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어를 바닷바람에 말려 만든 포항 특산물[과메기]

등록 2012.12.04.

생미역이나 다시마를 곁들여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과메기는 겨울에 잡힌 청어나 꽁치를 바닷바람에 말려서 만든다. 원래는 청어로 만들었지만 어획량이 줄면서 요즘에는 주로 꽁치로 만든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음식이 됐지만 과메기는 경북 포항지방에서 주로 먹었던 특산물이다. 청어는 본래 동해와 서해, 남해에서 두루 잡히던 생선이었다. 그럼에도 유독 포항 과메기가 유명해진 까닭으로 여러 이유를 꼽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포항에서 잡히는 청어가 살이 포동포동 쪄서 맛이 좋았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영일현(迎日縣) 항목에 이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 해마다 겨울이 오면 포항 앞바다인 영일만에서 청어가 제일 먼저 잡혔는데 이때 잡은 청어는 임금님께 진상(進上)을 했고 이후에야 각 고을에서 청어를 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청어가 많이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겨울이 시작되면 청어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몰려들었다. 1939년 동아일보에 실린 ‘조선의 중요 수산물’이란 기사에는 19세기 말 부산항 내해에는 배가 다니기 불편할 정도로 청어가 많았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고 했다.

‘명물기략(名物紀略)’이라는 문헌에도 옛날부터 청어는 값이 싸서 가난한 선비들이 쉽게 사 먹을 수 있어 ‘선비를 살찌우는 생선’이라는 뜻에서 비유어(肥儒魚)라고 했다고 나온다. 이처럼 청어는 옛날부터 일반인의 중요한 영양식품이었는데 소금에 절인 간청어(鹽靑魚)가 도시는 물론이고 벽지에서도 널리 소비되었다고 한다.

엄청나게 많이 잡혔으니 포항의 과메기를 포함해 다양한 방법으로 장기 보관하게 됐다. 그래서 지방마다 서로 다른 특산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과메기라는 명칭은 관목(貫目)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속설이다. 꿸 관(貫)자에 눈 목(目)자를 쓰는데 생선 눈을 짚으로 꿰어 두름으로 만든 것을 뜻하는 말로, 건청어 혹은 말린 생선을 의미하는 말이다.

과메기는 겨울에 잡힌 청어를 소금도 치지 않고 짚으로 엮어 그늘에서 얼렸다 녹이기를 반복하면서 말리는데 1960년대 이후 청어가 사라지면서 대부분 꽁치로 만들고 있다.

옛날 보부상들은 동해안에서 청어를 사서 고개를 넘다가 폭설이 내려 길이 막히면 주막에서 먹고 자곤 했다. 그러다 돈이 떨어지면 지고 가던 청어를 울타리에 걸어 두고 말리다가 적당히 마른 청어를 뜯어먹었고 또 숙박료로 지불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먹은 청어를 과메기의 유래로 보는 이도 있다.

예전 포항과 대구에서는 과메기를 짚불에 구워서 껍질을 벗겨내면 붉은색의 어육만 남는데 이것으로 끓인 과메기쑥국을 과메기 요리 중에서도 최고로 쳤다고 한다.

청어가 많이 잡혔던 전라남도에서는 또 다른 방법으로 청어를 요리해 먹었다. 가마에 물을 붓고 그 위에 대나무 발을 널어놓은 후 청어를 놓고 찌는데 이렇게 하면 청어의 기름기가 절반은 빠져나가 담백한 청어 요리가 된다. 이렇게 만든 청어를 초고추장에 찍으면 별미라고 했다.

한편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청어를 연기에 그을려 부패하지 않도록 만든 것이 연관목(煙貫目)이라고 했는데 청어 훈제요리다. 이처럼 청어 먹는 법은 참 다양했다.[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생미역이나 다시마를 곁들여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과메기는 겨울에 잡힌 청어나 꽁치를 바닷바람에 말려서 만든다. 원래는 청어로 만들었지만 어획량이 줄면서 요즘에는 주로 꽁치로 만든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음식이 됐지만 과메기는 경북 포항지방에서 주로 먹었던 특산물이다. 청어는 본래 동해와 서해, 남해에서 두루 잡히던 생선이었다. 그럼에도 유독 포항 과메기가 유명해진 까닭으로 여러 이유를 꼽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포항에서 잡히는 청어가 살이 포동포동 쪄서 맛이 좋았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영일현(迎日縣) 항목에 이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 해마다 겨울이 오면 포항 앞바다인 영일만에서 청어가 제일 먼저 잡혔는데 이때 잡은 청어는 임금님께 진상(進上)을 했고 이후에야 각 고을에서 청어를 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청어가 많이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겨울이 시작되면 청어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몰려들었다. 1939년 동아일보에 실린 ‘조선의 중요 수산물’이란 기사에는 19세기 말 부산항 내해에는 배가 다니기 불편할 정도로 청어가 많았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고 했다.

‘명물기략(名物紀略)’이라는 문헌에도 옛날부터 청어는 값이 싸서 가난한 선비들이 쉽게 사 먹을 수 있어 ‘선비를 살찌우는 생선’이라는 뜻에서 비유어(肥儒魚)라고 했다고 나온다. 이처럼 청어는 옛날부터 일반인의 중요한 영양식품이었는데 소금에 절인 간청어(鹽靑魚)가 도시는 물론이고 벽지에서도 널리 소비되었다고 한다.

엄청나게 많이 잡혔으니 포항의 과메기를 포함해 다양한 방법으로 장기 보관하게 됐다. 그래서 지방마다 서로 다른 특산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과메기라는 명칭은 관목(貫目)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속설이다. 꿸 관(貫)자에 눈 목(目)자를 쓰는데 생선 눈을 짚으로 꿰어 두름으로 만든 것을 뜻하는 말로, 건청어 혹은 말린 생선을 의미하는 말이다.

과메기는 겨울에 잡힌 청어를 소금도 치지 않고 짚으로 엮어 그늘에서 얼렸다 녹이기를 반복하면서 말리는데 1960년대 이후 청어가 사라지면서 대부분 꽁치로 만들고 있다.

옛날 보부상들은 동해안에서 청어를 사서 고개를 넘다가 폭설이 내려 길이 막히면 주막에서 먹고 자곤 했다. 그러다 돈이 떨어지면 지고 가던 청어를 울타리에 걸어 두고 말리다가 적당히 마른 청어를 뜯어먹었고 또 숙박료로 지불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먹은 청어를 과메기의 유래로 보는 이도 있다.

예전 포항과 대구에서는 과메기를 짚불에 구워서 껍질을 벗겨내면 붉은색의 어육만 남는데 이것으로 끓인 과메기쑥국을 과메기 요리 중에서도 최고로 쳤다고 한다.

청어가 많이 잡혔던 전라남도에서는 또 다른 방법으로 청어를 요리해 먹었다. 가마에 물을 붓고 그 위에 대나무 발을 널어놓은 후 청어를 놓고 찌는데 이렇게 하면 청어의 기름기가 절반은 빠져나가 담백한 청어 요리가 된다. 이렇게 만든 청어를 초고추장에 찍으면 별미라고 했다.

한편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청어를 연기에 그을려 부패하지 않도록 만든 것이 연관목(煙貫目)이라고 했는데 청어 훈제요리다. 이처럼 청어 먹는 법은 참 다양했다.[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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