. 고려대 구로병원 610호실. 창밖에서 때늦은 캐럴이 들렸던가. 부모님은 우시지만 그는 울 수 없었다. 1987년은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독일 잡지 속 광주

기독교계였던 학교에서 추수감사절 행사가 있다고 한 날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등교를 하는데 문방구에서 틀어놓은 라디오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弑害) 소식을 알렸다. 왠지 눈물이 났다. 나라의 장래까지 걱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를 잃은 듯했다. 서울 신일중학교 3학년생 양원태는 울면서 학교까지 갔다.

평소 학교가 파하면 마루에 가방 던져놓고 산이나 냇가에서 놀기 바빴다. 어쩌다 공부를 좀 열심히 해서 성적이 올라 부모님에게 칭찬을 들으면 즐거웠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10월 유신은 ‘훌륭한 결단’이라 믿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거의 아버지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세상 물정 모르고 철없이 살았던 거였어요.”

중학생 양원태의 ‘철모르던’, 그러나 마음 깊숙이 새겨졌던 그런 정서는 얼마 가지 않아 자취를 감췄다.

1980년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그의 집은 서울 북부 변두리였던 도봉구(현 강북구) 번동의 군사시설보호구역에 있었다. 외진 그의 집에서 속칭 도바리꾼(수배나 체포를 피해 도망 다니던 운동권 학생이나 인사)들이 가끔씩 몸을 피했다. 10년 연상인 큰누나의 친구이거나 지인이었다. 진보적이지도 보수적이지도 않았던 아버지는 이들을 순순히 받아주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들은 알려지지 않은 ‘5월 광주’에 대한 소문을 말했고 시국과 군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너희 뜻은 아는데 그러다 다치지 않겠느냐”는 취지로 말씀을 하곤 했다. 6, 7년 뒤에 그가 아버지로부터 비슷한 말을 다시 듣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아버지와 이들의 대화에 귀동냥을 하며 몇 마디 거들기도 하면서 사춘기 소년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어 갔다. 그리고 이들 중 누군가가 가져왔던 독일 잡지가 있었다. 피, 피, 피. 도로에 쓰러진, 트럭에 널브러진 사람들. 대검을 꽂은 총을 메고 긴 곤봉을 휘두르는 군인들….

“기존에 가졌던 생각들이 정말 너무 쉽게 깨지더라고요. 산산이 부서진 거죠. 그때부터 조금은 고민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선량하게, 학생에 대한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으로 봤을 때 바람직하게 살려고 하는 모습이 유치해 보였다고 해야 할까, 철딱서니 없어 보였다고 할까.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방식에 대해 머릿속에서 조금씩 분열이 생겨났다. 막연히 예전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교에서 정해준 틀에 맞춰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괜히 삐딱선을 타고 싶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산 것은 아니었고, 그러다 대학에 들어갔다.



전태일 평전

양원태는 1년 재수 끝에 1984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돈을 번다는 생각보다는 외국을 다니면서 무역에 종사하는 오퍼상이 그럴듯해 보였다. 막상 들어가서는 전공 공부보다는 고등학교 때 조금 품었던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회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농촌법학회’라는 비공식 서클에서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한 사람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공부를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대학생의 필독서로 불렸던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책들부터 시작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선배의 권유로 거리 시위에도 한 번 나가봤다.

“민주주의, 정치의 가치와 역사, 이런 것들을 조금 수준 높은 교양의 차원에서 고민했다고 할까요. 대학생으로서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약간의 지적 허영도 있었겠지요.”

그런 그 앞에 ‘전태일 평전’이 다가왔다. 서울 평화시장 봉제직공들의 열악한 삶을 개선하기 위해 온몸을 불살라 호소했던 전태일의 삶을 되짚어봤다. 자신의 삶이 자신의 문제의식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맞닿아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진 것도 없으니까 기득권이라 할 것도 없지만, 나에게 뭔가 버릴 것들이 생길 수 있고 아니면 적어도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고민이 시작됐던 것 같아요.”

세상을 바꾼다는 거창한 욕심보다는,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공존을 위해 살아가는 태도나 방향, 선택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전태일이라는 사람을 통해 배웠다. 그때 그는 당시 말하던 ‘현장’에 가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노동운동을 한다기보다도 노동자라는 사람들의 삶에 내 몸을 싣고 내 삶을 한번 도모해 보자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그렇게 5년, 10년 하고 나면 내가 바꾸려고 하는 세상의 모습이든지, 아니면 그 세상을 위한 동력이 보일 것 같았어요.” 그런 마음으로 학교를 정리하려 했다.

어렸을 때 이후로 아버지에게 뺨을 맞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1986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 이제 학교를 그만 다니겠다고 말씀드린 뒤끝이었다. 아버지는 두 가지를 말했다.

“네가 세상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러느냐.” 그리고 “이렇게 부모 가슴에 못을 박을 수 있느냐.” 틀린 말씀이 아니었다. 며칠 뒤 그는 책 몇 권과 옷가지 몇 벌을 싸들고 집을 나왔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노동자의 삶에서 비켜나게 했다.



장애인 속으로

1987년 12월 17일 밤 서울 구로구청 로비에 부모님이 찾아왔다. 전날부터 이틀째 구청에서 농성 중인 아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양원태는 그해 대선에서 국민운동본부 공정선거감시단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투표일이던 16일 구로구청에서는 부재자투표함 부정 의혹이 제기됐고 감시단과 대학생 수백 명이 구청을 점거한 채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부모님은 제사를 지내러 가시는 길에 잠깐 들렀던 참이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어젯밤 꿈자리가 너무 안 좋다. 우리랑 같이 나가자.” 그는 “뭐, 별일 있겠어요. 하룻밤 더 자고 나갈게요”라고 호기롭게 말하고는 부모님을 배웅했다. 그로부터 12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을 18일 오전 8시 40분경 경찰은 농성 진압작전을 개시했고, 그는 몇 시간 뒤 구청 마당에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부모님한테 못할 짓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머님은 ‘네 멱살이라도 잡아끌고 나왔어야 했는데…’ 하셨죠. 그때 저를 데리고 나오지 못한 게 (한이) 맺혀 계신 것 같더라고요.”

병상에서 그는 울지 않았다. 그를 찾아오는 친구나 재야인사들이 오면 웃었다. 즐거워서도 아니었고, 그분들한테 의연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도 아니었던 것 같다. 웃고는 있었지만 듣기 편하지만은 않았던 말은 “너는 이런 일을 당하고 전과 다름없이 밝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칭찬일까, 욕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정말 의연한 것일까.

“그냥 내 삶의 소소한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작든 소박하든 그 선택이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꺾어졌긴 했지만. 그런 차원에서 스스로에게 웃어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 사고로 스스로 좌절하면 내 선택이 너무 초라해진다는 생각도 있지 않았을까요.”

학교를 정리하는 대신 복학을 결정했다. 주로 정치경제학을 대학원 사람들과 공부했다. 장애를 가졌는데 현장에서 일할 수는 없고 결국 머리를 굴리는 학술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학교에 다닐 때는 “기득권을 버리는 결단”이라는 말을 많이 했지만 장애인이 되고 나니 정말 버릴 것조차 없었다. 버릴 것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무기도 없었다. 그래서 공부를 했고 변호사 자격증도 좋은 무기가 될 것 같아 사법시험 공부도 했다. 하지만 머리가 따라주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노동하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자고 생각했어요. 부족한 나지만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지요. 조금 교만했던 것 같네요.”

양원태는 1992년 장애인인권사업단을 시작으로 여러 곳의 장애인단체에서 일을 했다. 2003년에는 어린이 서적 전문 출판사인 ‘올벼’의 대표를 지내기도 했고 2006년 지금의 장애인인권포럼에서 일하게 됐다. 올봄 서울시 명예부시장으로 위촉됐다.



귀를 뚫고, 머리를 볶고

장애인 속으로 들어왔지만 그는 자신을 ‘가짜 장애인’이라고 부른다. 그가 1988년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그를 상담했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계속 연락하자. 도전해보고 싶은 케이스”라고 말했다.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게 된 사람이 당연히 보여야 할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별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더 불안하고 위험하다는 소견이었다.

그는 자신이 장애를 갖게 된 사실을 알고도 울지 않았고, 분노하거나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바로 ‘껍질’이라고 했다. 그 껍질을 깨고 자신의 장애를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채 20년 넘게 살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의문도 든다. 그래서 때로는 장애를 가진 뒤 처음 1, 2년은 술만 마시면 세상을 원망하며 울부짖고 난리를 치는 사람이 부럽기도 하다.

요즘 들어 자꾸 자신이 고갈된다는 느낌 때문에 답답하다. 새로운 것으로 자신을 채워야 할 텐데 기존의 것을 가지고 재탕 삼탕하는 느낌 때문에 더 그렇다. 그래서 3년 전 3·1절에는 귀를 뚫어 귀고리를 했고, 올해 첫 출근을 하는 날에는 태어나서 처음 파마를 했다.

여전히 그의 바람은 “노동자가 됐든, 장애인이 됐든 이들이 스스로를 위해 뭔가를 만들고, 변화 발전해 나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같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럼 양원태 개인의 욕망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장애를 갖기 전에도 장애를 갖게 된 후에도 자신보다는 주위를 향한 삶, 욕망을 유예시킨 삶을 살았던 그가 한참 후에 말했다. “제가 원하는 게 뭘까요. 너무 어렵네요.”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내가 좌절하면 너무 초라해질까봐… 병상서 웃고 또 웃었다

부모님은 울고 계셨다.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실려 온 지 일주일 만에 눈을 떴다. 부러진 척추를 철골로 고정시키는 수술을 받고서는 잠만 잤다고 했다. 누워 있는 것 자체는 자기 몸이지만 자기 몸이 아닌 듯했다. 하반신 마비.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최루탄 연기 자욱한 서울 구로구청 5층 강당, 눈물 콧물 뒤범벅된 얼굴로 창가에서 가쁜 숨을 몰아쉴 때 머리 위로 쏟아지던 전경들의 쇠파이프 세례. 그리고 이어진 추락. 기억나는 건 그게 전부였다. 노동현장으로의 ‘하방(下放)’을 계획하던 서울대 경영학과 3학년 양원태(48·현 한국장애인인권포럼 대표)의 인생은 거기서 일단 멈췄다. 고려대 구로병원 610호실. 창밖에서 때늦은 캐럴이 들렸던가. 부모님은 우시지만 그는 울 수 없었다. 1987년은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독일 잡지 속 광주

기독교계였던 학교에서 추수감사절 행사가 있다고 한 날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등교를 하는데 문방구에서 틀어놓은 라디오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弑害) 소식을 알렸다. 왠지 눈물이 났다. 나라의 장래까지 걱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를 잃은 듯했다. 서울 신일중학교 3학년생 양원태는 울면서 학교까지 갔다.

평소 학교가 파하면 마루에 가방 던져놓고 산이나 냇가에서 놀기 바빴다. 어쩌다 공부를 좀 열심히 해서 성적이 올라 부모님에게 칭찬을 들으면 즐거웠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10월 유신은 ‘훌륭한 결단’이라 믿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거의 아버지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세상 물정 모르고 철없이 살았던 거였어요.”

중학생 양원태의 ‘철모르던’, 그러나 마음 깊숙이 새겨졌던 그런 정서는 얼마 가지 않아 자취를 감췄다.

1980년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그의 집은 서울 북부 변두리였던 도봉구(현 강북구) 번동의 군사시설보호구역에 있었다. 외진 그의 집에서 속칭 도바리꾼(수배나 체포를 피해 도망 다니던 운동권 학생이나 인사)들이 가끔씩 몸을 피했다. 10년 연상인 큰누나의 친구이거나 지인이었다. 진보적이지도 보수적이지도 않았던 아버지는 이들을 순순히 받아주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들은 알려지지 않은 ‘5월 광주’에 대한 소문을 말했고 시국과 군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너희 뜻은 아는데 그러다 다치지 않겠느냐”는 취지로 말씀을 하곤 했다. 6, 7년 뒤에 그가 아버지로부터 비슷한 말을 다시 듣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아버지와 이들의 대화에 귀동냥을 하며 몇 마디 거들기도 하면서 사춘기 소년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어 갔다. 그리고 이들 중 누군가가 가져왔던 독일 잡지가 있었다. 피, 피, 피. 도로에 쓰러진, 트럭에 널브러진 사람들. 대검을 꽂은 총을 메고 긴 곤봉을 휘두르는 군인들….

“기존에 가졌던 생각들이 정말 너무 쉽게 깨지더라고요. 산산이 부서진 거죠. 그때부터 조금은 고민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선량하게, 학생에 대한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으로 봤을 때 바람직하게 살려고 하는 모습이 유치해 보였다고 해야 할까, 철딱서니 없어 보였다고 할까.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방식에 대해 머릿속에서 조금씩 분열이 생겨났다. 막연히 예전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교에서 정해준 틀에 맞춰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괜히 삐딱선을 타고 싶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산 것은 아니었고, 그러다 대학에 들어갔다.



전태일 평전

양원태는 1년 재수 끝에 1984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돈을 번다는 생각보다는 외국을 다니면서 무역에 종사하는 오퍼상이 그럴듯해 보였다. 막상 들어가서는 전공 공부보다는 고등학교 때 조금 품었던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회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농촌법학회’라는 비공식 서클에서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한 사람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공부를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대학생의 필독서로 불렸던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책들부터 시작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선배의 권유로 거리 시위에도 한 번 나가봤다.

“민주주의, 정치의 가치와 역사, 이런 것들을 조금 수준 높은 교양의 차원에서 고민했다고 할까요. 대학생으로서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약간의 지적 허영도 있었겠지요.”

그런 그 앞에 ‘전태일 평전’이 다가왔다. 서울 평화시장 봉제직공들의 열악한 삶을 개선하기 위해 온몸을 불살라 호소했던 전태일의 삶을 되짚어봤다. 자신의 삶이 자신의 문제의식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맞닿아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진 것도 없으니까 기득권이라 할 것도 없지만, 나에게 뭔가 버릴 것들이 생길 수 있고 아니면 적어도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고민이 시작됐던 것 같아요.”

세상을 바꾼다는 거창한 욕심보다는,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공존을 위해 살아가는 태도나 방향, 선택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전태일이라는 사람을 통해 배웠다. 그때 그는 당시 말하던 ‘현장’에 가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노동운동을 한다기보다도 노동자라는 사람들의 삶에 내 몸을 싣고 내 삶을 한번 도모해 보자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그렇게 5년, 10년 하고 나면 내가 바꾸려고 하는 세상의 모습이든지, 아니면 그 세상을 위한 동력이 보일 것 같았어요.” 그런 마음으로 학교를 정리하려 했다.

어렸을 때 이후로 아버지에게 뺨을 맞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1986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 이제 학교를 그만 다니겠다고 말씀드린 뒤끝이었다. 아버지는 두 가지를 말했다.

“네가 세상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러느냐.” 그리고 “이렇게 부모 가슴에 못을 박을 수 있느냐.” 틀린 말씀이 아니었다. 며칠 뒤 그는 책 몇 권과 옷가지 몇 벌을 싸들고 집을 나왔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노동자의 삶에서 비켜나게 했다.



장애인 속으로

1987년 12월 17일 밤 서울 구로구청 로비에 부모님이 찾아왔다. 전날부터 이틀째 구청에서 농성 중인 아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양원태는 그해 대선에서 국민운동본부 공정선거감시단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투표일이던 16일 구로구청에서는 부재자투표함 부정 의혹이 제기됐고 감시단과 대학생 수백 명이 구청을 점거한 채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부모님은 제사를 지내러 가시는 길에 잠깐 들렀던 참이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어젯밤 꿈자리가 너무 안 좋다. 우리랑 같이 나가자.” 그는 “뭐, 별일 있겠어요. 하룻밤 더 자고 나갈게요”라고 호기롭게 말하고는 부모님을 배웅했다. 그로부터 12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을 18일 오전 8시 40분경 경찰은 농성 진압작전을 개시했고, 그는 몇 시간 뒤 구청 마당에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부모님한테 못할 짓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머님은 ‘네 멱살이라도 잡아끌고 나왔어야 했는데…’ 하셨죠. 그때 저를 데리고 나오지 못한 게 (한이) 맺혀 계신 것 같더라고요.”

병상에서 그는 울지 않았다. 그를 찾아오는 친구나 재야인사들이 오면 웃었다. 즐거워서도 아니었고, 그분들한테 의연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도 아니었던 것 같다. 웃고는 있었지만 듣기 편하지만은 않았던 말은 “너는 이런 일을 당하고 전과 다름없이 밝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칭찬일까, 욕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정말 의연한 것일까.

“그냥 내 삶의 소소한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작든 소박하든 그 선택이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꺾어졌긴 했지만. 그런 차원에서 스스로에게 웃어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 사고로 스스로 좌절하면 내 선택이 너무 초라해진다는 생각도 있지 않았을까요.”

학교를 정리하는 대신 복학을 결정했다. 주로 정치경제학을 대학원 사람들과 공부했다. 장애를 가졌는데 현장에서 일할 수는 없고 결국 머리를 굴리는 학술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학교에 다닐 때는 “기득권을 버리는 결단”이라는 말을 많이 했지만 장애인이 되고 나니 정말 버릴 것조차 없었다. 버릴 것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무기도 없었다. 그래서 공부를 했고 변호사 자격증도 좋은 무기가 될 것 같아 사법시험 공부도 했다. 하지만 머리가 따라주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노동하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자고 생각했어요. 부족한 나지만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지요. 조금 교만했던 것 같네요.”

양원태는 1992년 장애인인권사업단을 시작으로 여러 곳의 장애인단체에서 일을 했다. 2003년에는 어린이 서적 전문 출판사인 ‘올벼’의 대표를 지내기도 했고 2006년 지금의 장애인인권포럼에서 일하게 됐다. 올봄 서울시 명예부시장으로 위촉됐다.



귀를 뚫고, 머리를 볶고

장애인 속으로 들어왔지만 그는 자신을 ‘가짜 장애인’이라고 부른다. 그가 1988년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그를 상담했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계속 연락하자. 도전해보고 싶은 케이스”라고 말했다.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게 된 사람이 당연히 보여야 할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별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더 불안하고 위험하다는 소견이었다.

그는 자신이 장애를 갖게 된 사실을 알고도 울지 않았고, 분노하거나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바로 ‘껍질’이라고 했다. 그 껍질을 깨고 자신의 장애를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채 20년 넘게 살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의문도 든다. 그래서 때로는 장애를 가진 뒤 처음 1, 2년은 술만 마시면 세상을 원망하며 울부짖고 난리를 치는 사람이 부럽기도 하다.

요즘 들어 자꾸 자신이 고갈된다는 느낌 때문에 답답하다. 새로운 것으로 자신을 채워야 할 텐데 기존의 것을 가지고 재탕 삼탕하는 느낌 때문에 더 그렇다. 그래서 3년 전 3·1절에는 귀를 뚫어 귀고리를 했고, 올해 첫 출근을 하는 날에는 태어나서 처음 파마를 했다.

여전히 그의 바람은 “노동자가 됐든, 장애인이 됐든 이들이 스스로를 위해 뭔가를 만들고, 변화 발전해 나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같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럼 양원태 개인의 욕망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장애를 갖기 전에도 장애를 갖게 된 후에도 자신보다는 주위를 향한 삶, 욕망을 유예시킨 삶을 살았던 그가 한참 후에 말했다. “제가 원하는 게 뭘까요. 너무 어렵네요.”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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