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복서-9> “대한민국 최고의 복서? 바로 나!”

등록 2012.06.01.

“다른 챔피언들이 자기 자신을 대한민국 최고의 복서라고 하는 것에 대해 전 인정안합니다. 월드컵대회 우승,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아시안게임 2연패, 프로에서 두 체급 챔피언 석권...경력으로 보나 전적으로 보나 대한민국 최고의 복서는 접니다.”

전 WBA 밴텀급,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문성길의 말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아마와 프로 무대를 모두 석권한 자타공인 최고의 복서였다. 매서운 그의 주먹에 상대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22전 20승(16ko) 2패. 한국 프로복싱 사상 경량급에서 가장 매서운 주먹을 가진 하드펀처였다.

링을 동경한 장거리 육상선수
문성길이 처음 운동을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다. 3000미터 육상 선수로 출전해 교내대회에 이어 군 대회에서도 우승한 문성길은 전남체육고등학교에 체육특기생으로 진학을 하려고 입학시험을 쳤다가 중도 포기했다.

“군 수준하고 광주 수준하고 완전히 다르더라구요. 400미터 트랙 한 바퀴 차이가 나서 그냥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육상으로는 안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문성길은 복싱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그는 유제두 선수의 복싱 경기가 열리면 중계방송을 보러 산골길을 3~4km를 걸어 갈 정도로 열렬한 복싱팬이었다. 그래서 복싱부가 있는 목포 덕인고에 입학해 복싱을 시작했다. 육상 특기생으로 입학했기 때문에 육상 훈련을 거를 수는 없었다. 오전에 정규수업을 마치면 오후에 육상 훈련을 하고, 저녁에 복싱훈련을 했다. 밤 12시가 다 돼서야 고단한 몸을 누일 수 있는 힘든 일과였다. 그러나 문성길은 하루도 훈련을 거르지 않았다. 그 성과는 3년이 지나서야 나타나기 시작했다.

적수가 없던 아마시절
대학교 입학 직전 국가대표로 선발된 문성길은 처음 출전한 킹스컵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그 해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는 금메달을 땄다. LA올림픽에서는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던 선수들을 연달아 꺾었지만 불운하게도 부상을 당하며 탈락하고 만다. 그러나 이후 그를 가로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서울 월드컵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문성길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따며 아시안 게임 2연패를 달성했다. 그 해 11월에는 우리나라 선수로는 처음으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에게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국가대표를 5년이나 했어요. 금메달을 목표로 2년을 더 기다려 88년 서울 올림픽 금메달을 노릴 것인지, 프로로 전향 할 것인지 고민을 했습니다. 결론은 프로 전향이었죠. 아마에서 이룰 건 다 이뤘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고의 주먹이었던 문성길에게는 프로모터들의 프로 전향 제의가 끊이지 않았다. 아마에 남았을 때 2년 뒤에도 절정의 기량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결국 문성길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계약금인 7천만원을 받으며 화려하게 프로로 전향했다.

굴욕감 딛고 세계 챔피언 등극
아마 시절 최고의 명성을 쌓았던 문성길은 프로모터와 계약하자마자 노예가 되어버린 듯한 굴욕감을 맛봐야했다.

“그 프로모터의 아파트에 가니까 불독같이 생긴 프로모터 남편이 ‘야 너도 이리와’ 하더라구요. 그러더니 안마를 하래요. 그래서 했습니다. 누가 오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습니다.”

프로모터와 선수의 관계는 노예문서와도 같았다. 프로모터에게 밉보이면 시합이 잡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계약금도 분할해 받기로 했던터라 남은 계약금을 받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지시에 무조건 따라야했다. 같은 프로모션에 속한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여곡절 끝에 프로에 데뷔한 문성길은 7전만에 WBA 밴텀급 세계챔피언을 따내며 아마에서의 명성을 증명해냈다. 3차 방어전에서 타이틀을 잃었지만 이번엔 한 체급을 내려 WBC슈퍼플라이급 챔피언에 올랐다. 10차 방어에서 호세 루이스 부에노에게 석연치 않은 판정패를 당하며 타이틀을 잃은 문성길은 프로모터와의 불화로 링을 떠났다.

“그 때 제가 이긴 경기였어요. 다운도 한 번 시켰고, 홈이었고...판정에서 질 경기가 아닌데 제가 졌다고 나왔습니다. 링에서 내려오자마자 프로모터가 ‘난 니 대전료 모른다’ 하면서 손사래를 치면서 도망가더라구요. 나중에 매니저한테 대전료를 줬다는데 매니저는 해외로 도망갔고 저는 더 이상 복싱을 할 이유가 없었어요.”

한국 최고의 복서? 바로 나
문성길의 전적에서 패배는 단 2패뿐이다. 경기내용에서 압도하고도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패했던 부에노 전을 제외하고 남은 1패는 카오코 갤럭시와의 2차전에서 당한 것이다. 갤럭시는 1차전에서 문성길에게 WBA챔피언을 내주고 2차전에서 도로 가져갔다.

“그 때 경기가 태국에서 열렸는데 날이 너무 더워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몸을 생각하면 경기를 하지 말았어야했는데 그냥 강행했다가 판정으로 졌죠. 카오코는 제가 제 컨디션이었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였습니다”

문성길은 현역시절 전 세계에서 자신의 기량을 능가한 선수는 없었노라고 단언한다. 아마추어와 프로에서 쌓은 경력이 그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싱을 떠난 지금도 후회와 미련은 없다고 말했다.

“미련 그런 거 하나도 없어요. 해볼 거 다해봤고 이룰 거 다 이뤘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복서는 나다’ 이렇게 생각하고 다닙니다.”

백완종 동아닷컴 기자 100pd@donga.com영광의 복서-1. 홍수환편 보러가기 영광의 복서-2. 장정구편 보러가기 영광의 복서-3. 박종팔편 보러가기 영광의 복서-4. 백인철편 보러가기 영광의 복서-5. 유명우편 보러가기


“다른 챔피언들이 자기 자신을 대한민국 최고의 복서라고 하는 것에 대해 전 인정안합니다. 월드컵대회 우승,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아시안게임 2연패, 프로에서 두 체급 챔피언 석권...경력으로 보나 전적으로 보나 대한민국 최고의 복서는 접니다.”

전 WBA 밴텀급,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문성길의 말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아마와 프로 무대를 모두 석권한 자타공인 최고의 복서였다. 매서운 그의 주먹에 상대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22전 20승(16ko) 2패. 한국 프로복싱 사상 경량급에서 가장 매서운 주먹을 가진 하드펀처였다.

링을 동경한 장거리 육상선수
문성길이 처음 운동을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다. 3000미터 육상 선수로 출전해 교내대회에 이어 군 대회에서도 우승한 문성길은 전남체육고등학교에 체육특기생으로 진학을 하려고 입학시험을 쳤다가 중도 포기했다.

“군 수준하고 광주 수준하고 완전히 다르더라구요. 400미터 트랙 한 바퀴 차이가 나서 그냥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육상으로는 안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문성길은 복싱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그는 유제두 선수의 복싱 경기가 열리면 중계방송을 보러 산골길을 3~4km를 걸어 갈 정도로 열렬한 복싱팬이었다. 그래서 복싱부가 있는 목포 덕인고에 입학해 복싱을 시작했다. 육상 특기생으로 입학했기 때문에 육상 훈련을 거를 수는 없었다. 오전에 정규수업을 마치면 오후에 육상 훈련을 하고, 저녁에 복싱훈련을 했다. 밤 12시가 다 돼서야 고단한 몸을 누일 수 있는 힘든 일과였다. 그러나 문성길은 하루도 훈련을 거르지 않았다. 그 성과는 3년이 지나서야 나타나기 시작했다.

적수가 없던 아마시절
대학교 입학 직전 국가대표로 선발된 문성길은 처음 출전한 킹스컵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그 해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는 금메달을 땄다. LA올림픽에서는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던 선수들을 연달아 꺾었지만 불운하게도 부상을 당하며 탈락하고 만다. 그러나 이후 그를 가로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서울 월드컵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문성길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따며 아시안 게임 2연패를 달성했다. 그 해 11월에는 우리나라 선수로는 처음으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에게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국가대표를 5년이나 했어요. 금메달을 목표로 2년을 더 기다려 88년 서울 올림픽 금메달을 노릴 것인지, 프로로 전향 할 것인지 고민을 했습니다. 결론은 프로 전향이었죠. 아마에서 이룰 건 다 이뤘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고의 주먹이었던 문성길에게는 프로모터들의 프로 전향 제의가 끊이지 않았다. 아마에 남았을 때 2년 뒤에도 절정의 기량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결국 문성길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계약금인 7천만원을 받으며 화려하게 프로로 전향했다.

굴욕감 딛고 세계 챔피언 등극
아마 시절 최고의 명성을 쌓았던 문성길은 프로모터와 계약하자마자 노예가 되어버린 듯한 굴욕감을 맛봐야했다.

“그 프로모터의 아파트에 가니까 불독같이 생긴 프로모터 남편이 ‘야 너도 이리와’ 하더라구요. 그러더니 안마를 하래요. 그래서 했습니다. 누가 오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습니다.”

프로모터와 선수의 관계는 노예문서와도 같았다. 프로모터에게 밉보이면 시합이 잡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계약금도 분할해 받기로 했던터라 남은 계약금을 받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지시에 무조건 따라야했다. 같은 프로모션에 속한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여곡절 끝에 프로에 데뷔한 문성길은 7전만에 WBA 밴텀급 세계챔피언을 따내며 아마에서의 명성을 증명해냈다. 3차 방어전에서 타이틀을 잃었지만 이번엔 한 체급을 내려 WBC슈퍼플라이급 챔피언에 올랐다. 10차 방어에서 호세 루이스 부에노에게 석연치 않은 판정패를 당하며 타이틀을 잃은 문성길은 프로모터와의 불화로 링을 떠났다.

“그 때 제가 이긴 경기였어요. 다운도 한 번 시켰고, 홈이었고...판정에서 질 경기가 아닌데 제가 졌다고 나왔습니다. 링에서 내려오자마자 프로모터가 ‘난 니 대전료 모른다’ 하면서 손사래를 치면서 도망가더라구요. 나중에 매니저한테 대전료를 줬다는데 매니저는 해외로 도망갔고 저는 더 이상 복싱을 할 이유가 없었어요.”

한국 최고의 복서? 바로 나
문성길의 전적에서 패배는 단 2패뿐이다. 경기내용에서 압도하고도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패했던 부에노 전을 제외하고 남은 1패는 카오코 갤럭시와의 2차전에서 당한 것이다. 갤럭시는 1차전에서 문성길에게 WBA챔피언을 내주고 2차전에서 도로 가져갔다.

“그 때 경기가 태국에서 열렸는데 날이 너무 더워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몸을 생각하면 경기를 하지 말았어야했는데 그냥 강행했다가 판정으로 졌죠. 카오코는 제가 제 컨디션이었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였습니다”

문성길은 현역시절 전 세계에서 자신의 기량을 능가한 선수는 없었노라고 단언한다. 아마추어와 프로에서 쌓은 경력이 그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싱을 떠난 지금도 후회와 미련은 없다고 말했다.

“미련 그런 거 하나도 없어요. 해볼 거 다해봤고 이룰 거 다 이뤘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복서는 나다’ 이렇게 생각하고 다닙니다.”

백완종 동아닷컴 기자 100pd@donga.com영광의 복서-1. 홍수환편 보러가기 영광의 복서-2. 장정구편 보러가기 영광의 복서-3. 박종팔편 보러가기 영광의 복서-4. 백인철편 보러가기 영광의 복서-5. 유명우편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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