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11일 - 대한민국, 오늘의 역사

등록 2010.02.10.
1896년 2월 11일 - 고종,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김(아관파천, 俄館播遷)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듬해인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경운궁(현 덕수궁)을 떠나 세자(순종)와 함께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아관파천, 俄館播遷. 노관파천(露館播遷) 이라고도 함). 친일세력에게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당시 일본과 대립하고 있던 러시아의 힘을 빌리고자 심야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거한 것이다.

아관파천 후 친일내각이 붕괴고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 등의 친일내각대신들이 시민들에게 살해됐으며 유길준, 조희연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이범진, 이완용 등을 중심으로 한 친러내각이 들어섰다.

아관파천은 1년여 간 지속되다가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끝났다. 환궁 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1897년 10월 12일 황제 즉위식을 통해 대한제국이 독립국가임을 대외에 선포했다.

1906년 2월 11일 -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경기가 열림

1906년 2월 11일,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전신) 야구팀과 독일어 학교팀이 겨룬 야구시합이 흥인지문 인근 훈련원 마동산에서 열렸다. 결과는 YMCA팀의 3점차 패배였다. 이 시합은 한국 최초의 공식 야구경기로 기록됐다.

YMCA 야구단은 황성기독교청년회 초대 총무 질레트의 노력으로 창설됐다. YMCA 야구단은 1912년 11월 일본 원정길에도 오르며 한국 스포츠 사상 최초의 해외원정을 시도하기도 했다. 야구 불모지였던 조선에 야구를 보급하며 화제를 뿌리던 YMCA 야구단은 1913년 해체됐다.

1940년 2월 11일 - 일제강점기 창씨개명 실시

일제강점기 일제의 황국신민(皇國臣民) 정책에 따라 창씨개명(일본식 성명으로 고치는 것)이 1940년 2월 11일을 시작으로 6개월간 실시됐다. 창시개명은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민족 말살정책의 하나다.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이 내선일체의 완성이라고 선전했다.

창씨하지 않는 사람들은 우선 징용 대상이 되거나 식량배급에서 제외됐고 자녀는 학교에 다닐 수 없는 등 불이익이 가해졌다.

창씨개명의 강압 속에서도 애국 인사들을 중심으로 창씨개명 거부 운동이 펼쳐지기도 했으나 조선총독부는 유명인을 홍보에 이용하거나 권력기구를 동원해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그 결과 기한인 8월까지 창씨를 제출한 사람들은 322만 호로 전체 인구의 약 80%에 달했다.

2001년 2월 11일 - 정부 시화호 담수화 포기 발표

경기 안산시와 시흥시, 화성군에 걸쳐있는 시화호의 담수화 계획이 2001년 2월 11일 전면 백지화됐다. 정부는 반월공단의 폐수가 유입돼 오염이 심각했던 시화호를 바닷물이 드나드는 해수호로 유지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정부 관계자는 “당초 시화호는 간석지 농업용수로 공급될 예정이었으나 탄도호 등 내륙 저수지 수량으로도 용수 공급이 가능한 것으로 조사됐기 때문에 담수화하지 않고 바닷물을 통해 자연 정화되도록 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방조제가 세워져 시화, 안산지구 간석지를 적은 양의 흙으로 매립해 돈이 별로 들지 않아 경제적 손해도 별로 없다”고 설명했다.

시화호는 환경기초시설 완비에 앞서 94년 물막이 공사가 완료되면서 공장폐수가 유입돼 97년 호수의 화학적 산소요구량(COD)이 26¤(농업용수 기준은 8¤이하)까지 상승하는 등 최악의 수질오염을 보여왔다.

시화호에는 현재 조력발전소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2003년 2월 11일 - 서울시, 청계천 복원 기본 계획 발표

서울시가 2003년 2월 11일 ‘청계천 복원 기본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이 기본계획에 따라 청계천은 2003년 7월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했다. 복원사업 구간은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서 성동구 신답철교 에 이르는 5.8km 구간이었다.

2005년 10월 1일 2년여의 공사를 마치고 일반인에게 공개된 청계천은 도심 속 인공 하천으로 수많은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찾는 서울의 관광 명소로 탈바꿈했다.

최근에는 천연기념물 327호인 원앙이 발견되는 등 생태 환경도 크게 개선되어 서울시 조사 결과 복원전인 2003년 98종 보다 크게 늘어난 총 788종의 동식물이 청계천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8년 2월 11일 - 숭례문 전소 붕괴… 국보 1호 사라지다

설 연휴 마지막 날이었던 2008년 2월 10일 밤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에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했다. 50여 대의 소방차들이 밤늦게까지 진화작업을 벌였으나 불길이 잡히지 않았고 다음날인 11일 0시 반 경부터는 숭례문의 기와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소방당국은 불길을 잡기 위해 문화재청과 협의해 누각 일부의 지붕을 뜯어내기도 했지만 11일 새벽 2시경 2층 누각이 무너지면서 숭례문은 완전히 붕괴됐다.

숭례문은 현재 2012년 마무리를 목표로 복원공사 중이다. 이번 복원에서는 2008년 화재 당시 불에 타 사라진 2층 누각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사라진 숭례문 좌우 성곽의 일부도 되살릴 계획이다.

구성 / 편집 = 이철 동아닷컴 기자 kino27@donga.com

1896년 2월 11일 - 고종,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김(아관파천, 俄館播遷)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듬해인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경운궁(현 덕수궁)을 떠나 세자(순종)와 함께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아관파천, 俄館播遷. 노관파천(露館播遷) 이라고도 함). 친일세력에게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당시 일본과 대립하고 있던 러시아의 힘을 빌리고자 심야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거한 것이다.

아관파천 후 친일내각이 붕괴고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 등의 친일내각대신들이 시민들에게 살해됐으며 유길준, 조희연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이범진, 이완용 등을 중심으로 한 친러내각이 들어섰다.

아관파천은 1년여 간 지속되다가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끝났다. 환궁 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1897년 10월 12일 황제 즉위식을 통해 대한제국이 독립국가임을 대외에 선포했다.

1906년 2월 11일 -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경기가 열림

1906년 2월 11일,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전신) 야구팀과 독일어 학교팀이 겨룬 야구시합이 흥인지문 인근 훈련원 마동산에서 열렸다. 결과는 YMCA팀의 3점차 패배였다. 이 시합은 한국 최초의 공식 야구경기로 기록됐다.

YMCA 야구단은 황성기독교청년회 초대 총무 질레트의 노력으로 창설됐다. YMCA 야구단은 1912년 11월 일본 원정길에도 오르며 한국 스포츠 사상 최초의 해외원정을 시도하기도 했다. 야구 불모지였던 조선에 야구를 보급하며 화제를 뿌리던 YMCA 야구단은 1913년 해체됐다.

1940년 2월 11일 - 일제강점기 창씨개명 실시

일제강점기 일제의 황국신민(皇國臣民) 정책에 따라 창씨개명(일본식 성명으로 고치는 것)이 1940년 2월 11일을 시작으로 6개월간 실시됐다. 창시개명은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민족 말살정책의 하나다.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이 내선일체의 완성이라고 선전했다.

창씨하지 않는 사람들은 우선 징용 대상이 되거나 식량배급에서 제외됐고 자녀는 학교에 다닐 수 없는 등 불이익이 가해졌다.

창씨개명의 강압 속에서도 애국 인사들을 중심으로 창씨개명 거부 운동이 펼쳐지기도 했으나 조선총독부는 유명인을 홍보에 이용하거나 권력기구를 동원해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그 결과 기한인 8월까지 창씨를 제출한 사람들은 322만 호로 전체 인구의 약 80%에 달했다.

2001년 2월 11일 - 정부 시화호 담수화 포기 발표

경기 안산시와 시흥시, 화성군에 걸쳐있는 시화호의 담수화 계획이 2001년 2월 11일 전면 백지화됐다. 정부는 반월공단의 폐수가 유입돼 오염이 심각했던 시화호를 바닷물이 드나드는 해수호로 유지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정부 관계자는 “당초 시화호는 간석지 농업용수로 공급될 예정이었으나 탄도호 등 내륙 저수지 수량으로도 용수 공급이 가능한 것으로 조사됐기 때문에 담수화하지 않고 바닷물을 통해 자연 정화되도록 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방조제가 세워져 시화, 안산지구 간석지를 적은 양의 흙으로 매립해 돈이 별로 들지 않아 경제적 손해도 별로 없다”고 설명했다.

시화호는 환경기초시설 완비에 앞서 94년 물막이 공사가 완료되면서 공장폐수가 유입돼 97년 호수의 화학적 산소요구량(COD)이 26¤(농업용수 기준은 8¤이하)까지 상승하는 등 최악의 수질오염을 보여왔다.

시화호에는 현재 조력발전소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2003년 2월 11일 - 서울시, 청계천 복원 기본 계획 발표

서울시가 2003년 2월 11일 ‘청계천 복원 기본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이 기본계획에 따라 청계천은 2003년 7월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했다. 복원사업 구간은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서 성동구 신답철교 에 이르는 5.8km 구간이었다.

2005년 10월 1일 2년여의 공사를 마치고 일반인에게 공개된 청계천은 도심 속 인공 하천으로 수많은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찾는 서울의 관광 명소로 탈바꿈했다.

최근에는 천연기념물 327호인 원앙이 발견되는 등 생태 환경도 크게 개선되어 서울시 조사 결과 복원전인 2003년 98종 보다 크게 늘어난 총 788종의 동식물이 청계천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8년 2월 11일 - 숭례문 전소 붕괴… 국보 1호 사라지다

설 연휴 마지막 날이었던 2008년 2월 10일 밤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에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했다. 50여 대의 소방차들이 밤늦게까지 진화작업을 벌였으나 불길이 잡히지 않았고 다음날인 11일 0시 반 경부터는 숭례문의 기와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소방당국은 불길을 잡기 위해 문화재청과 협의해 누각 일부의 지붕을 뜯어내기도 했지만 11일 새벽 2시경 2층 누각이 무너지면서 숭례문은 완전히 붕괴됐다.

숭례문은 현재 2012년 마무리를 목표로 복원공사 중이다. 이번 복원에서는 2008년 화재 당시 불에 타 사라진 2층 누각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사라진 숭례문 좌우 성곽의 일부도 되살릴 계획이다.

구성 / 편집 = 이철 동아닷컴 기자 kino2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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