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뒷골목에서 혼자 막 울었죠”

등록 2009.10.21.
(박제균 앵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0월 21일 동아 뉴스 스테이션입니다.

발레 공연을 보면 무용수들이 하늘을 나는 것 같습니다. 지구가 사람을 당기는 힘, 즉 중력에 반발하면서 신체의 아름다움 한껏 펼치는 그들의 모습에 박수가 절로 나옵니다.

(김현수 앵커) 하지만 무대 뒤에선, 처절한 싸움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최근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서 제2의 무용 인생을 시작한 세계적인 발레리노 김용걸 씨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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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장면)

강렬하면서도 섬세한 에너지가 넘칩니다.

관객을 압도하는 자신감은 연습실에서 나옵니다. 기량의 120% 이상 준비가 돼야 무대에 오릅니다.

(인터뷰) 김용걸 발레리노 / 한국예술종합대학교 교수

"거의 1000명 이상의 시선이 쫙 쏟아지면 그 시선이 확 느껴져요. 그럼 제가 준비가 잘 돼 있으면 이걸 제가 그냥 튕겨내요. 팍~주면은 한 2막, 3막 때쯤이면 이 분들이 제가 뿜어낸 에너지를 받고, 박수를 보내시는데, 준비가 안 되면 그게 다 화살이 돼서 그거 때문에 밀려서 아무것도 못해요."

김용걸 씨는 프랑스 파리 국립오페라발레단의 동양인 최초 남성 무용수로 입단해, 최고 급 발레리노인 `쉬제`에 오른 세계적인 스타입니다.

발레는 순전히 어머니의 권유로 중학교 2학년 때 학원에 `끌려가며` 시작했습니다.

(인터뷰)

"뭐 발레에 `발` 자도 몰랐고 발레에 대한 그 이미지가 있는 거예요. 남자가 막 그 거 입고도는… 의상도 싫었고, 이미지만 보고 남자가 저런 거 왜할까, 생각도 하기 싫은 거죠."

하지만 고등학교 때 발레리노의 역동성에 눈을 떴습니다.

(인터뷰)

"남자 선배들이 요즘 비보이들이 하는 것처럼 막 돌고 역동적인 동작을 보니까 생각이 바뀌었어요. 저런 동작을 해보고 싶고…저는 고등학교 때 춤에 미쳐서 시작한 그 이후로부터 전 단지 춤을 좋아서 했을 뿐이에요."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승승장구하던 김용걸 씨는 자리를 박차고 프랑스로 날아갔습니다.

하지만 파리는 냉혹했습니다. 파리 국립오페라발레단은 까다로운 겹겹의 승진절차를 거쳐야만 솔리스트가 됩니다. 조바심에 무리해서 연습하면, 부상이 그를 막아섰습니다.

(인터뷰)

"막 매일 매일 땀을 막 엄청 흘려도 모자랄 판에 집에서 살만 뒤룩뒤룩 찌니까, 외국에서. 그런데 한국에서 `김용걸 씨 근황이 어떻게 되세요` 그럼 미치는 거죠."

좌절 때문에 라면 집을 차리는 상상도 했지만 꿈이 기다림을 배우게 했습니다.

(인터뷰)

"제가 말씀드리기 곤란한 꿈이 있는데, 그 꿈을 놓치기는 싫어요. 그 꿈이 너무 커서 못 이룰 수도 있지만 그 꿈이 계속 저를 당긴 것 같아요."

솔리스트에 오른 날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마음이 벅찼지만 경쟁에서 진 동료들에게 드러낼 순 없는 일.

(인터뷰)

"그런 마음을 꾹 숨기고, 극장을 나왔어요. 좍 가면서 라파예트 백화점이 있는데요, 파리에. 그 뒤 쪽 가서 막 울었어요, 혼자서."

올 여름 김용걸 씨는 다시 그 골목을 찾았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특채돼 파리오페라발레단 종신단원 자리를 버리고, 교육자의 길에 도전함에 앞서 마음을 다잡기 위해섭니다.

(인터뷰)

"정말 쉽게, 그 자리를 버리고 온 건 절대 아니거든요. 정말, 저 나름대로도 힘들었는데, 그런 아쉬움을 항상 가지고 있다면 제가 여기서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열심히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래서 정말 제 두 번째 인생은 교육자로서, 제 2의 김용걸보다 훨씬 더 나은 그런 무용수들을 제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떤 큰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앞서 말하기 곤란한 꿈이 뭔지 재차 물었지만, 김용걸 씨는 한국 발레를 위한 꿈이라면서 자신이 쉰 살쯤 되면 알게 될 거라고 웃었습니다.

동아일보 김현수입니다.

(박제균 앵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0월 21일 동아 뉴스 스테이션입니다.

발레 공연을 보면 무용수들이 하늘을 나는 것 같습니다. 지구가 사람을 당기는 힘, 즉 중력에 반발하면서 신체의 아름다움 한껏 펼치는 그들의 모습에 박수가 절로 나옵니다.

(김현수 앵커) 하지만 무대 뒤에선, 처절한 싸움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최근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서 제2의 무용 인생을 시작한 세계적인 발레리노 김용걸 씨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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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장면)

강렬하면서도 섬세한 에너지가 넘칩니다.

관객을 압도하는 자신감은 연습실에서 나옵니다. 기량의 120% 이상 준비가 돼야 무대에 오릅니다.

(인터뷰) 김용걸 발레리노 / 한국예술종합대학교 교수

"거의 1000명 이상의 시선이 쫙 쏟아지면 그 시선이 확 느껴져요. 그럼 제가 준비가 잘 돼 있으면 이걸 제가 그냥 튕겨내요. 팍~주면은 한 2막, 3막 때쯤이면 이 분들이 제가 뿜어낸 에너지를 받고, 박수를 보내시는데, 준비가 안 되면 그게 다 화살이 돼서 그거 때문에 밀려서 아무것도 못해요."

김용걸 씨는 프랑스 파리 국립오페라발레단의 동양인 최초 남성 무용수로 입단해, 최고 급 발레리노인 `쉬제`에 오른 세계적인 스타입니다.

발레는 순전히 어머니의 권유로 중학교 2학년 때 학원에 `끌려가며` 시작했습니다.

(인터뷰)

"뭐 발레에 `발` 자도 몰랐고 발레에 대한 그 이미지가 있는 거예요. 남자가 막 그 거 입고도는… 의상도 싫었고, 이미지만 보고 남자가 저런 거 왜할까, 생각도 하기 싫은 거죠."

하지만 고등학교 때 발레리노의 역동성에 눈을 떴습니다.

(인터뷰)

"남자 선배들이 요즘 비보이들이 하는 것처럼 막 돌고 역동적인 동작을 보니까 생각이 바뀌었어요. 저런 동작을 해보고 싶고…저는 고등학교 때 춤에 미쳐서 시작한 그 이후로부터 전 단지 춤을 좋아서 했을 뿐이에요."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승승장구하던 김용걸 씨는 자리를 박차고 프랑스로 날아갔습니다.

하지만 파리는 냉혹했습니다. 파리 국립오페라발레단은 까다로운 겹겹의 승진절차를 거쳐야만 솔리스트가 됩니다. 조바심에 무리해서 연습하면, 부상이 그를 막아섰습니다.

(인터뷰)

"막 매일 매일 땀을 막 엄청 흘려도 모자랄 판에 집에서 살만 뒤룩뒤룩 찌니까, 외국에서. 그런데 한국에서 `김용걸 씨 근황이 어떻게 되세요` 그럼 미치는 거죠."

좌절 때문에 라면 집을 차리는 상상도 했지만 꿈이 기다림을 배우게 했습니다.

(인터뷰)

"제가 말씀드리기 곤란한 꿈이 있는데, 그 꿈을 놓치기는 싫어요. 그 꿈이 너무 커서 못 이룰 수도 있지만 그 꿈이 계속 저를 당긴 것 같아요."

솔리스트에 오른 날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마음이 벅찼지만 경쟁에서 진 동료들에게 드러낼 순 없는 일.

(인터뷰)

"그런 마음을 꾹 숨기고, 극장을 나왔어요. 좍 가면서 라파예트 백화점이 있는데요, 파리에. 그 뒤 쪽 가서 막 울었어요, 혼자서."

올 여름 김용걸 씨는 다시 그 골목을 찾았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특채돼 파리오페라발레단 종신단원 자리를 버리고, 교육자의 길에 도전함에 앞서 마음을 다잡기 위해섭니다.

(인터뷰)

"정말 쉽게, 그 자리를 버리고 온 건 절대 아니거든요. 정말, 저 나름대로도 힘들었는데, 그런 아쉬움을 항상 가지고 있다면 제가 여기서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열심히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래서 정말 제 두 번째 인생은 교육자로서, 제 2의 김용걸보다 훨씬 더 나은 그런 무용수들을 제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떤 큰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앞서 말하기 곤란한 꿈이 뭔지 재차 물었지만, 김용걸 씨는 한국 발레를 위한 꿈이라면서 자신이 쉰 살쯤 되면 알게 될 거라고 웃었습니다.

동아일보 김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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