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코트의 신사` 하종화 감독

등록 2011.07.03.
배구가 전성기를 누리던 1991년 3월. 백구의 대제전으로 불리던 제8회 대통령배 대회에서 대학 팀이 실업 강호들을 잇달아 꺾고 우승했다. 배구 역사에 남을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최우수선수(MVP)로 뽑힌 주인공은 한양대 4학년이던 하종화였다. 대한항공 신영철 감독은 “요즘으로 치면 삼성화재 가빈처럼 코트를 지배했다”며 그를 회고했다. 이듬해 실업 현대에 입단해 3년 연속 백구의 대제전 베스트6에 뽑히며 ‘오빠 부대’를 몰고 다녔던 그가 오랜만에 팬들 앞에 나타났다. 하종화 감독(42)을 용인 현대캐피탈 체육관에서 만났다.

“언젠가 기회가 오면 친정에서 지도자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도 이렇게 빨리 감독을 맡을 줄은 몰랐습니다.”

하 감독은 2002년 12월, 10년 넘게 선수와 코치로 몸담았던 현대를 떠났다. 이듬해 1월부터 고향 진주에서 동명중-동명고 후배들을 가르쳐 온 그에게 올 봄 현대캐피탈로부터 연락이 왔다. 감독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많이 고민 했습니다. 저를 믿고 자식들을 맡겨준 학부모님들, 그리고 함께 고생해 온 제자들을 생각하니 쉽게 결정할 수 없었어요.”

고민은 깊었지만 길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좋은 기회가 왔다”며 되레 그의 마음을 가볍게 해줬다. 그가 그동안 모교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현대캐피탈은 삼성화재와 함께 한국 배구를 대표해 온 양대 산맥이다. 그러나 최근 4년은 삼성화재의 시대였다. 현대캐피탈이 계약 기간 2년이 남은 김호철 감독을 일선에게 물러나게 한 것은 팀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 자리를 프로 지도자 경험이 없는 하 감독이 대신한 것에 대해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될 사람이 됐다”고 잘라 말한다.

“기술적인 면에서야 프로 팀과 고교 팀이 많이 다르겠죠. 그러나 배구의 기본은 어디서나 똑같습니다. 게다가 모든 것을 챙겨줘야 하는 학생들과 달리 프로 선수들은 큰 틀만 잡아 주면 알아서 판단할 것이라 믿어요. 그래도 선수들이 너무 급격한 변화를 느끼지 않도록 코치들은 그대로 갈 겁니다.”

선수 때 91~92kg, 현대 코치 시절 97~98kg이었던 하 감독의 체중은 고교 감독 생활을 하며 110kg까지 늘었다. 예전의 날렵했던 모습은 찾기 힘들다.

“지역 사회가 좁지 않습니까. ‘한 잔 하자’며 자리를 권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게 다 정인데 거절할 수 없죠. 그러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하하.”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선배들의 권유로 일찍 결혼한 하 감독은 3녀 1남의 아버지다. 고교 1학년인 큰 딸과 중학교 3학년인 둘째 딸은 진주에서 배구 선수로 뛰고 있다. 본인이 운동선수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알 텐데 두 딸에게 왜 배구를 시키느냐고 물었다.

“배구를 하라고 먼저 얘기한 적은 없어요. 둘째가 초등학교 때 우연히 배구를 시작했고 나중에 언니가 동생이 뛰는 걸 보고 자기도 하겠다고 했어요. 평범하게 키우고 싶다는 아내를 그때는 제가 설득했습니다. 하고 싶은 건 하게 해주자고요. 물론 힘들겠지요. 그래도 세상에 공짜로 되는 게 뭐 있습니까. 뭐든 얻으려면 땀을 흘려야 합니다. 과정이 고될수록 열매는 값지니까요.”

하 감독은 선수 시절 매너가 좋아 ‘코트의 신사’로 통했다. 신사답게 말도 차분하고 조리 있게 잘 한다. 그런 그가 인터뷰 내내 강조한 것은 화합, 기본, 그리고 땀이었다.

“어려운 시기에 팀을 맡았지만 현대캐피탈은 전통의 배구 명가입니다. 선수들과 함께 새로운 각오로 꼭 우승을 할 겁니다.”

최근의 현대캐피탈은 스타는 많아도 잘 뭉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 감독은 이를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팀 관계자는 “선수들이 어느 해보다 땀을 많이 흘릴 것 같다”고 말했다. 부임 첫 해 우승을 장담하는 ‘코트의 신사’는 ‘코트의 명장’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배구가 전성기를 누리던 1991년 3월. 백구의 대제전으로 불리던 제8회 대통령배 대회에서 대학 팀이 실업 강호들을 잇달아 꺾고 우승했다. 배구 역사에 남을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최우수선수(MVP)로 뽑힌 주인공은 한양대 4학년이던 하종화였다. 대한항공 신영철 감독은 “요즘으로 치면 삼성화재 가빈처럼 코트를 지배했다”며 그를 회고했다. 이듬해 실업 현대에 입단해 3년 연속 백구의 대제전 베스트6에 뽑히며 ‘오빠 부대’를 몰고 다녔던 그가 오랜만에 팬들 앞에 나타났다. 하종화 감독(42)을 용인 현대캐피탈 체육관에서 만났다.

“언젠가 기회가 오면 친정에서 지도자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도 이렇게 빨리 감독을 맡을 줄은 몰랐습니다.”

하 감독은 2002년 12월, 10년 넘게 선수와 코치로 몸담았던 현대를 떠났다. 이듬해 1월부터 고향 진주에서 동명중-동명고 후배들을 가르쳐 온 그에게 올 봄 현대캐피탈로부터 연락이 왔다. 감독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많이 고민 했습니다. 저를 믿고 자식들을 맡겨준 학부모님들, 그리고 함께 고생해 온 제자들을 생각하니 쉽게 결정할 수 없었어요.”

고민은 깊었지만 길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좋은 기회가 왔다”며 되레 그의 마음을 가볍게 해줬다. 그가 그동안 모교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현대캐피탈은 삼성화재와 함께 한국 배구를 대표해 온 양대 산맥이다. 그러나 최근 4년은 삼성화재의 시대였다. 현대캐피탈이 계약 기간 2년이 남은 김호철 감독을 일선에게 물러나게 한 것은 팀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 자리를 프로 지도자 경험이 없는 하 감독이 대신한 것에 대해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될 사람이 됐다”고 잘라 말한다.

“기술적인 면에서야 프로 팀과 고교 팀이 많이 다르겠죠. 그러나 배구의 기본은 어디서나 똑같습니다. 게다가 모든 것을 챙겨줘야 하는 학생들과 달리 프로 선수들은 큰 틀만 잡아 주면 알아서 판단할 것이라 믿어요. 그래도 선수들이 너무 급격한 변화를 느끼지 않도록 코치들은 그대로 갈 겁니다.”

선수 때 91~92kg, 현대 코치 시절 97~98kg이었던 하 감독의 체중은 고교 감독 생활을 하며 110kg까지 늘었다. 예전의 날렵했던 모습은 찾기 힘들다.

“지역 사회가 좁지 않습니까. ‘한 잔 하자’며 자리를 권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게 다 정인데 거절할 수 없죠. 그러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하하.”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선배들의 권유로 일찍 결혼한 하 감독은 3녀 1남의 아버지다. 고교 1학년인 큰 딸과 중학교 3학년인 둘째 딸은 진주에서 배구 선수로 뛰고 있다. 본인이 운동선수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알 텐데 두 딸에게 왜 배구를 시키느냐고 물었다.

“배구를 하라고 먼저 얘기한 적은 없어요. 둘째가 초등학교 때 우연히 배구를 시작했고 나중에 언니가 동생이 뛰는 걸 보고 자기도 하겠다고 했어요. 평범하게 키우고 싶다는 아내를 그때는 제가 설득했습니다. 하고 싶은 건 하게 해주자고요. 물론 힘들겠지요. 그래도 세상에 공짜로 되는 게 뭐 있습니까. 뭐든 얻으려면 땀을 흘려야 합니다. 과정이 고될수록 열매는 값지니까요.”

하 감독은 선수 시절 매너가 좋아 ‘코트의 신사’로 통했다. 신사답게 말도 차분하고 조리 있게 잘 한다. 그런 그가 인터뷰 내내 강조한 것은 화합, 기본, 그리고 땀이었다.

“어려운 시기에 팀을 맡았지만 현대캐피탈은 전통의 배구 명가입니다. 선수들과 함께 새로운 각오로 꼭 우승을 할 겁니다.”

최근의 현대캐피탈은 스타는 많아도 잘 뭉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 감독은 이를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팀 관계자는 “선수들이 어느 해보다 땀을 많이 흘릴 것 같다”고 말했다. 부임 첫 해 우승을 장담하는 ‘코트의 신사’는 ‘코트의 명장’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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