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피두센터의 깐깐한 작품 관리에는 ‘윤리’가 있다[영감 한 스푼]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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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퐁피두센터 보존복원가 인터뷰

프랑스 퐁피두센터 소장품으로 전남도립미술관의 ‘인간의 고귀함을 지킨 화가, 조르주 루오’전에 전시됐던 루오의 작품 ‘베로니카’(1945년경·왼쪽 사진)와 ‘어린 피에로’(1945년경) .
프랑스 퐁피두센터 소장품으로 전남도립미술관의 ‘인간의 고귀함을 지킨 화가, 조르주 루오’전에 전시됐던 루오의 작품 ‘베로니카’(1945년경·왼쪽 사진)와 ‘어린 피에로’(1945년경) .
김민 문화부 기자
김민 문화부 기자
미술관에서 전시가 끝나면 작품은 어떤 과정을 거쳐 제자리로 돌아가는 걸까요? 작품을 상자에 넣어 수장고에 보관하는 것 이상의 훨씬 복잡한 과정이 있습니다. 특히 그 작품이 바다 건너 먼 외국에서 온 것이라면 말이죠.

얼마 전 전남도립미술관에서 막을 내린 ‘인간의 고귀함을 지킨 화가, 조르주 루오’전이 그랬습니다. 이 전시는 프랑스 조르주 루오 재단, 말랭그 갤러리와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현대미술관인 퐁피두센터 소장품이 한자리에 모였답니다. 전시가 끝나고 작품들은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로 가야 했는데요. 이 모든 과정은 미술관에 소속된 ‘쿠리에’(작품 호송인)가 점검합니다.

이 역할을 위해 한국을 찾은 퐁피두센터의 보존복원가 A 씨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인터뷰이가 개인 사정으로 익명을 요청해 A 씨로 표기합니다).
모든 것은 ‘쿠리에’의 눈앞에서
지난달 29일 전시가 끝나고 다음 날 퐁피두센터의 쿠리에를 기다리던 미술관 관계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전남 광양까지 온 쿠리에가 한국인이었기 때문이죠. A 씨는 “한국에 올 좋은 기회가 생겨 기쁜 마음으로 왔다”고 했습니다.

미술관에 도착한 A 씨는 가장 먼저 작품들의 변화를 체크했습니다. 이번 전시의 루오 작품은 종이에 유화로 그린 것이 많아 재료 특성상 세밀한 점검이 필요했습니다.

지난달 29일 전시가 끝난 후 포장을 마친 작품을 운송 차량에 싣고 있다. 전남도미술관 제공
지난달 29일 전시가 끝난 후 포장을 마친 작품을 운송 차량에 싣고 있다. 전남도미술관 제공
작품마다 포장법도 모두 다릅니다. 작품을 이동 상자인 ‘크레이트’에 어떻게 넣고 보호재는 무엇을 넣을지, 세워서 운반할지 눕혀서 운반할지, 손으로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등 여러 방법이 자세히 정해져 있으며 이 모든 과정을 쿠리에가 확인합니다. 그 다음에는 작품을 차에 실어 세관을 거쳐 비행기로 이동하겠죠? 작품이 파리에 도착해도 바로 열 수 없습니다.

“갑자기 박스를 열면 기온, 습도의 급변으로 작품이 손상될 수 있어요. 비행기 진동, 온도, 습도에 따라 사용하는 크레이트의 재질부터 여는 방법까지, 모든 것이 사전에 합의되어 있습니다.”

작품을 빌려주는 퐁피두센터와 전시를 여는 전남도립미술관이 이런 상세한 부분들을 상의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의미입니다. 쿠리에는 이 합의된 과정이 잘 진행되는지 봐야 하기에, A 씨가 자리에 없으면 작품 포장이나 운반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단계마다 상태를 체크하고, 변화가 있다면 어느 시점에 생긴 것인지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죠.
작품 보존에는 ‘윤리’가 필요하다
전시를 관람하는 경험이 대부분인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미술관들이 왜 이런 까다로운 과정을 거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A 씨는 이런 과정을 ‘윤리’로 설명했습니다. 관계자가 상황이나 조건에 타협해 작품에 피해를 주는 선택을 하는 것을 객관적 연구와 매뉴얼로 방지한다는 이야기로 이해됩니다.

즉, 시간이나 예산이 부족하다고 임의로 저렴한 크레이트나 보호재를 사용하는 사태를 막는 것이죠. 당장에 큰 손실은 되지 않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작은 균열도 큰 손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A 씨는 프랑스의 예술가 겸 영화감독이었던 장 콕토(1889∼1963)의 드로잉 100여 점을 복원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수년에 걸쳐 이뤄진 작업은 과학적 검사, 미술사 연구, 가치 결정까지 복잡한 단계를 거쳤습니다. 특히 콕토가 종이에 붙인 스카치테이프의 흔적을 없애는 것을 두고 긴 숙고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테이프의 흔적은 작가의 테크닉을 보여주는 역사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테이프의 점착 성분으로 인해 생긴 갈색 얼룩이 시간이 지나면 더 진해지고, 제거하기도 어려워진다는 판단 아래 없애기로 결정했죠. 손상은 아주 오랜 시간 후에 나타나지만, 미술관 작품은 후대의 사람들도 보아야 하는 것이니까요.”

물질의 화학적 반응을 고려해 ‘과학자’처럼 느껴졌지만, 콕토 작품의 의미를 고려하는 부분은 ‘미술사가’로 보였습니다. 오랜 시간을 예측·연구하며 가치 판단을 내리는 것은 철학적이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그는 ‘보존복원가의 윤리’를 강조했습니다.

“보존복원의 모든 가치 판단은 직업윤리가 바탕입니다. 특정인이나 대중의 요청에 따른 무분별한 보존복원, 즉 개인의 미적 판단에 의하거나 진정성을 무시한 복원 처리를 해서는 안 되죠. 작품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과학적, 미술사적 연구 등 윤리적 검증을 하며 작업에 임해야 합니다.”

저는 A 씨의 이야기를 통해 공공 미술관의 역할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공적 자금(세금)으로 운영되는 미술관은 시민들이 봐야 할 좋은 작품을 수집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볼 수 있도록 보존하며, 더 많은 사람이 작품을 감상하도록 연구하고 알리는 것이 그 역할이겠지요.

A 씨는 “루오가 한국에서 누구나 알 만한 작가는 아니지만, 풍부한 미술사를 보여주는 전시였다”며 “향후에도 이런 시도로 한국 미술관들이 앞으로 나아갈 좋은 영향이 있을 것 같다”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이번에는 가까운 미술관을 찾아 미술의 역사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것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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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프랑스#퐁피두센터#보존복원가#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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