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행궁 복원현장 가보니

등록 2010.10.26.
“남한산성 굴욕의 역사 아니야”

남한산성 행궁 복원현장 가보니

돌계단에 쓰인 돌 가운데 새로 만든 것은 흰 색을 띠었고 옛것을 찾아 넣은 것은 짙은 회색을 띠었다. 기단에 사용된 새 돌들은 옛 돌들과 함께 건물을 지탱하고 있었다. 정문인 한남루의 장초석 앞과 뒤의 색깔이 달랐다. 앞의 옛 것은 남한산 초등학교에서 정문으로 사용하던 돌을 옮겨와 복원한 것이다.

복원을 감독하고 있는 노현균 학예연구사는 “발굴조사 때 나온 옛 원형을 최대한 그대로 살리며 복원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남한산성 행궁 복원은 옛것과 새것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다.

행궁은 조선국왕이 도성 밖으로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무는 곳이다.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을 대비해 왕실이 온전히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2000년부터 남한산성 성벽과 행궁 복원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10월 24일에는 행궁 하궐 복원이 완료돼 준공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문수 도지사는 “남한산성은 인조가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인 굴욕의 역사가 아닌 한 번도 외세에 함락당하지 않았던 호국의 역사”라고 의미를 뒀다.

1637년 조선은 청군에 맞서 남한산성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강화도로 피난 갔던 왕실가족이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47일간의 항전을 끝내고 성문을 열었다. 그는 삼전도에 나아가 청 태종에게 군신의 예를 갖추고 굴욕적으로 항복했다.

남한산성에는 두 가지 평이 있다. 하나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였던 굴욕의 장소라는 것, 하나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쳐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국난극복의 중심지 역할을 다한 역사의 현장이라는 것이다.



노현균 학예연구사는 “병자호란 당시 15배가 넘는 군사력과 신무기로 무장한 청군이 함락시키지 못한 곳이 바로 남한산성”이라며 “47일간 이곳에서 벌인 항전도 남한산성 복원과 함께 새롭게 조명돼야 한다”고 말했다.

청은 병자호란을 끝내며 화의조약을 맺을 때 ‘성곽을 새로 만들거나 고쳐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넣을 것을 강요했다. 남한산성에서 성문을 걸어 잠그고 일전을 벌였던 조선군을 청군은 충분히 두려워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기록이다.

조선은 조약을 지키지 않았다. 남한산성의 행궁과 성곽을 지속적으로 증축했다. 정조는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를 건립하고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참관하기도 했다. 남한산성 행궁은 전란에 대비한 조선 왕실 최후의 보루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행궁은 파괴됐다. 음식점이 들어서고 호텔이 생겼다. 일제는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역사 교육을 실시했다.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치욕의 역사는 커졌고 남한산성과 행궁의 역할은 격하됐다.

현재 남한산성은 주말에만 1만여 명이 찾는 관광지가 됐다. 하지만 이곳에서 역사의 자취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단풍을 보고 산성을 걷다가 닭백숙을 먹고 돌아간다. 남한산성 복원과 함께 역사적 기억도 함께 복원하는 것이 과제가 됐다.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은 행궁 복원 과정에서 산성 내에 흩어진 옛 석재를 최대한 많이 사용했다. 모자란 부분만 석재를 다듬어 새로 넣었다. 노현균 학예연구사는 “기록을 토대로 모조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정신까지 복원하는 것이 문화재 복원의 진정한 가치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궐 계단의 옛 돌이나 한남루의 바랜 초석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남한산성은 지난 1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되기 위한 첫 관문인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전체 복원이 완료되면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한걸음 더 다가서게 된다. 현재 행궁은 관람편의시설 공사와 건물에 대한 단청작업이 진행 중이다. 일반 관람객들에게는 2011년 말 공개될 예정이다.

이철 동아닷컴 기자 kino27@donga.com

“남한산성 굴욕의 역사 아니야”

남한산성 행궁 복원현장 가보니

돌계단에 쓰인 돌 가운데 새로 만든 것은 흰 색을 띠었고 옛것을 찾아 넣은 것은 짙은 회색을 띠었다. 기단에 사용된 새 돌들은 옛 돌들과 함께 건물을 지탱하고 있었다. 정문인 한남루의 장초석 앞과 뒤의 색깔이 달랐다. 앞의 옛 것은 남한산 초등학교에서 정문으로 사용하던 돌을 옮겨와 복원한 것이다.

복원을 감독하고 있는 노현균 학예연구사는 “발굴조사 때 나온 옛 원형을 최대한 그대로 살리며 복원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남한산성 행궁 복원은 옛것과 새것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다.

행궁은 조선국왕이 도성 밖으로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무는 곳이다.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을 대비해 왕실이 온전히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2000년부터 남한산성 성벽과 행궁 복원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10월 24일에는 행궁 하궐 복원이 완료돼 준공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문수 도지사는 “남한산성은 인조가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인 굴욕의 역사가 아닌 한 번도 외세에 함락당하지 않았던 호국의 역사”라고 의미를 뒀다.

1637년 조선은 청군에 맞서 남한산성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강화도로 피난 갔던 왕실가족이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47일간의 항전을 끝내고 성문을 열었다. 그는 삼전도에 나아가 청 태종에게 군신의 예를 갖추고 굴욕적으로 항복했다.

남한산성에는 두 가지 평이 있다. 하나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였던 굴욕의 장소라는 것, 하나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쳐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국난극복의 중심지 역할을 다한 역사의 현장이라는 것이다.



노현균 학예연구사는 “병자호란 당시 15배가 넘는 군사력과 신무기로 무장한 청군이 함락시키지 못한 곳이 바로 남한산성”이라며 “47일간 이곳에서 벌인 항전도 남한산성 복원과 함께 새롭게 조명돼야 한다”고 말했다.

청은 병자호란을 끝내며 화의조약을 맺을 때 ‘성곽을 새로 만들거나 고쳐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넣을 것을 강요했다. 남한산성에서 성문을 걸어 잠그고 일전을 벌였던 조선군을 청군은 충분히 두려워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기록이다.

조선은 조약을 지키지 않았다. 남한산성의 행궁과 성곽을 지속적으로 증축했다. 정조는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를 건립하고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참관하기도 했다. 남한산성 행궁은 전란에 대비한 조선 왕실 최후의 보루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행궁은 파괴됐다. 음식점이 들어서고 호텔이 생겼다. 일제는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역사 교육을 실시했다.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치욕의 역사는 커졌고 남한산성과 행궁의 역할은 격하됐다.

현재 남한산성은 주말에만 1만여 명이 찾는 관광지가 됐다. 하지만 이곳에서 역사의 자취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단풍을 보고 산성을 걷다가 닭백숙을 먹고 돌아간다. 남한산성 복원과 함께 역사적 기억도 함께 복원하는 것이 과제가 됐다.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은 행궁 복원 과정에서 산성 내에 흩어진 옛 석재를 최대한 많이 사용했다. 모자란 부분만 석재를 다듬어 새로 넣었다. 노현균 학예연구사는 “기록을 토대로 모조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정신까지 복원하는 것이 문화재 복원의 진정한 가치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궐 계단의 옛 돌이나 한남루의 바랜 초석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남한산성은 지난 1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되기 위한 첫 관문인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전체 복원이 완료되면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한걸음 더 다가서게 된다. 현재 행궁은 관람편의시설 공사와 건물에 대한 단청작업이 진행 중이다. 일반 관람객들에게는 2011년 말 공개될 예정이다.

이철 동아닷컴 기자 kino2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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