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천지가 물바다, 서울- 그 끔찍했던 순간

등록 2011.07.11.
1972년 8월 19일, 이날 서울에서는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두 번째 큰 기록을 세우는 대 홍수가 났다. 이틀 동안 450mm가 넘는 비가 내려 한강이 범람했다.

성동구 동대문구 성북구 영등포구 마포구 용상구 등 한강과 개천 인근의 대부분의 구역에 긴급 대피령이 내려졌고, 특히 망원동 일대는 범람한 한강물에 의해 완전히 물에 잠겨 지붕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의 피해로 서울에서 집계된 사망자만 200명을 넘어섰고, 3백 70명의 실종자와 백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송신기재의 침수로 재난을 전해야할 방송국이 방송을 중단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다음은 당시 한강인도교 관측소에서 근무하던 수위측정관 안주용 중위가 19일 밤을 전후 24시간동안 체험을 역은 보고서다.



흙탕물 속에 어린이 시체, 온천지가 물바다, 그 한가운데 내가 서있다.

폭우가 억수 같은 한강 인도교 밑. 시야하나 가득히 소용돌이치며 아우성치며 도도히 흘러내리는 탁류, 그물경위에 어린아이 하나가 떴다 잠겼다 하며 떠내려간다. 참으로 대자연의 횡포 앞에 인간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 손만 뻗으면 금세 잡힐 듯 한 어린 생명을 눈앞에 보고도 발만 굴러야 하다니...

한강에 물이차면 인도교 옆 난간에 매달려 있는 한 평 남짓한 판자초소 안에서 계기가 그려주는 수위를 지켜봐야하는 나는 팔월의 한강을 온통 삼켜버린 거대한 불가항력 앞에 내동댕이쳐진 미물과도 같았다.

19일 새벽, 들어붓는 빗소리에 눈을 뜬 나는 마치 하들의 심판이 아닌가 싶었다. 오전 9시경. 급격히 불어나고 있는 수위는 이미 경계수위 8.5m를 훨씬 넘어 9.7을 가리키고, 시뻘건 흙탕물이 중지도를 반쯤 삼키고 있지 않은가.

오전 10시. 한 시간에 34cm가 불어나 10m를 그리고 있다. 용케도 버티고 있는 교각을 살피던 나는 사람 머리 같은 물체가 상류로부터 떠내려 오는 것을 보았다. 7-8세가량 된 어린아이였다. 풍덩 뛰어들어 구출해 내고 싶은 충동에 몸을 떨며 두발만 동동 구르는 사이, 생사조차 확인할 틈도 없이 어린 희생자는 금방 하류로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오전 11시. 10m28cm, 이렇게 불어난다면 큰일이다. 시시각각으로 치솟기 만하는 계수기의 그래프를 지켜보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길한 생각에 몸서리 쳐졌다. 끝없는 불안으로 해서 초소가 다리와 함께 금방 탁류에 휩쓸릴 것만 같아 몸은 저절로 떨려왔다.

정오. 드디어 위험수위 10.5m를 돌파, 기어이 한강에 적신호가 내린 것이다. 차량 통행은 금지되고 곳곳에서 쏟아낸 물난리는 수십 명의 인명을 빼앗고도 모자라 계속 번지고 있다.

오후 1시. 수위가 불어나는 속도가 약간 느려졌다. 10m68cm. 우리 집은 어떻게 됐을까. 돌을 갓 지난 딸의 재롱이 눈에 선하다. 왜 이려 나쁜 생각에만 사로잡힐까.

오후 2시. 수위는 불어나고 있지만 비는 그쳤다. 위험수위는 넘어섰어도 이 다리가 물속에 잠기려면 아직 3m가 남았다 이 3m가 서울 시민에겐 얼마나 중요한가. 흙탕물 위에 통나무 드럼통 호박 등이 많이 떠내려 오고 돼지도 물속에서 출렁이며 인천바다로 떠내려간다.

밤 9시. 수위는 피크를 이룬 10m24. 지금까지 꾸준히 움직이던 계기의 끝이 계속 맴돌기를 약 30분간. 어둠이 깔린 서울의 야경도 수마가 할퀸 거대한 악마의 도시같이 보였다.

밤 10시. 늘어나기만 하던 수위가 드디어 고개를 숙였다. 1924년 한강 수위를 특정하기 시작한 이래 1925년에 이어 두 번째로 최고수위를 가리켰던 수위 측정기가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홍수와 대결한지 만 24시간. 어둠이 걷히자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게 개고 물소리고 숨을 죽이는 것 같아 아직도 어제의 잔해는 떠내려 오고 있지만 끝까지 버텨준 교각이 한결 튼튼해 보이고 대견스럽기만 했다.



영상출처= KTV 영상역사관

정리= 박태근 기자 ptk@donga.com

1972년 8월 19일, 이날 서울에서는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두 번째 큰 기록을 세우는 대 홍수가 났다. 이틀 동안 450mm가 넘는 비가 내려 한강이 범람했다.

성동구 동대문구 성북구 영등포구 마포구 용상구 등 한강과 개천 인근의 대부분의 구역에 긴급 대피령이 내려졌고, 특히 망원동 일대는 범람한 한강물에 의해 완전히 물에 잠겨 지붕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의 피해로 서울에서 집계된 사망자만 200명을 넘어섰고, 3백 70명의 실종자와 백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송신기재의 침수로 재난을 전해야할 방송국이 방송을 중단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다음은 당시 한강인도교 관측소에서 근무하던 수위측정관 안주용 중위가 19일 밤을 전후 24시간동안 체험을 역은 보고서다.



흙탕물 속에 어린이 시체, 온천지가 물바다, 그 한가운데 내가 서있다.

폭우가 억수 같은 한강 인도교 밑. 시야하나 가득히 소용돌이치며 아우성치며 도도히 흘러내리는 탁류, 그물경위에 어린아이 하나가 떴다 잠겼다 하며 떠내려간다. 참으로 대자연의 횡포 앞에 인간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 손만 뻗으면 금세 잡힐 듯 한 어린 생명을 눈앞에 보고도 발만 굴러야 하다니...

한강에 물이차면 인도교 옆 난간에 매달려 있는 한 평 남짓한 판자초소 안에서 계기가 그려주는 수위를 지켜봐야하는 나는 팔월의 한강을 온통 삼켜버린 거대한 불가항력 앞에 내동댕이쳐진 미물과도 같았다.

19일 새벽, 들어붓는 빗소리에 눈을 뜬 나는 마치 하들의 심판이 아닌가 싶었다. 오전 9시경. 급격히 불어나고 있는 수위는 이미 경계수위 8.5m를 훨씬 넘어 9.7을 가리키고, 시뻘건 흙탕물이 중지도를 반쯤 삼키고 있지 않은가.

오전 10시. 한 시간에 34cm가 불어나 10m를 그리고 있다. 용케도 버티고 있는 교각을 살피던 나는 사람 머리 같은 물체가 상류로부터 떠내려 오는 것을 보았다. 7-8세가량 된 어린아이였다. 풍덩 뛰어들어 구출해 내고 싶은 충동에 몸을 떨며 두발만 동동 구르는 사이, 생사조차 확인할 틈도 없이 어린 희생자는 금방 하류로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오전 11시. 10m28cm, 이렇게 불어난다면 큰일이다. 시시각각으로 치솟기 만하는 계수기의 그래프를 지켜보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길한 생각에 몸서리 쳐졌다. 끝없는 불안으로 해서 초소가 다리와 함께 금방 탁류에 휩쓸릴 것만 같아 몸은 저절로 떨려왔다.

정오. 드디어 위험수위 10.5m를 돌파, 기어이 한강에 적신호가 내린 것이다. 차량 통행은 금지되고 곳곳에서 쏟아낸 물난리는 수십 명의 인명을 빼앗고도 모자라 계속 번지고 있다.

오후 1시. 수위가 불어나는 속도가 약간 느려졌다. 10m68cm. 우리 집은 어떻게 됐을까. 돌을 갓 지난 딸의 재롱이 눈에 선하다. 왜 이려 나쁜 생각에만 사로잡힐까.

오후 2시. 수위는 불어나고 있지만 비는 그쳤다. 위험수위는 넘어섰어도 이 다리가 물속에 잠기려면 아직 3m가 남았다 이 3m가 서울 시민에겐 얼마나 중요한가. 흙탕물 위에 통나무 드럼통 호박 등이 많이 떠내려 오고 돼지도 물속에서 출렁이며 인천바다로 떠내려간다.

밤 9시. 수위는 피크를 이룬 10m24. 지금까지 꾸준히 움직이던 계기의 끝이 계속 맴돌기를 약 30분간. 어둠이 깔린 서울의 야경도 수마가 할퀸 거대한 악마의 도시같이 보였다.

밤 10시. 늘어나기만 하던 수위가 드디어 고개를 숙였다. 1924년 한강 수위를 특정하기 시작한 이래 1925년에 이어 두 번째로 최고수위를 가리켰던 수위 측정기가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홍수와 대결한지 만 24시간. 어둠이 걷히자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게 개고 물소리고 숨을 죽이는 것 같아 아직도 어제의 잔해는 떠내려 오고 있지만 끝까지 버텨준 교각이 한결 튼튼해 보이고 대견스럽기만 했다.



영상출처= KTV 영상역사관

정리= 박태근 기자 pt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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