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피델 카스트로 타계…‘끝없는 조문 행렬’

등록 2016.11.29.
‘쿠바혁명의 최고사령관’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 25일 타계한 지 이틀이 지난 27일까지 쿠바의 4대 국영방송은 24시간 내내 그의 생전 모습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만 내보냈다.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고인의 뜻에 따라 26일 화장하겠다”고 밝혔지만 카스트로의 장례 진행 모습은 전혀 보도되지 않고 있다.

 이날 아바나 시내에서 만난 쿠바인들은 한결같이 “카스트로의 정확한 사인도 발표되지 않았고, 언제 어떻게 화장했는지도 우린 알 수 없다. 다만 카스트로가 자신의 죽음 이후 장례 절차에 대해 미리 구체적으로 지시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라고 말했다.

 장례 절차에 관여하고 있는 아바나대의 한 교수는 “카스트로의 장례 일정을 보면 그가 쿠바의 국부(國父)로 존경받는 독립혁명가 호세 마르티(1853∼1895)를 얼마나 흠모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아직 공식 발표하지 않았지만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에 있는 마르티의 묘소 바로 옆에 카스트로의 유해를 안치할 준비를 오래전부터 해 온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그만큼 카스트로가 마르티 곁에 묻히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19세기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투쟁을 이끈 시인이자 투사인 마르티는 ‘증오를 지워버린 사랑의 혁명가’로 불린다. 그는 “공화국이 팔을 벌려 모든 것을 감싼 뒤 함께 전진하지 않으면 그 공화국은 파멸하고 말 것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도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없다”고 말하며 ‘소외된 약자’를 챙겼다. ‘카스트로 쿠바’의 상징인 무상교육과 무상의료가 마르티의 이런 정신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카스트로 스스로도 “쿠바의 정체성은 단지 공산주의 이념만이 아니라 독립운동가 호세 마르티의 사상에서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카스트로 신봉자’라고 밝힌 에델린 페르난데스 씨(42·여·회사원)는 “카스트로가 1953년 친미 바티스타 독재정권 타도를 위해 무장투쟁을 벌이다 체포된 후 법정에 걸려 있는 마르티 사진 아래에서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라고 외치는 장면은 너무 강렬하다”고 말했다. 쿠바 TV들도 ‘마르티 사진 아래에서 연설하는 카스트로’ 모습을 반복적으로 내보내고 있다.

 카스트로 유해는 28일 오전 9시 아바나 시내 중심의 호세마르티기념관에 안치돼 일반 시민의 조문을 받기 시작했다. 이 기념관은 혁명기념탑과 마르티기념상 아래 있고 그 앞의 호세마르티혁명광장에서 29일 저녁 대규모 추모대회가 열린다.

 일요일인 26일 밤 아바나 시내의 대표적 유흥가 중 하나인 차이나타운에서 만난 20대 청년들 중에선 “추모 기간(9일) 내내 술 판매뿐 아니라 음악 공연까지 금지한 건 좀 심했다”는 반응을 보이는 이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처럼 불평을 터뜨리면서도 지침을 무시하거나 어기는 장면은 찾기 어려웠다. 실제로 중국집 등 몇몇 가게에 들러 맥주를 주문해 봤지만 번번이 “카스트로 애도 기간이어서 술을 판매할 수 없다. 미안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바텐더인 후안 카를로스 씨(33)는 “나는 술손님의 팁이 주요 수입원이어서 추모 기간 때문에 경제적 피해를 가장 많이 보는 사람이다. 그러나 감수할 수 있다. 카스트로는 쿠바의 혼이자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가 죽었다는 게 아직도 실감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모든 쿠바인이 카를로스 씨 같지는 않았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택시기사(55)는 “놀고 즐기러 쿠바를 방문한 관광객들에게까지 추모를 강요하는 셈”이라며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신념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결과적으로 하향 평준화된 쿠바 경제의 현실은 그의 고집 때문”이라고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주말이면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흥겨운 음악과 취객들로 넘쳐나던 23번가나 차이나타운은 물론 한국의 서울 한강둔치 같은 대표적 휴식처인 방파제(말레콘) 거리에서도 인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아바나는 깊은 정적에 휩싸여 있다.

 기자를 숙소까지 태워준 택시기사는 “평상시엔 15km 길이의 이 방파제 거리가 마치 전선 위에 참새들이 앉아 있는 것처럼 사람들로 빼곡했다. 집에 들어가도 4개 국영방송이 똑같은 추모특집만 하니 일찍 자야겠다”고 말했다. <아바나에서>

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쿠바혁명의 최고사령관’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 25일 타계한 지 이틀이 지난 27일까지 쿠바의 4대 국영방송은 24시간 내내 그의 생전 모습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만 내보냈다.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고인의 뜻에 따라 26일 화장하겠다”고 밝혔지만 카스트로의 장례 진행 모습은 전혀 보도되지 않고 있다.

 이날 아바나 시내에서 만난 쿠바인들은 한결같이 “카스트로의 정확한 사인도 발표되지 않았고, 언제 어떻게 화장했는지도 우린 알 수 없다. 다만 카스트로가 자신의 죽음 이후 장례 절차에 대해 미리 구체적으로 지시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라고 말했다.

 장례 절차에 관여하고 있는 아바나대의 한 교수는 “카스트로의 장례 일정을 보면 그가 쿠바의 국부(國父)로 존경받는 독립혁명가 호세 마르티(1853∼1895)를 얼마나 흠모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아직 공식 발표하지 않았지만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에 있는 마르티의 묘소 바로 옆에 카스트로의 유해를 안치할 준비를 오래전부터 해 온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그만큼 카스트로가 마르티 곁에 묻히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19세기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투쟁을 이끈 시인이자 투사인 마르티는 ‘증오를 지워버린 사랑의 혁명가’로 불린다. 그는 “공화국이 팔을 벌려 모든 것을 감싼 뒤 함께 전진하지 않으면 그 공화국은 파멸하고 말 것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도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없다”고 말하며 ‘소외된 약자’를 챙겼다. ‘카스트로 쿠바’의 상징인 무상교육과 무상의료가 마르티의 이런 정신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카스트로 스스로도 “쿠바의 정체성은 단지 공산주의 이념만이 아니라 독립운동가 호세 마르티의 사상에서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카스트로 신봉자’라고 밝힌 에델린 페르난데스 씨(42·여·회사원)는 “카스트로가 1953년 친미 바티스타 독재정권 타도를 위해 무장투쟁을 벌이다 체포된 후 법정에 걸려 있는 마르티 사진 아래에서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라고 외치는 장면은 너무 강렬하다”고 말했다. 쿠바 TV들도 ‘마르티 사진 아래에서 연설하는 카스트로’ 모습을 반복적으로 내보내고 있다.

 카스트로 유해는 28일 오전 9시 아바나 시내 중심의 호세마르티기념관에 안치돼 일반 시민의 조문을 받기 시작했다. 이 기념관은 혁명기념탑과 마르티기념상 아래 있고 그 앞의 호세마르티혁명광장에서 29일 저녁 대규모 추모대회가 열린다.

 일요일인 26일 밤 아바나 시내의 대표적 유흥가 중 하나인 차이나타운에서 만난 20대 청년들 중에선 “추모 기간(9일) 내내 술 판매뿐 아니라 음악 공연까지 금지한 건 좀 심했다”는 반응을 보이는 이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처럼 불평을 터뜨리면서도 지침을 무시하거나 어기는 장면은 찾기 어려웠다. 실제로 중국집 등 몇몇 가게에 들러 맥주를 주문해 봤지만 번번이 “카스트로 애도 기간이어서 술을 판매할 수 없다. 미안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바텐더인 후안 카를로스 씨(33)는 “나는 술손님의 팁이 주요 수입원이어서 추모 기간 때문에 경제적 피해를 가장 많이 보는 사람이다. 그러나 감수할 수 있다. 카스트로는 쿠바의 혼이자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가 죽었다는 게 아직도 실감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모든 쿠바인이 카를로스 씨 같지는 않았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택시기사(55)는 “놀고 즐기러 쿠바를 방문한 관광객들에게까지 추모를 강요하는 셈”이라며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신념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결과적으로 하향 평준화된 쿠바 경제의 현실은 그의 고집 때문”이라고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주말이면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흥겨운 음악과 취객들로 넘쳐나던 23번가나 차이나타운은 물론 한국의 서울 한강둔치 같은 대표적 휴식처인 방파제(말레콘) 거리에서도 인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아바나는 깊은 정적에 휩싸여 있다.

 기자를 숙소까지 태워준 택시기사는 “평상시엔 15km 길이의 이 방파제 거리가 마치 전선 위에 참새들이 앉아 있는 것처럼 사람들로 빼곡했다. 집에 들어가도 4개 국영방송이 똑같은 추모특집만 하니 일찍 자야겠다”고 말했다. <아바나에서>

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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