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내일 죽는다면… 시 한 편을 더 써야지
등록 2012.08.21.생은 느긋하지 않으나 여생이란 느긋해야 할 터. 나는 아직껏 느긋할 줄 모른다.
처서(處暑) 뒤이므로 아침저녁 옷깃 언저리가 서늘하다. 한낮의 빨래들도 따가운 햇살을 받아 아이들처럼 좋아라 하며 건들바람 한 자락에도 앞장서서 펄럭인다.
올여름은 폭우의 여름이었다. 이런 폭우의 연속에는 꾀꼬리는커녕 뻐꾸기와 매미의 집요한 울음소리도 거의 꼼짝달싹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인명도 축나고 축대도 무너지고 농사도 거덜 났다. 막일꾼들도 일할 곳이 없어 굶주렸다. 나의 서재에서도 쌓아둔 책들이 습기에 부풀어 몇 차례 허물어졌다. ‘세계 도처에서 꿀벌들이 죽어가고 있다. 시(詩)가 죽어가고 있다’라고 며칠 전의 일기에 썼다.
인터넷 언어에 경어체나 만연체의 격식 있는 문장 따위는 갈수록 진부해져 간다. 주어 없는 국어, 경어의 국어 그리고 말의 처음부터 끝까지 알알이 표현이 따라붙어야 한마디 말이 성립되는 우리네 교착어도 이제는 다른 고립어와 별반 다르지 않는 듯한 두성 약어화(略語化)로 치닫는다. 아니 자국어는 외국어의 시장 범람으로 종잡을 수 없는 난쟁이 노릇이다.
죽어가거나 사라지거나 변질되거나 하는 일이 어찌 이것뿐이랴. 나의 삶보다 나에게 부과된 시의 숙명이나 언어의 생멸 여부가 막다른 지경에 닥친 마당에 남은 삶에서 할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꼭 이것만은, 꼭 이것만은’이란 그것이 도대체 있기나 한 것일까. 내 숨결이 무자각적이듯이 내 일 또한 무자각적이지 않았던가.
삶은 계획이나 다자인이 아니다. 피조물 신세로 누가 시키는 대로가 아니다. 그것은 끝내 불가사의한 것. 삶을 두고 완성이라는 뜻도 한갓 수사일 뿐 그것은 이 세상에서 불가능하다. 삶의 임기 안에 맡은 바를 다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가.
누구에게나 삶은 미완이기 십상이다. 사실이 이런 바에도 인간 애착의 길이란 무엇인가를 하고 무엇인가를 남기는 길이다. 아무리 삶의 역정이 덧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생활의 행위는 들짐승이나 새나 풀들의 무위를 그대로 따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문명은 먼저 우주나 자연의 개념에 각축한다. 나는 남아있는 삶을 알뜰살뜰히 설정하지 않는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후기의 삶’에 대한 결연한 각오도 덩달아 강조할 이유도 없다.
말하자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한 무의식으로 살고 있다. 미래란 내가 살아있을 때나 죽은 뒤에나 나의 것이 아니다. 10년 후는 10년 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삶으로 할 일을 말하는 것은 차라리 그것의 절실성보다 동화(童話)성 때문에 사절하지 않는다.
자, 내가 내일 죽는다면 오늘 할 일이란 무엇인가. 사과나무 대신 모과나무를 심을까. 아내에게, 그리고 국내외의 친구에게 몇 편의 편지를 써놓을까. 그냥 말 수 없겠지. 시 한 편은 써 놓아야 하겠지. 이제야 깨닫게 된 것, 그것이 바로 시와 죽음의 본질적 일치 아니겠는가.
내가 일주일밖에 살지 못한다면 그 일주일로 무엇을 할까. 몇 병의 묵은 술을 홀짝홀짝 마실까. 마시고 나서 중얼중얼 시베리아 주술로 신들려 볼까. 친구들하고 사진을 찍을까. 일주일은 내 전집을 독파할 만한 시간으로는 짧다. 대강 훑어나 보고 말까. 그냥 멍하니 앉아 있다 누웠다 할까. 무엇을 하나마나 죽음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겠는가. 그럴 수 없을진대, 아내와 함께 가보지 못한 곳의 한 곳을 찾아가는 내 마지막 국내여행은 어떨까.
1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까. 한 권의 시집을 남겨 놓을까. 1년밖에 없다면 몇 권의 숨찬 시집을 남길까. 10년밖에 없다면 몇십 권의 시집을 남길까. 20년밖에 없다면 어떻게 살까. 여기서부터는 나는 내가 아니라 망상일 것이다. 삶의 백일몽일 것이다.
보라. 삶의 끄트머리에서 시는 죽지 않고 시 대신 내가 화살 맞아 죽을 것이다.
고은 시인
생은 느긋하지 않으나 여생이란 느긋해야 할 터. 나는 아직껏 느긋할 줄 모른다.
처서(處暑) 뒤이므로 아침저녁 옷깃 언저리가 서늘하다. 한낮의 빨래들도 따가운 햇살을 받아 아이들처럼 좋아라 하며 건들바람 한 자락에도 앞장서서 펄럭인다.
올여름은 폭우의 여름이었다. 이런 폭우의 연속에는 꾀꼬리는커녕 뻐꾸기와 매미의 집요한 울음소리도 거의 꼼짝달싹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인명도 축나고 축대도 무너지고 농사도 거덜 났다. 막일꾼들도 일할 곳이 없어 굶주렸다. 나의 서재에서도 쌓아둔 책들이 습기에 부풀어 몇 차례 허물어졌다. ‘세계 도처에서 꿀벌들이 죽어가고 있다. 시(詩)가 죽어가고 있다’라고 며칠 전의 일기에 썼다.
인터넷 언어에 경어체나 만연체의 격식 있는 문장 따위는 갈수록 진부해져 간다. 주어 없는 국어, 경어의 국어 그리고 말의 처음부터 끝까지 알알이 표현이 따라붙어야 한마디 말이 성립되는 우리네 교착어도 이제는 다른 고립어와 별반 다르지 않는 듯한 두성 약어화(略語化)로 치닫는다. 아니 자국어는 외국어의 시장 범람으로 종잡을 수 없는 난쟁이 노릇이다.
죽어가거나 사라지거나 변질되거나 하는 일이 어찌 이것뿐이랴. 나의 삶보다 나에게 부과된 시의 숙명이나 언어의 생멸 여부가 막다른 지경에 닥친 마당에 남은 삶에서 할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꼭 이것만은, 꼭 이것만은’이란 그것이 도대체 있기나 한 것일까. 내 숨결이 무자각적이듯이 내 일 또한 무자각적이지 않았던가.
삶은 계획이나 다자인이 아니다. 피조물 신세로 누가 시키는 대로가 아니다. 그것은 끝내 불가사의한 것. 삶을 두고 완성이라는 뜻도 한갓 수사일 뿐 그것은 이 세상에서 불가능하다. 삶의 임기 안에 맡은 바를 다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가.
누구에게나 삶은 미완이기 십상이다. 사실이 이런 바에도 인간 애착의 길이란 무엇인가를 하고 무엇인가를 남기는 길이다. 아무리 삶의 역정이 덧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생활의 행위는 들짐승이나 새나 풀들의 무위를 그대로 따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문명은 먼저 우주나 자연의 개념에 각축한다. 나는 남아있는 삶을 알뜰살뜰히 설정하지 않는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후기의 삶’에 대한 결연한 각오도 덩달아 강조할 이유도 없다.
말하자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한 무의식으로 살고 있다. 미래란 내가 살아있을 때나 죽은 뒤에나 나의 것이 아니다. 10년 후는 10년 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삶으로 할 일을 말하는 것은 차라리 그것의 절실성보다 동화(童話)성 때문에 사절하지 않는다.
자, 내가 내일 죽는다면 오늘 할 일이란 무엇인가. 사과나무 대신 모과나무를 심을까. 아내에게, 그리고 국내외의 친구에게 몇 편의 편지를 써놓을까. 그냥 말 수 없겠지. 시 한 편은 써 놓아야 하겠지. 이제야 깨닫게 된 것, 그것이 바로 시와 죽음의 본질적 일치 아니겠는가.
내가 일주일밖에 살지 못한다면 그 일주일로 무엇을 할까. 몇 병의 묵은 술을 홀짝홀짝 마실까. 마시고 나서 중얼중얼 시베리아 주술로 신들려 볼까. 친구들하고 사진을 찍을까. 일주일은 내 전집을 독파할 만한 시간으로는 짧다. 대강 훑어나 보고 말까. 그냥 멍하니 앉아 있다 누웠다 할까. 무엇을 하나마나 죽음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겠는가. 그럴 수 없을진대, 아내와 함께 가보지 못한 곳의 한 곳을 찾아가는 내 마지막 국내여행은 어떨까.
1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까. 한 권의 시집을 남겨 놓을까. 1년밖에 없다면 몇 권의 숨찬 시집을 남길까. 10년밖에 없다면 몇십 권의 시집을 남길까. 20년밖에 없다면 어떻게 살까. 여기서부터는 나는 내가 아니라 망상일 것이다. 삶의 백일몽일 것이다.
보라. 삶의 끄트머리에서 시는 죽지 않고 시 대신 내가 화살 맞아 죽을 것이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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