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이로운 ‘바다의 인삼’…약재로 널리 쓰여[해삼]

등록 2013.03.25.
해삼은 바다에서 나는 인삼이라서 해삼(海蔘)이다. 예전에는 해삼을 해남자(海男子)라고도 했다. 글자 그대로 풀면 ‘바다 사나이’라는 뜻이다. 근육질 몸매에 거칠고 어딘지 모르게 성적 매력을 물씬 풍길 것 같은 이미지다.

먹으면 정력이 불끈 솟을 것 같았는지 고문헌 곳곳에 정력 증진에 좋다고 적혀 있다. 실제 한의학에서도 해삼은 남성한테 좋은 해산물이라고 한다. ‘바다의 인삼’으로 불렸을 정도로 이로운 해산물인 만큼 옛날부터 다양한 방면에서 약재로 쓰였다.

해삼은 임금님 식탁에 오르는 음식이기도 했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고종 23년, 대왕대비의 생신 잔치를 맞아 해삼탕을 준비하라는 고종의 지시가 보인다. 청나라 황제의 식사에 올리는 팔진미에도 해삼이 반드시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좋은 해삼인데 그중에서도 옛날부터 우리 바다에서 잡히는 것이 품질이 가장 뛰어났던 모양이다. 예전 중국에서는 조선 해삼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 중국에 가는 사신이 반드시 챙겨야 했던 품목으로 빠지지 않았다. 선물하기에도 좋지만 경비를 마련하는 데 해삼만큼 좋은 품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해삼을 가져갈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것은 좋은데 그러다 보니 폐단도 많았다.

정약용이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사신으로 임명된 자들이 외부에다 편지를 보내 해삼, 가죽 따위의 자질구레한 물품을 요구하지 않은 적이 없고 이것을 팔아 여행 경비로 쓴다. 국경을 나서는 사신이 물건을 팔아 경비를 조달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고 적었다.

가져가는 해삼 물량이 너무 많아 무역규제를 받기도 했다. 영조실록에 청나라 세관의 동향을 보고한 기록이 실려 있다. “청나라 예부에서 이르기를 산해관으로 들어오는 해삼이 봉성(鳳城)에서 검사 도장을 찍은 것보다 숫자가 더 많으니 금년에는 면세로 들여보내지만 앞으로는 세금을 거두겠다고 한다.” 봉성은 청나라에 입국한 이후 첫 번째로 나오는 세관이고 산해관은 지금의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세관이다.

그런데 진짜 심각한 문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중국 어선들의 불법 조업이었다. 요즘 중국 어선들이 서해안에 몰려와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중국인들이 해삼을 무더기로 잡아갔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4월 바람이 화창할 때면 황당선(荒唐船·소속 불명 외국 선박)이 와 육지에서는 한약재를 캐고, 바다에서는 해삼을 따다 8월에 바람이 거세지면 돌아간다. 8∼10척의 배들이 몰려오는데 한 척당 100명까지 타고와 초도와 백령도 사이에 출몰한다”라고 기록했다.
이들의 행패가 상당히 심했던 모양으로 “육지에서는 도끼를 매고 걸어다니며 호박이건 참외건 제멋대로 따먹고 뿌리까지 망쳐 버리며 때로는 조선 관리를 보자고 청하기도 했는데 관리가 무서워 도망쳤다”고 적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영조 10년, ‘중국 배들이 해삼을 채취하기 위해 여름과 가을 계절이 바뀔 때면 서해안에 몇백 척씩이나 출몰하는데 지방 수령들이 쫓아내려고 해도 저들은 수효가 많고 우리는 숫자가 적다며 몰래 술과 양식을 주고 달래서 보내려는 자들까지 있다’며 개탄하는 내용이 보인다. 중국 어선의 횡포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것이 없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해삼은 바다에서 나는 인삼이라서 해삼(海蔘)이다. 예전에는 해삼을 해남자(海男子)라고도 했다. 글자 그대로 풀면 ‘바다 사나이’라는 뜻이다. 근육질 몸매에 거칠고 어딘지 모르게 성적 매력을 물씬 풍길 것 같은 이미지다.

먹으면 정력이 불끈 솟을 것 같았는지 고문헌 곳곳에 정력 증진에 좋다고 적혀 있다. 실제 한의학에서도 해삼은 남성한테 좋은 해산물이라고 한다. ‘바다의 인삼’으로 불렸을 정도로 이로운 해산물인 만큼 옛날부터 다양한 방면에서 약재로 쓰였다.

해삼은 임금님 식탁에 오르는 음식이기도 했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고종 23년, 대왕대비의 생신 잔치를 맞아 해삼탕을 준비하라는 고종의 지시가 보인다. 청나라 황제의 식사에 올리는 팔진미에도 해삼이 반드시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좋은 해삼인데 그중에서도 옛날부터 우리 바다에서 잡히는 것이 품질이 가장 뛰어났던 모양이다. 예전 중국에서는 조선 해삼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 중국에 가는 사신이 반드시 챙겨야 했던 품목으로 빠지지 않았다. 선물하기에도 좋지만 경비를 마련하는 데 해삼만큼 좋은 품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해삼을 가져갈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것은 좋은데 그러다 보니 폐단도 많았다.

정약용이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사신으로 임명된 자들이 외부에다 편지를 보내 해삼, 가죽 따위의 자질구레한 물품을 요구하지 않은 적이 없고 이것을 팔아 여행 경비로 쓴다. 국경을 나서는 사신이 물건을 팔아 경비를 조달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고 적었다.

가져가는 해삼 물량이 너무 많아 무역규제를 받기도 했다. 영조실록에 청나라 세관의 동향을 보고한 기록이 실려 있다. “청나라 예부에서 이르기를 산해관으로 들어오는 해삼이 봉성(鳳城)에서 검사 도장을 찍은 것보다 숫자가 더 많으니 금년에는 면세로 들여보내지만 앞으로는 세금을 거두겠다고 한다.” 봉성은 청나라에 입국한 이후 첫 번째로 나오는 세관이고 산해관은 지금의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세관이다.

그런데 진짜 심각한 문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중국 어선들의 불법 조업이었다. 요즘 중국 어선들이 서해안에 몰려와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중국인들이 해삼을 무더기로 잡아갔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4월 바람이 화창할 때면 황당선(荒唐船·소속 불명 외국 선박)이 와 육지에서는 한약재를 캐고, 바다에서는 해삼을 따다 8월에 바람이 거세지면 돌아간다. 8∼10척의 배들이 몰려오는데 한 척당 100명까지 타고와 초도와 백령도 사이에 출몰한다”라고 기록했다.
이들의 행패가 상당히 심했던 모양으로 “육지에서는 도끼를 매고 걸어다니며 호박이건 참외건 제멋대로 따먹고 뿌리까지 망쳐 버리며 때로는 조선 관리를 보자고 청하기도 했는데 관리가 무서워 도망쳤다”고 적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영조 10년, ‘중국 배들이 해삼을 채취하기 위해 여름과 가을 계절이 바뀔 때면 서해안에 몇백 척씩이나 출몰하는데 지방 수령들이 쫓아내려고 해도 저들은 수효가 많고 우리는 숫자가 적다며 몰래 술과 양식을 주고 달래서 보내려는 자들까지 있다’며 개탄하는 내용이 보인다. 중국 어선의 횡포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것이 없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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