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전거부 해프닝 북한...태극기 걸던 시절

등록 2012.07.31.

지난 26일, 올림픽 여자축구 조별 예선 북한-콜롬비아 경기에 앞서 경기장 전광판에 인공기 대신 태극기가 등장한 일이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북한 대표팀은 경기장 입장을 거부하고 라커룸으로 돌아갔다. 경기는 한 시간 이상 지연됐고 북한 선수단은 이에 대한 항의로 개막식에 대형 인공기 펼치고 입장했다. 분단의 현실이 빚어낸 씁쓸한 장면이었다. 언제부터 북한은 태극기 대신 인공기를 사용하게 됐을까?
[김일성과 태극기]

1945년 8월15일, 일장기가 내려가고 이 땅에 휘날린 태극기는 3천만 겨레 모두에게 조국광복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이 때 까지 태극기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국기였다. 소련의 지지를 받으며 등장한 김일성도 초기에는 태극기를 사용했다. 1945년 10월 김일성이 북한 주민들 앞에 첫 선을 보였을 때도, 45년 12월 김일성 평양시민 환영대회에도, 48년 4월 남북 협상 때도 인민위가 주최한 각종 행사에는 태극기가 게양됐다.
[제1회 조선로동당 전당대회에서 연설중인 김일성]

소비에트화와 공산정부 수립 작업이 마무리돼 가던 시점 김일성은 태극기를 대신할 새 국기 제작에 착수했다. 그들은 태극기 폐지 이유에 대해 △‘미 군정청이 권유 하고 있으므로 새 민주주의 국가에는 맞지 않으며, △태극기의 근거인 주역은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이며, △도형이 난해하다고 주장했다.
[제1회 조선로동당 전당대회]

사실 인공기 제정과정에서 태극기 존속을 주장하는 인민회의 대의원도 있었으나 공산주의에 대한 충성을 보이려는 김일성의 야망이 절대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태극기의 폐지와 새 국기 제정에 앞장선 김두봉(1890?~1960?)은 인공기가 김일성의 직접적인 교시를 받아 도안됐다고 말하고 있으나, 당시 소련에서 북한으로 파견돼 북한기 제작과정에 통역으로 참여했던 재러시아교포 박일 씨는 “북한이 자체 제작한 것이 아니라 구소련에 의해 만들어 졌다”고 증언했다.
[46년 북조선 로동당 창립대회]

1948년 5월1일 노동절 기념식장에서 태극기와 김일성 초상화가 나란히 내걸린 것을 끝으로 태극기는 북한 땅에서 자취를 감췄다. 7월10일 인민회의 제5차 회의석상에 인공기가 최초로 게양됐으며, 9월9일 국가 창건이 선포됨과 동시에 인공기가 공식 사용되기 시작했다.
[46년 11월 북한 최초 선거인 인민위원회 선거 투표장에서 김일성]
46년 북조선 인민위원회 회의]
[46년 북한의 인미위원회 선거투표소에 걸린 태극기]
[46년 평양 군중대회에 펼쳐진 태극기]
[48년 인민군 창건식]
[김두봉 로동당 위원장]
[46년 11월 북한인민위원회 선거장면]
[46년 11월 북한인민위원회 선거장면]
[조선인민군 창군 기념일]


지난 26일, 올림픽 여자축구 조별 예선 북한-콜롬비아 경기에 앞서 경기장 전광판에 인공기 대신 태극기가 등장한 일이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북한 대표팀은 경기장 입장을 거부하고 라커룸으로 돌아갔다. 경기는 한 시간 이상 지연됐고 북한 선수단은 이에 대한 항의로 개막식에 대형 인공기 펼치고 입장했다. 분단의 현실이 빚어낸 씁쓸한 장면이었다. 언제부터 북한은 태극기 대신 인공기를 사용하게 됐을까?
[김일성과 태극기]

1945년 8월15일, 일장기가 내려가고 이 땅에 휘날린 태극기는 3천만 겨레 모두에게 조국광복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이 때 까지 태극기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국기였다. 소련의 지지를 받으며 등장한 김일성도 초기에는 태극기를 사용했다. 1945년 10월 김일성이 북한 주민들 앞에 첫 선을 보였을 때도, 45년 12월 김일성 평양시민 환영대회에도, 48년 4월 남북 협상 때도 인민위가 주최한 각종 행사에는 태극기가 게양됐다.
[제1회 조선로동당 전당대회에서 연설중인 김일성]

소비에트화와 공산정부 수립 작업이 마무리돼 가던 시점 김일성은 태극기를 대신할 새 국기 제작에 착수했다. 그들은 태극기 폐지 이유에 대해 △‘미 군정청이 권유 하고 있으므로 새 민주주의 국가에는 맞지 않으며, △태극기의 근거인 주역은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이며, △도형이 난해하다고 주장했다.
[제1회 조선로동당 전당대회]

사실 인공기 제정과정에서 태극기 존속을 주장하는 인민회의 대의원도 있었으나 공산주의에 대한 충성을 보이려는 김일성의 야망이 절대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태극기의 폐지와 새 국기 제정에 앞장선 김두봉(1890?~1960?)은 인공기가 김일성의 직접적인 교시를 받아 도안됐다고 말하고 있으나, 당시 소련에서 북한으로 파견돼 북한기 제작과정에 통역으로 참여했던 재러시아교포 박일 씨는 “북한이 자체 제작한 것이 아니라 구소련에 의해 만들어 졌다”고 증언했다.
[46년 북조선 로동당 창립대회]

1948년 5월1일 노동절 기념식장에서 태극기와 김일성 초상화가 나란히 내걸린 것을 끝으로 태극기는 북한 땅에서 자취를 감췄다. 7월10일 인민회의 제5차 회의석상에 인공기가 최초로 게양됐으며, 9월9일 국가 창건이 선포됨과 동시에 인공기가 공식 사용되기 시작했다.
[46년 11월 북한 최초 선거인 인민위원회 선거 투표장에서 김일성]
46년 북조선 인민위원회 회의]
[46년 북한의 인미위원회 선거투표소에 걸린 태극기]
[46년 평양 군중대회에 펼쳐진 태극기]
[48년 인민군 창건식]
[김두봉 로동당 위원장]
[46년 11월 북한인민위원회 선거장면]
[46년 11월 북한인민위원회 선거장면]
[조선인민군 창군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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