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영 교수의 그림 읽기]지금 그 사람은 어디서

등록 2007.04.28.
창문으로 샛노란 빛을 쏟아 부어 대낮에도 등불을 켜 놓은 듯 방 안을 환하게 비추던 개나리는 지고 지금은 무성한 잎들로 초록이 출렁입니다. 아담하게 조성한 뒷산 공원의 오르막 나무계단 끝마다 일꾼들이 노란 페인트를 칠하며 봄단장에 한창입니다.

20여 년 전, 처음 이 동네로 이사 왔을 때, 아파트 옆을 돌아 아카시아 우거진 산으로 올라가는 조붓한 길은 벼랑이었지요. 그 좁은 통로 밑에 필경 무허가인 듯한 작은 판잣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마당에는 일년초 화단. 몸집이 크고 말이 없는 부인과 깡마르고 키가 작은 중년 남자가 살고 있었지요. 바람벽에 ‘사주 관상’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지만 그 집을 찾는 손님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뒷산을 오르다 보니 관할 구청이 권리행사를 한 듯 그 집이 통째로 다 뜯겨서 길가에 쌓여 있고 얼마 안 되는 가재도구가 설핏하게 널려 있었습니다. 그 한가운데 중년 남자가 낡은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아늑하던 삶이 온통 철거되어 ‘거리로 나앉은’ 딱한 사람을 내 눈으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 그 중년 남자는 쌓여 있던 판자를 주워 모아 다시 집을 지었습니다. 판자 안쪽엔 보이지 않게 벽돌까지 져다가 튼튼하게 쌓았습니다. 외벽에는 ‘사주 관상’ 대신 하얀 칠을 한 판자에 ‘건국 유공자’라고 쓴 푯말을 붙이고 정성스레 태극기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 푯말은 ‘이래도 또 철거할 테냐?’ 하고 항변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집 주변에는 돌담이 쌓이고 그 위로 화사한 나팔꽃이 피어났지요. 집 입구에 조그만 장식 물레방아까지 앙증맞게 돌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번에는 중장비가 들이닥쳐 판잣집을 깨끗이 쓸어내고 그 자리에 전봇대만큼 굵은 은행나무 토막들을 삼엄하게 심고 철조망을 쳤습니다. 그 뒤 그 남자와 덩치 큰 부인은 다시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올봄에는 버려진 전봇대 같던 그 은행나무들에서 파릇파릇 잎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 만발한 분홍빛 산복숭아꽃을 바라보며 나는 거기 나팔꽃을 덧없이 심고 살던 키 작은 남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봄, 그는 또 어느 산자락에서 나팔꽃을 심어 놓고 물레방아를 돌릴까요?

◇‘그림 읽기’는 다음 주부터 작가 성석제 씨가 집필합니다. 그동안 집필한 김화영 교수께 감사드립니다.

창문으로 샛노란 빛을 쏟아 부어 대낮에도 등불을 켜 놓은 듯 방 안을 환하게 비추던 개나리는 지고 지금은 무성한 잎들로 초록이 출렁입니다. 아담하게 조성한 뒷산 공원의 오르막 나무계단 끝마다 일꾼들이 노란 페인트를 칠하며 봄단장에 한창입니다.

20여 년 전, 처음 이 동네로 이사 왔을 때, 아파트 옆을 돌아 아카시아 우거진 산으로 올라가는 조붓한 길은 벼랑이었지요. 그 좁은 통로 밑에 필경 무허가인 듯한 작은 판잣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마당에는 일년초 화단. 몸집이 크고 말이 없는 부인과 깡마르고 키가 작은 중년 남자가 살고 있었지요. 바람벽에 ‘사주 관상’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지만 그 집을 찾는 손님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뒷산을 오르다 보니 관할 구청이 권리행사를 한 듯 그 집이 통째로 다 뜯겨서 길가에 쌓여 있고 얼마 안 되는 가재도구가 설핏하게 널려 있었습니다. 그 한가운데 중년 남자가 낡은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아늑하던 삶이 온통 철거되어 ‘거리로 나앉은’ 딱한 사람을 내 눈으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 그 중년 남자는 쌓여 있던 판자를 주워 모아 다시 집을 지었습니다. 판자 안쪽엔 보이지 않게 벽돌까지 져다가 튼튼하게 쌓았습니다. 외벽에는 ‘사주 관상’ 대신 하얀 칠을 한 판자에 ‘건국 유공자’라고 쓴 푯말을 붙이고 정성스레 태극기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 푯말은 ‘이래도 또 철거할 테냐?’ 하고 항변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집 주변에는 돌담이 쌓이고 그 위로 화사한 나팔꽃이 피어났지요. 집 입구에 조그만 장식 물레방아까지 앙증맞게 돌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번에는 중장비가 들이닥쳐 판잣집을 깨끗이 쓸어내고 그 자리에 전봇대만큼 굵은 은행나무 토막들을 삼엄하게 심고 철조망을 쳤습니다. 그 뒤 그 남자와 덩치 큰 부인은 다시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올봄에는 버려진 전봇대 같던 그 은행나무들에서 파릇파릇 잎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 만발한 분홍빛 산복숭아꽃을 바라보며 나는 거기 나팔꽃을 덧없이 심고 살던 키 작은 남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봄, 그는 또 어느 산자락에서 나팔꽃을 심어 놓고 물레방아를 돌릴까요?

◇‘그림 읽기’는 다음 주부터 작가 성석제 씨가 집필합니다. 그동안 집필한 김화영 교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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