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바꿔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등록 2014.08.21.
‘첫날부터 세컨드 어시스트(수술 보조의사)? 아이고 죽었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강한 흰 램프 빛이 33m² 남짓한 수술방을 가득 채웠다. 간신히 눈을 떴다. 수술방 인원은 간호사를 포함해 총 여섯. 메스를 들고 수술대 중앙에 서 있는 사바 페로비치의 광기 어린 안구가 도드라져 보였다. 수술에 미친 의사들의 그 눈빛. 수술방 모서리에 있던 폐쇄회로(CC)TV가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아마 옆방에서 화상으로 지켜보는 의사들의 입술도 바싹 말라가고 있겠지. 그때 동유럽 남자 특유의 소련식 영어 호통이 터졌다.

“닥터 킴. 집중하라고. 정신 바짝 차려!”

수술대에 누운 남자를 살폈다. 턱수염이 잔뜩 자란 30대 백인 남자. 그의 양쪽 가랑이 사이로 정신을 집중했다. 그런데 마땅히 불룩 튀어나온 성기가 있어야 할 자리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목한 여자의 ‘그것’이 있는 게 아닌가. 기묘했다. 사바가 말했다.

“이 여자가 30년 묵은 자궁과 이별할 시간이다. 닥터 킴은 잘 봐. 여자가 남자가 되는 이 순간을….”

2003년 5월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열린 유럽비뇨기과학회장. 안정환이 전성기를 맞은 축구팀으로도 유명한 이곳엔 내 인생 최고의 스승이 된 사바 페로비치(당시 56세·2010년 작고)가 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탈리아 전역의 ‘성전환증’ 환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이들은 성전환계의 ‘신의 손’이라는 사바를 통해 다시 태어나고 싶어 했다. 사바는 원하는 자라면 누구나 수술방으로 초대했다. 덕분에 극동에서 성전환 수술 하나만 배우기 위해 날아온 나는 사바와의 첫 만남부터 원없이 수술방에 콕 박혀 있었다. 마치 타고난 운명처럼.



○ ‘남성수술’은 허벌나게 지겨웠다

내 이름은 김진홍(45). 전북 전주 출신 촌놈이다. 어릴 적 공부는 꽤 잘한 덕에 전북대 의대에 들어갔다. 지금은 망해가지만 1990년대만 해도 정말 잘나가던 비뇨기과를 업으로 삼았다. 1978년 전주 풍납문 복원에 참여한 목수 아버지의 피를 타고난 탓에 손재주가 좋아 “메스(수술칼)질 하나는 죽인다”는 소리를 줄곧 들어왔다.

레지던트를 마친 후 전주에 작은 개인병원 하나를 열었다. 주로 ‘남성수술’을 했다. 남들보다 작은(또는 본인이 그렇게 느끼는) ‘거시기’에다 실리콘을 박거나 민감한 거시기의 신경을 끊고 조루증을 고치는 수술을 셀 수 없이 많이 했다. 덕분에 2000년대 초 “전라도 촌놈이 고추 하나는 허벌나게 잘 고친다”는 입소문을 타고 서울 강남까지 진출했다. 구름처럼 몰려드는 ‘고개 숙인 남자’들 덕에 매달 수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내 인생의 황금기. 하지만 예금통장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아닌가.

“남정네 거시기만 다듬어주려고 의사가 된 건 아닌데…. 뭔가 짜릿한 일 없나?’

이 고민만 몇 년 했던 것 같다. 결혼도 하고 아들놈도 봤다. 가장이 됐다는 책임감에 수술에만 집중하려고도 노력했다. 쉽지 않았다. 대학 시절 보던 비뇨기과 책과 논문을 뒤져봤다. 그중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성전환 수술이었다. 국내에선 단 1명(동아대병원 성형외과 김석권 교수)만 한다는 그 수술. 쓰레기더미에서 보물을 찾은 기분이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책과 논문 5권만 남기고 나머지 비뇨기과 관련 서적을 모두 버렸다. 나만의 배수진을 친 것이다.



○ 세르비아에서 진짜 외과의사의 열정을 배우다

이왕이면 본고장에서 배우려고 인터넷을 뒤졌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성전환 명의(名醫) 사바 페로비치가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 살고 있단 걸 알았다. 2003년 초 국내 유일의 세르비아어 번역자인 한국외국어대 김성환 선생의 도움을 받아 구직서를 만들어 보냈다. 그리고 사바의 ‘OK’ 사인이 떨어진 5월 곧장 사바가 머물던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덕분에 내 아들은 태어난 지 66일 만에 100일 사진을 미리 찍었다. 그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 마누라는 “고추 자르는 거 배우면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말로 금방 설득했다.

막상 해보니 성전환 수술은 그리 어렵지 않은 수술이었다. 특히 남자를 여자로 만들 때는 음경을 없애고 질을 만드는 과정을 ‘한 큐’(한 방에 끝낸다는 당구용어)에 다 끝낼 정도로 간단하다. 귀두를 양파 껍질 벗기는 것처럼 벗기며 여자의 음핵(클리토리스) 모양으로 다듬고 요도만 정상적으로 빼내면 된다. 질은 주로 촉촉한 창자나 부드러운 음낭 껍질을 재활용해 만든다. 섹스할 때 여자의 그것과 느낌이 비슷하다고 하더라. 하반신 마취만 해서 빠르면 4시간에 수술을 마친다.

하지만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과정은 더 복잡하다. 유방과 자궁을 들어내는 것으로는 수술이 끝나지 않는다. 남자 성기를 다시 만들어 붙이는 게 복잡하다. 먼저 옆구리 밑에서 떼어낸 두툼한 살을 돌돌 말아 음경 외피를 만든다. 그리고 실리콘 보형물을 넣어 모양을 바로잡은 뒤 요도를 확보해야 수술이 끝난다. 길게는 3년을 투자해야 ‘진짜 사나이’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1년 반의 수련기간에 사바가 내게 가르친 건 수술법이 아닌 외과의사의 열정이었다. 사바는 60세를 바라보는 노구였다. 하지만 하루 3, 4건의 수술을 거뜬히 해냈다. 수술을 4번이나 하고 녹초가 된 어느 날. “솔직히 그만두고 싶지 않냐”고 사바한테 물었다. 사바의 대답이 정말 예술이었다.

“진홍.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수술을 몇 달간 하지 못하는 외과의사가 있었거든. 그런데 그자가 일주일 만에 메스를 들었어. 자기 다리를 자르고 3일 만에 의족을 차고 걸었다는 거야. 이렇게 미친놈도 있는데 멀쩡한 내가 왜 그만둬?”

친애하는 내 스승 사바는 암으로 운명하기 3일 전까지 수술을 멈추지 않았다.



○ 그들은 괴물이 아니다

2004년 말 한국에 돌아와서 강남에 다시 병원을 차렸다. 300명 정도가 내 손을 통해 타고난 성을 바꿨다. 여자가 되고 싶은 이들 대부분은 태국에 나가서 반값(약 500만 원)에 수술을 받는다. 덕분에 내 환자 중 80%는 만들어진 사내들이다. 생소하지만 인조남자들도 꽤 많다.

경북 어귀에 사는 김모 씨(50)는 올 초 남자로 새로 태어났다. 그는 열 살부터 자신을 남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밑에 고추가 달린 것만 달랐지 딱지치기, 축구 등 남자가 좋아하는 거라면 뭐든지 좋아했다. 심지어 첫사랑도 17세 때 같은 섬유공장에서 만난 아가씨였다.

남자처럼 살아온 김 씨는 여태껏 30년 넘게 술집 웨이터, 무도장 호객꾼 등 유흥가를 전전하며 생계를 꾸려왔다. 꽁꽁 싸맨 가슴팍을 풀어 헤치라고 할까봐, 신체검사를 하자고 할까봐 멀쩡한 직업은 구해볼 엄두도 못 냈다. 그런 그가 나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난 지금까지 여자가 남자가 될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습니더. 너무 억울합니더. 진짜 남자로 바꿔주이소.”

남자가 된 그는 호르몬 주사를 맞으러 올 때마다 “무엇보다 이젠 마누라에게 제대로 된 남편 구실을 할 수 있어 너무 좋다”고 말한다. 30년 넘은 자존심의 흉터를 김 씨는 수술로 해결했다. 그리고 지금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

누구나 김 씨처럼 성전환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솔직히 안타까운 사연이 더 많다. 웬만한 여자보다 더 예쁜 20대 남성 A가 나를 찾아온 건 5년 전. 그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만 1년 해서 1000만 원을 모았다”며 빨리 수술 날짜를 잡고 싶다고 했다. 무언가에 쫓기는 간절한 눈빛으로.

녀석의 눈빛이 그리 떨린 이유가 있었다. 다음 날 형과 아버지가 수술비를 모두 뺏었다. 심지어 A의 아버지는 “수술 예약비를 받은 걸 다 알고 있다”며 병원에 찾아와 소리를 질러댔다. 물론 그런 건 애초에 받지도 않았다.

그리고 1년이 지나 A가 다시 “돈을 다시 모았어요. 수술 받고 싶어요”라며 전화를 해왔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A는 병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그의 소식은 충격적이다.

“선생님. 오빠(형)가 아빠랑 다시 돈을 뺏어갔어요. 저 오빠한테 몹쓸 짓까지 당했어요. 자기 허락 없이 딴짓하면 죽여 버린다고 하면서….”

이렇게 이 땅에는 여전히 성전환자들을 향한 시선이 너무나 차갑다. 가끔 ‘내가 잘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에 잠길 때면 예전에 만난 60대 남성 B를 떠올린다. B는 장성한 자식들을 둔 가장(家長). 일찍이 “난 여자요”라며 커밍아웃했지만 “애들 결혼할 때까지만 참으라”는 부인의 만류에 수술을 미뤄왔다. 나도 처음부터 수술을 말렸다. “쭈글쭈글한 영감이 뭐 하려고 고추를 자르소”라고. 하지만 B가 수술을 해야 하는 이유가 너무 간절했다.

“저승에는 죽은 모습 그대로 간다더라고. 송장만이라도 여자 몸으로 죽고 싶소. 저승에서라도 여자이고 싶단 말이오.”

이렇게 숨기고 숨어있다 우리 병원을 찾는 이들의 간절함이 나를 수술장으로 이끈다. 그리고 오늘 또 스무 살 남자 하나가 “여기가 그 비뇨기과 맞죠?”라며 큰 눈을 껌뻑이며 찾아왔다. 그가 원하는 새로운 삶을 다시 찾아줄 시간이다.

이철호 기자 irontiger@donga.com

‘첫날부터 세컨드 어시스트(수술 보조의사)? 아이고 죽었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강한 흰 램프 빛이 33m² 남짓한 수술방을 가득 채웠다. 간신히 눈을 떴다. 수술방 인원은 간호사를 포함해 총 여섯. 메스를 들고 수술대 중앙에 서 있는 사바 페로비치의 광기 어린 안구가 도드라져 보였다. 수술에 미친 의사들의 그 눈빛. 수술방 모서리에 있던 폐쇄회로(CC)TV가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아마 옆방에서 화상으로 지켜보는 의사들의 입술도 바싹 말라가고 있겠지. 그때 동유럽 남자 특유의 소련식 영어 호통이 터졌다.

“닥터 킴. 집중하라고. 정신 바짝 차려!”

수술대에 누운 남자를 살폈다. 턱수염이 잔뜩 자란 30대 백인 남자. 그의 양쪽 가랑이 사이로 정신을 집중했다. 그런데 마땅히 불룩 튀어나온 성기가 있어야 할 자리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목한 여자의 ‘그것’이 있는 게 아닌가. 기묘했다. 사바가 말했다.

“이 여자가 30년 묵은 자궁과 이별할 시간이다. 닥터 킴은 잘 봐. 여자가 남자가 되는 이 순간을….”

2003년 5월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열린 유럽비뇨기과학회장. 안정환이 전성기를 맞은 축구팀으로도 유명한 이곳엔 내 인생 최고의 스승이 된 사바 페로비치(당시 56세·2010년 작고)가 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탈리아 전역의 ‘성전환증’ 환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이들은 성전환계의 ‘신의 손’이라는 사바를 통해 다시 태어나고 싶어 했다. 사바는 원하는 자라면 누구나 수술방으로 초대했다. 덕분에 극동에서 성전환 수술 하나만 배우기 위해 날아온 나는 사바와의 첫 만남부터 원없이 수술방에 콕 박혀 있었다. 마치 타고난 운명처럼.



○ ‘남성수술’은 허벌나게 지겨웠다

내 이름은 김진홍(45). 전북 전주 출신 촌놈이다. 어릴 적 공부는 꽤 잘한 덕에 전북대 의대에 들어갔다. 지금은 망해가지만 1990년대만 해도 정말 잘나가던 비뇨기과를 업으로 삼았다. 1978년 전주 풍납문 복원에 참여한 목수 아버지의 피를 타고난 탓에 손재주가 좋아 “메스(수술칼)질 하나는 죽인다”는 소리를 줄곧 들어왔다.

레지던트를 마친 후 전주에 작은 개인병원 하나를 열었다. 주로 ‘남성수술’을 했다. 남들보다 작은(또는 본인이 그렇게 느끼는) ‘거시기’에다 실리콘을 박거나 민감한 거시기의 신경을 끊고 조루증을 고치는 수술을 셀 수 없이 많이 했다. 덕분에 2000년대 초 “전라도 촌놈이 고추 하나는 허벌나게 잘 고친다”는 입소문을 타고 서울 강남까지 진출했다. 구름처럼 몰려드는 ‘고개 숙인 남자’들 덕에 매달 수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내 인생의 황금기. 하지만 예금통장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아닌가.

“남정네 거시기만 다듬어주려고 의사가 된 건 아닌데…. 뭔가 짜릿한 일 없나?’

이 고민만 몇 년 했던 것 같다. 결혼도 하고 아들놈도 봤다. 가장이 됐다는 책임감에 수술에만 집중하려고도 노력했다. 쉽지 않았다. 대학 시절 보던 비뇨기과 책과 논문을 뒤져봤다. 그중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성전환 수술이었다. 국내에선 단 1명(동아대병원 성형외과 김석권 교수)만 한다는 그 수술. 쓰레기더미에서 보물을 찾은 기분이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책과 논문 5권만 남기고 나머지 비뇨기과 관련 서적을 모두 버렸다. 나만의 배수진을 친 것이다.



○ 세르비아에서 진짜 외과의사의 열정을 배우다

이왕이면 본고장에서 배우려고 인터넷을 뒤졌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성전환 명의(名醫) 사바 페로비치가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 살고 있단 걸 알았다. 2003년 초 국내 유일의 세르비아어 번역자인 한국외국어대 김성환 선생의 도움을 받아 구직서를 만들어 보냈다. 그리고 사바의 ‘OK’ 사인이 떨어진 5월 곧장 사바가 머물던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덕분에 내 아들은 태어난 지 66일 만에 100일 사진을 미리 찍었다. 그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 마누라는 “고추 자르는 거 배우면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말로 금방 설득했다.

막상 해보니 성전환 수술은 그리 어렵지 않은 수술이었다. 특히 남자를 여자로 만들 때는 음경을 없애고 질을 만드는 과정을 ‘한 큐’(한 방에 끝낸다는 당구용어)에 다 끝낼 정도로 간단하다. 귀두를 양파 껍질 벗기는 것처럼 벗기며 여자의 음핵(클리토리스) 모양으로 다듬고 요도만 정상적으로 빼내면 된다. 질은 주로 촉촉한 창자나 부드러운 음낭 껍질을 재활용해 만든다. 섹스할 때 여자의 그것과 느낌이 비슷하다고 하더라. 하반신 마취만 해서 빠르면 4시간에 수술을 마친다.

하지만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과정은 더 복잡하다. 유방과 자궁을 들어내는 것으로는 수술이 끝나지 않는다. 남자 성기를 다시 만들어 붙이는 게 복잡하다. 먼저 옆구리 밑에서 떼어낸 두툼한 살을 돌돌 말아 음경 외피를 만든다. 그리고 실리콘 보형물을 넣어 모양을 바로잡은 뒤 요도를 확보해야 수술이 끝난다. 길게는 3년을 투자해야 ‘진짜 사나이’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1년 반의 수련기간에 사바가 내게 가르친 건 수술법이 아닌 외과의사의 열정이었다. 사바는 60세를 바라보는 노구였다. 하지만 하루 3, 4건의 수술을 거뜬히 해냈다. 수술을 4번이나 하고 녹초가 된 어느 날. “솔직히 그만두고 싶지 않냐”고 사바한테 물었다. 사바의 대답이 정말 예술이었다.

“진홍.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수술을 몇 달간 하지 못하는 외과의사가 있었거든. 그런데 그자가 일주일 만에 메스를 들었어. 자기 다리를 자르고 3일 만에 의족을 차고 걸었다는 거야. 이렇게 미친놈도 있는데 멀쩡한 내가 왜 그만둬?”

친애하는 내 스승 사바는 암으로 운명하기 3일 전까지 수술을 멈추지 않았다.



○ 그들은 괴물이 아니다

2004년 말 한국에 돌아와서 강남에 다시 병원을 차렸다. 300명 정도가 내 손을 통해 타고난 성을 바꿨다. 여자가 되고 싶은 이들 대부분은 태국에 나가서 반값(약 500만 원)에 수술을 받는다. 덕분에 내 환자 중 80%는 만들어진 사내들이다. 생소하지만 인조남자들도 꽤 많다.

경북 어귀에 사는 김모 씨(50)는 올 초 남자로 새로 태어났다. 그는 열 살부터 자신을 남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밑에 고추가 달린 것만 달랐지 딱지치기, 축구 등 남자가 좋아하는 거라면 뭐든지 좋아했다. 심지어 첫사랑도 17세 때 같은 섬유공장에서 만난 아가씨였다.

남자처럼 살아온 김 씨는 여태껏 30년 넘게 술집 웨이터, 무도장 호객꾼 등 유흥가를 전전하며 생계를 꾸려왔다. 꽁꽁 싸맨 가슴팍을 풀어 헤치라고 할까봐, 신체검사를 하자고 할까봐 멀쩡한 직업은 구해볼 엄두도 못 냈다. 그런 그가 나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난 지금까지 여자가 남자가 될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습니더. 너무 억울합니더. 진짜 남자로 바꿔주이소.”

남자가 된 그는 호르몬 주사를 맞으러 올 때마다 “무엇보다 이젠 마누라에게 제대로 된 남편 구실을 할 수 있어 너무 좋다”고 말한다. 30년 넘은 자존심의 흉터를 김 씨는 수술로 해결했다. 그리고 지금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

누구나 김 씨처럼 성전환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솔직히 안타까운 사연이 더 많다. 웬만한 여자보다 더 예쁜 20대 남성 A가 나를 찾아온 건 5년 전. 그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만 1년 해서 1000만 원을 모았다”며 빨리 수술 날짜를 잡고 싶다고 했다. 무언가에 쫓기는 간절한 눈빛으로.

녀석의 눈빛이 그리 떨린 이유가 있었다. 다음 날 형과 아버지가 수술비를 모두 뺏었다. 심지어 A의 아버지는 “수술 예약비를 받은 걸 다 알고 있다”며 병원에 찾아와 소리를 질러댔다. 물론 그런 건 애초에 받지도 않았다.

그리고 1년이 지나 A가 다시 “돈을 다시 모았어요. 수술 받고 싶어요”라며 전화를 해왔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A는 병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그의 소식은 충격적이다.

“선생님. 오빠(형)가 아빠랑 다시 돈을 뺏어갔어요. 저 오빠한테 몹쓸 짓까지 당했어요. 자기 허락 없이 딴짓하면 죽여 버린다고 하면서….”

이렇게 이 땅에는 여전히 성전환자들을 향한 시선이 너무나 차갑다. 가끔 ‘내가 잘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에 잠길 때면 예전에 만난 60대 남성 B를 떠올린다. B는 장성한 자식들을 둔 가장(家長). 일찍이 “난 여자요”라며 커밍아웃했지만 “애들 결혼할 때까지만 참으라”는 부인의 만류에 수술을 미뤄왔다. 나도 처음부터 수술을 말렸다. “쭈글쭈글한 영감이 뭐 하려고 고추를 자르소”라고. 하지만 B가 수술을 해야 하는 이유가 너무 간절했다.

“저승에는 죽은 모습 그대로 간다더라고. 송장만이라도 여자 몸으로 죽고 싶소. 저승에서라도 여자이고 싶단 말이오.”

이렇게 숨기고 숨어있다 우리 병원을 찾는 이들의 간절함이 나를 수술장으로 이끈다. 그리고 오늘 또 스무 살 남자 하나가 “여기가 그 비뇨기과 맞죠?”라며 큰 눈을 껌뻑이며 찾아왔다. 그가 원하는 새로운 삶을 다시 찾아줄 시간이다.

이철호 기자 irontig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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