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軍 또 발포… 日기자 등 최소 9명 추가 사망

등록 2007.09.28.
미얀마의 반정부 민주화 시위가 유혈 사태로 치닫는 가운데 27일에도 진압군의 발포로 사망자가 늘어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 미얀마 관영 언론은 옛 수도인 양곤에서 시위를 취재하던 일본인 기자 1명 등 모두 9명이 숨졌다고 이날 전했으나 시위대는 희생자가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AFP통신은 이날 유탄에 맞아 숨진 일본인이 일본 APF통신 소속 나가이 겐지(50) 씨로 이틀 전 미얀마에 입국했다고 보도했다.

유혈 사태가 확산되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26일 미얀마에 특사를 파견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미얀마 정부에 자제를 촉구하는 국제사회의 성명이 잇따랐다.

외교통상부는 27일 미얀마에 대한 여행경보 단계를 ‘여행 유의’에서 한 단계 높은 ‘여행 자제’로 상향 조정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 軍, 사원 급습 승려 수백명 연행… 무력진압 희생자 계속 늘듯

“이리 와, 날 죽여라.”

27일 미얀마 옛 수도 양곤 시내. 분노로 가득 찬 여성이 군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한 노인은 “너희는 국민이 준 음식을 먹으면서 국민을 죽이고 승려들을 죽이고 있다”고 외쳤다.

AP통신은 이날 거리에서 만난 성난 군중의 모습을 전하면서 “힘도 없는 군중의 저항이 군사정권을 향한 미얀마 국민의 분노를 잘 보여 준다”고 지적했다.

이번 시위는 1988년 군부에 의해 강제 진압된 민주화 시위 이후 가장 큰 시위로 확산되고 있다. AFP통신은 이날 한때 양곤 시내에서만 시위대가 10만여 명으로 불어났다고 전했다.

진압군의 무력 진압에 따른 사망자도 늘었다. 미얀마 관영 언론은 이날 일본인 1명을 포함해 모두 9명이 숨졌다고 전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희생자가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시위는 진압군이 이날 새벽 양곤, 만달레이 등 대도시의 일부 불교 사원을 급습해 과격한 진압 작전을 벌이자 분노한 시민들의 가세로 더욱 거세졌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진압군은 사원 정문을 차로 부수고 진입한 뒤 최루가스를 쏘고 곤봉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승려들을 진압했다. 승려 수백 명이 연행됐으며 현장에는 곳곳에 핏자국이 남았다.

시위대는 시내로 몰려 나와 국가를 부르며 “자유를 달라”고 외쳤다. 진압군은 군중을 향해 경고사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유탄에 맞아 목숨을 잃는 사람도 생겼다.

이날 양곤 시내에선 대부분의 학교 식당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거리 곳곳에는 피 묻은 신발이 눈에 띄었다. 한 30대 남성은 AP통신에 “마치 전쟁터 같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진압군을 피해 집안에 모여 단파 라디오를 통해 해외 언론들이 전하는 소식을 듣고 있다고 AP통신은 보도했다. 일부는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이용해 외부 세계에 현지 실상을 알리는 데 애쓰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한편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 여사가 연금돼 있던 가택에서 악명 높은 인세인 감옥으로 옮겨졌다는 소문이 나돌아 군중을 더욱 흥분시켰다.

사태가 악화되자 미얀마 정부를 향해 무력 진압 자제를 촉구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26일 미얀마 특별자문관으로 임명한 이브라힘 감바리 전 유엔 정무담당 사무차장을 특사로 파견하겠다고 밝혔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들도 이날 긴급회의를 열어 반 총장의 특사 파견을 지지하고 미얀마 당국에 특사 입국을 빨리 허가하라고 요구했다.

유엔 총회가 열리고 있는 뉴욕에선 주요 8개국(G8) 외교장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외교장관들이 각각 회의를 열고 중국과 인도 등 역내 강국들이 적극 나서 미얀마 군사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촉구했다.

미얀마 제재 조치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중국도 27일 이례적으로 외교부를 통해 “관련 당사자들의 자제를 바란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며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동참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미얀마 질곡의 역사

‘황금 탑의 나라’로 불리며 찬란한 불교 문화유산을 소유한 나라 미얀마. 한때 세계 제1의 쌀 수출지역으로 풍요로움을 자랑했지만 1948년 1월 4일 영국에서 독립한 직후 공산당과 소수민족인 카렌족 독립을 요구하는 무장세력의 활동으로 내전에 빠졌다.

1962년 3월 2일 네윈 장군이 이끄는 군부가 사회 안정을 구실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폭정과 가난에 시달리던 미얀마 국민은 1988년 마침내 쌓인 분노를 터뜨렸다. 3월 12일 양곤(당시 랑군)의 랑군공과대 학생들의 시위에서 경찰이 발포해 학생 1명이 사망한 것이 발단이었다.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고 8월 8일 양곤에서 10만 명 이상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인 아웅산 수치 여사가 시위대 앞에서 연설을 하며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는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뒤 영국 학자와 결혼해 영국에서 살다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조국을 방문 중이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위가 한창이던 9월 18일 사우 마웅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또다시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다. 이해 벌어진 전국적 시위로 3000명 이상(국제 인권단체 추산)이 목숨을 잃었다.

군사정권은 1990년 계엄 상황에서 총선을 실시했다. 수치 여사가 이끄는 야당 민족민주동맹(NLD)이 82%를 득표하며 압승을 거두었지만 군사정권은 총선을 무효화한 뒤 지금까지 공공연히 공포정치를 자행해 오고 있다. 철권통치 아래 경제 상황 또한 끝을 모르고 후퇴를 거듭해 오늘날 미얀마는 1인당 국민소득이 175달러로 세계 최빈국 중 하나다.

1997년에는 NLD 당원 14명이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고 2003년 수치 여사와 군부 지지자 사이의 충돌로 4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대규모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달 15일 군정의 돌연한 유가 인상은 참아 온 국민의 가슴에 다시금 불을 질렀다. 살인적 물가 폭등에 신음하던 미얀마 국민은 19년 만에 다시 거리로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전창 기자 jeon@donga.com

미얀마의 반정부 민주화 시위가 유혈 사태로 치닫는 가운데 27일에도 진압군의 발포로 사망자가 늘어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 미얀마 관영 언론은 옛 수도인 양곤에서 시위를 취재하던 일본인 기자 1명 등 모두 9명이 숨졌다고 이날 전했으나 시위대는 희생자가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AFP통신은 이날 유탄에 맞아 숨진 일본인이 일본 APF통신 소속 나가이 겐지(50) 씨로 이틀 전 미얀마에 입국했다고 보도했다.

유혈 사태가 확산되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26일 미얀마에 특사를 파견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미얀마 정부에 자제를 촉구하는 국제사회의 성명이 잇따랐다.

외교통상부는 27일 미얀마에 대한 여행경보 단계를 ‘여행 유의’에서 한 단계 높은 ‘여행 자제’로 상향 조정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 軍, 사원 급습 승려 수백명 연행… 무력진압 희생자 계속 늘듯

“이리 와, 날 죽여라.”

27일 미얀마 옛 수도 양곤 시내. 분노로 가득 찬 여성이 군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한 노인은 “너희는 국민이 준 음식을 먹으면서 국민을 죽이고 승려들을 죽이고 있다”고 외쳤다.

AP통신은 이날 거리에서 만난 성난 군중의 모습을 전하면서 “힘도 없는 군중의 저항이 군사정권을 향한 미얀마 국민의 분노를 잘 보여 준다”고 지적했다.

이번 시위는 1988년 군부에 의해 강제 진압된 민주화 시위 이후 가장 큰 시위로 확산되고 있다. AFP통신은 이날 한때 양곤 시내에서만 시위대가 10만여 명으로 불어났다고 전했다.

진압군의 무력 진압에 따른 사망자도 늘었다. 미얀마 관영 언론은 이날 일본인 1명을 포함해 모두 9명이 숨졌다고 전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희생자가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시위는 진압군이 이날 새벽 양곤, 만달레이 등 대도시의 일부 불교 사원을 급습해 과격한 진압 작전을 벌이자 분노한 시민들의 가세로 더욱 거세졌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진압군은 사원 정문을 차로 부수고 진입한 뒤 최루가스를 쏘고 곤봉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승려들을 진압했다. 승려 수백 명이 연행됐으며 현장에는 곳곳에 핏자국이 남았다.

시위대는 시내로 몰려 나와 국가를 부르며 “자유를 달라”고 외쳤다. 진압군은 군중을 향해 경고사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유탄에 맞아 목숨을 잃는 사람도 생겼다.

이날 양곤 시내에선 대부분의 학교 식당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거리 곳곳에는 피 묻은 신발이 눈에 띄었다. 한 30대 남성은 AP통신에 “마치 전쟁터 같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진압군을 피해 집안에 모여 단파 라디오를 통해 해외 언론들이 전하는 소식을 듣고 있다고 AP통신은 보도했다. 일부는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이용해 외부 세계에 현지 실상을 알리는 데 애쓰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한편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 여사가 연금돼 있던 가택에서 악명 높은 인세인 감옥으로 옮겨졌다는 소문이 나돌아 군중을 더욱 흥분시켰다.

사태가 악화되자 미얀마 정부를 향해 무력 진압 자제를 촉구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26일 미얀마 특별자문관으로 임명한 이브라힘 감바리 전 유엔 정무담당 사무차장을 특사로 파견하겠다고 밝혔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들도 이날 긴급회의를 열어 반 총장의 특사 파견을 지지하고 미얀마 당국에 특사 입국을 빨리 허가하라고 요구했다.

유엔 총회가 열리고 있는 뉴욕에선 주요 8개국(G8) 외교장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외교장관들이 각각 회의를 열고 중국과 인도 등 역내 강국들이 적극 나서 미얀마 군사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촉구했다.

미얀마 제재 조치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중국도 27일 이례적으로 외교부를 통해 “관련 당사자들의 자제를 바란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며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동참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미얀마 질곡의 역사

‘황금 탑의 나라’로 불리며 찬란한 불교 문화유산을 소유한 나라 미얀마. 한때 세계 제1의 쌀 수출지역으로 풍요로움을 자랑했지만 1948년 1월 4일 영국에서 독립한 직후 공산당과 소수민족인 카렌족 독립을 요구하는 무장세력의 활동으로 내전에 빠졌다.

1962년 3월 2일 네윈 장군이 이끄는 군부가 사회 안정을 구실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폭정과 가난에 시달리던 미얀마 국민은 1988년 마침내 쌓인 분노를 터뜨렸다. 3월 12일 양곤(당시 랑군)의 랑군공과대 학생들의 시위에서 경찰이 발포해 학생 1명이 사망한 것이 발단이었다.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고 8월 8일 양곤에서 10만 명 이상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인 아웅산 수치 여사가 시위대 앞에서 연설을 하며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는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뒤 영국 학자와 결혼해 영국에서 살다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조국을 방문 중이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위가 한창이던 9월 18일 사우 마웅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또다시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다. 이해 벌어진 전국적 시위로 3000명 이상(국제 인권단체 추산)이 목숨을 잃었다.

군사정권은 1990년 계엄 상황에서 총선을 실시했다. 수치 여사가 이끄는 야당 민족민주동맹(NLD)이 82%를 득표하며 압승을 거두었지만 군사정권은 총선을 무효화한 뒤 지금까지 공공연히 공포정치를 자행해 오고 있다. 철권통치 아래 경제 상황 또한 끝을 모르고 후퇴를 거듭해 오늘날 미얀마는 1인당 국민소득이 175달러로 세계 최빈국 중 하나다.

1997년에는 NLD 당원 14명이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고 2003년 수치 여사와 군부 지지자 사이의 충돌로 4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대규모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달 15일 군정의 돌연한 유가 인상은 참아 온 국민의 가슴에 다시금 불을 질렀다. 살인적 물가 폭등에 신음하던 미얀마 국민은 19년 만에 다시 거리로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전창 기자 j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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