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복서-13> 15전 전승 15KO, “내가 진짜 일본 킬러”

등록 2012.08.30.

뛰어난 실력과 화끈한 경기스타일, 훤칠한 키와 잘생긴 외모까지. 복싱 팬들에게 사랑받는 조건을 모두 갖췄다고 일컬어지는 선수가 있었다. 현 권투인협회 사무총장이자 전 주니어 웰터급 동양챔피언 이상호(52)다.

“세계 챔피언보다 인기 많았죠”
고등학교 1학년 때 복싱에 정식으로 입문한 이상호는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며 관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아마전적 39전 31승 28KO 8패의 준수한 성적으로 프로에 진출하더니 6전 6승 5KO의 놀라운 성적을 거두고 신인왕전에 도전한다. 당시 신인왕전은 스타가 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챔피언의 산실이라 할만큼 신인왕전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선수들은 프로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고 종종 세계 타이틀을 따내곤 했다. 그래서 전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신인들이 모여들어피튀기는 혈전을 벌였다. 특히 그 해 신인왕전은 장정구, 백인철, 권순천, 이승순 등 뛰어난 선수들이 참가한 대회였다. 이상호는 토너먼트 첫 날 주먹 부상을 입고도 화끈한 KO퍼레이드를 벌이며 우승을 했고, 기자들이 뽑은 최우수 선수에 선정됐다.
신인왕전까지 11연승을 기록한 이상호는 이후로도 19연승을 달리며 80년대 초 최고의 스타였던 김태식과 함께 한국 복싱의 흥행을 주도했다. 그의 경기는 타이틀 전이 아니었어도 늘 생중계가 됐다. 대전료도 세계 챔피언 못지않게 받았다. 만나는 상대마다 족족 KO로 눕혀버리는 화끈한 경기스타일 때문이었지만 이목구비 뚜렷한 말끔한 외모도 한 몫했다. 경기가 끝나면 대기실에 팬레터가 수북히 쌓여있었다. 특히 팬중에는 여고생 팬이 많았다. 개중에는 후에 가수가 된 팬도 있었고, 탤런트가 된 팬도 있었다, 그들은 이상호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체육관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이상호는 당시를 회상하며 “물론 거절했다”고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일본인은 언제나 자신있어”
이상호는 유독 일본인을 많이 상대했다. 일본인을 상대로는 모두 승리했고 승리는 모두 KO로 장식했다. 15전 전승 15KO.
이상호는 일본인을 상대로는 언제나 자신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이상호를 이겨보려 끊임없이 도전했다. 일본 선수들은 오소독스(정통파)가 복서가 많았는데 이상호는 같은 오소독스였지만 그들보다 빨랐다. 이상호는 “복싱은 바둑과 같아서 상대성이 있는데 일본 선수들의 방식으로는 절대 날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이상호에게 자존심을 짓밟힌 일본 복싱계는 두 체급 위의 선수를 상대로 내세웠다. 심지어 계약체중을 속이기도 했다. 1985년 9월 7일 아스가 료와의 시합은 이상호에게 잊을 수 없는 시합이다. 주니어 웰터급이었던 이상호에게 주니어 미들급 정도의 아스가 료는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다. 6회 작정하고 날린 펀치가 제대로 꽂혔다. 같은 체급의 선수였다면 벌써 KO로 끝났어야 될 만큼 좋은 펀치였다. 그러나 료는 큰 데미지를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경기 후반으로 갈 수록 승산이 없어질 것으로 생각한 이상호는 7회를 승부처로 삼고 다시 한 번 있는 힘을 다해 상대의 턱을 노렸다. 매에는 장사없다는 말처럼 거인같던 료도 결국 꼬꾸라져버렸다. 이후로도 일본 복싱계는 이상호를 이겨보겠다며 도전해왔지만 이상호의 대답은 OK, 그리고 KO 였다.

“세계 챔피언은 운명, 나와는 인연없어”
이상호에게는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두 번 아쉽게 놓쳐버렸다. 첫 번째는 타이틀 도전자 결정전을 앞두고 필리핀의 복병 알란 알게리아에게 패배를 당한 것이다. 프로 데뷔 후 30연승을 달리다 당한 첫 패배. 이후 두 번째 기회를 맞이하기까지는 5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상대는 WBA 주니어 웰터급 챔피언 후안 마르틴 코히. 원정 경기였지만 이상호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현지에서도 챔피언이 열세일 것으로 예상해 국내 팬들은 새 챔프의 탄생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결과는 2라운드 KO패.기량을 다 펼치지 못해 더욱 안타까운 패배였다.
이상호는 운명론자다. 세계 챔피언이 될 운명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세계 챔피언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상호는 “물론 조금은 아쉬운 점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게 속 편하다”고 말하고 호탕하게 웃어보였다.

“복싱 저변 확대에 힘 쏟을 것”
이상호는 타이틀 도전 실패 후 은퇴했다. 여전히 일본에서는 그를 향한 러브콜이 쏟아졌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무산됐다. 이후 여러 사업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를 맛본 이상호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된다는 생각으로 다시 복싱으로 돌아왔다. 최요삼의 죽음을 계기로 권투인들이 각성의 목소리를 내던 시기였다. 이상호는 그 중심에서서 권투인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 한국권투인협회를 창설했다.그리고 지금까지 사무총장을 맡아오며 전국생활복싱대회를 개최해 지금까지 18회에 이르는 동안 많은 복싱 마니아들을 양성했다. 하지만 대회 규모가 커지며 협회 살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대회 개최에 필요한 자금은 늘어나는데 후원금은 점차 줄고 있는 것. 이상호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발로 뛰는 수밖에 없다”고 한탄하면서도 “비록 챔피언은 못해봤지만 ‘생활체육’하면 ‘이상호’가 떠오를 수 있도록 복싱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굳은 의지를 전했다.

백완종 동아닷컴 기자 100p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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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실력과 화끈한 경기스타일, 훤칠한 키와 잘생긴 외모까지. 복싱 팬들에게 사랑받는 조건을 모두 갖췄다고 일컬어지는 선수가 있었다. 현 권투인협회 사무총장이자 전 주니어 웰터급 동양챔피언 이상호(52)다.

“세계 챔피언보다 인기 많았죠”
고등학교 1학년 때 복싱에 정식으로 입문한 이상호는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며 관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아마전적 39전 31승 28KO 8패의 준수한 성적으로 프로에 진출하더니 6전 6승 5KO의 놀라운 성적을 거두고 신인왕전에 도전한다. 당시 신인왕전은 스타가 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챔피언의 산실이라 할만큼 신인왕전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선수들은 프로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고 종종 세계 타이틀을 따내곤 했다. 그래서 전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신인들이 모여들어피튀기는 혈전을 벌였다. 특히 그 해 신인왕전은 장정구, 백인철, 권순천, 이승순 등 뛰어난 선수들이 참가한 대회였다. 이상호는 토너먼트 첫 날 주먹 부상을 입고도 화끈한 KO퍼레이드를 벌이며 우승을 했고, 기자들이 뽑은 최우수 선수에 선정됐다.
신인왕전까지 11연승을 기록한 이상호는 이후로도 19연승을 달리며 80년대 초 최고의 스타였던 김태식과 함께 한국 복싱의 흥행을 주도했다. 그의 경기는 타이틀 전이 아니었어도 늘 생중계가 됐다. 대전료도 세계 챔피언 못지않게 받았다. 만나는 상대마다 족족 KO로 눕혀버리는 화끈한 경기스타일 때문이었지만 이목구비 뚜렷한 말끔한 외모도 한 몫했다. 경기가 끝나면 대기실에 팬레터가 수북히 쌓여있었다. 특히 팬중에는 여고생 팬이 많았다. 개중에는 후에 가수가 된 팬도 있었고, 탤런트가 된 팬도 있었다, 그들은 이상호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체육관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이상호는 당시를 회상하며 “물론 거절했다”고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일본인은 언제나 자신있어”
이상호는 유독 일본인을 많이 상대했다. 일본인을 상대로는 모두 승리했고 승리는 모두 KO로 장식했다. 15전 전승 15KO.
이상호는 일본인을 상대로는 언제나 자신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이상호를 이겨보려 끊임없이 도전했다. 일본 선수들은 오소독스(정통파)가 복서가 많았는데 이상호는 같은 오소독스였지만 그들보다 빨랐다. 이상호는 “복싱은 바둑과 같아서 상대성이 있는데 일본 선수들의 방식으로는 절대 날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이상호에게 자존심을 짓밟힌 일본 복싱계는 두 체급 위의 선수를 상대로 내세웠다. 심지어 계약체중을 속이기도 했다. 1985년 9월 7일 아스가 료와의 시합은 이상호에게 잊을 수 없는 시합이다. 주니어 웰터급이었던 이상호에게 주니어 미들급 정도의 아스가 료는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다. 6회 작정하고 날린 펀치가 제대로 꽂혔다. 같은 체급의 선수였다면 벌써 KO로 끝났어야 될 만큼 좋은 펀치였다. 그러나 료는 큰 데미지를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경기 후반으로 갈 수록 승산이 없어질 것으로 생각한 이상호는 7회를 승부처로 삼고 다시 한 번 있는 힘을 다해 상대의 턱을 노렸다. 매에는 장사없다는 말처럼 거인같던 료도 결국 꼬꾸라져버렸다. 이후로도 일본 복싱계는 이상호를 이겨보겠다며 도전해왔지만 이상호의 대답은 OK, 그리고 KO 였다.

“세계 챔피언은 운명, 나와는 인연없어”
이상호에게는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두 번 아쉽게 놓쳐버렸다. 첫 번째는 타이틀 도전자 결정전을 앞두고 필리핀의 복병 알란 알게리아에게 패배를 당한 것이다. 프로 데뷔 후 30연승을 달리다 당한 첫 패배. 이후 두 번째 기회를 맞이하기까지는 5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상대는 WBA 주니어 웰터급 챔피언 후안 마르틴 코히. 원정 경기였지만 이상호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현지에서도 챔피언이 열세일 것으로 예상해 국내 팬들은 새 챔프의 탄생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결과는 2라운드 KO패.기량을 다 펼치지 못해 더욱 안타까운 패배였다.
이상호는 운명론자다. 세계 챔피언이 될 운명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세계 챔피언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상호는 “물론 조금은 아쉬운 점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게 속 편하다”고 말하고 호탕하게 웃어보였다.

“복싱 저변 확대에 힘 쏟을 것”
이상호는 타이틀 도전 실패 후 은퇴했다. 여전히 일본에서는 그를 향한 러브콜이 쏟아졌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무산됐다. 이후 여러 사업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를 맛본 이상호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된다는 생각으로 다시 복싱으로 돌아왔다. 최요삼의 죽음을 계기로 권투인들이 각성의 목소리를 내던 시기였다. 이상호는 그 중심에서서 권투인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 한국권투인협회를 창설했다.그리고 지금까지 사무총장을 맡아오며 전국생활복싱대회를 개최해 지금까지 18회에 이르는 동안 많은 복싱 마니아들을 양성했다. 하지만 대회 규모가 커지며 협회 살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대회 개최에 필요한 자금은 늘어나는데 후원금은 점차 줄고 있는 것. 이상호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발로 뛰는 수밖에 없다”고 한탄하면서도 “비록 챔피언은 못해봤지만 ‘생활체육’하면 ‘이상호’가 떠오를 수 있도록 복싱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굳은 의지를 전했다.

백완종 동아닷컴 기자 100p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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