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테러 13주년… 美, 테니스장-도서관서 ‘앤드루 김’을 기억한다

등록 2014.09.11.
‘아무리 많은 날이 지나도 시간의 기억으로부터 당신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미국 뉴욕 맨해튼 ‘9·11 추모 박물관’의 지하 벽면에 적혀 있는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 중 한 구절. 2001년 9·11테러 당시 희생자 중 한국인은 재미 교포를 포함해 21명이었다. 그중 한 명인 앤드루 김(김재훈·당시 27세·사진)은 지난 13년 동안 미국인들의 기억 속에 어떻게 남아 있을까. 그는 컬럼비아대를 졸업하고 세계무역센터(WTC) 노스타워 93층에 있는 뮤추얼펀드회사 ‘프레드 앨저 매니지먼트’에서 증권분석가로 일하다가 변을 당했다.

○ ‘그의 일상에서 그를 추모한다’

9·11테러 다음 해인 2002년의 어느 날. 뉴저지 주 버건 카운티 위원회의 앤서니 캐사노 위원장은 앤드루 김의 아버지 김평겸 씨(73)에게 전화를 걸었다.

“앤드루가 테니스를 좋아했고 고교와 대학 시절 대표선수로 활동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가 테니스를 즐겼던 오버펙 공원 테니스장이야말로 그를 추모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인 것 같다.”

같은 해 9월 18일 카운티 위원회는 “앤드루가 선수로서, 자원봉사 코치로서 많은 시간을 보낸 그곳을 ‘앤드루 김 추모 테니스 코트’로 명명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지금은 공직에서 은퇴한 캐사노 씨는 8일 기자를 만나 “테니스장은 즐거운 장소다. 그런 곳에서 앤드루를 추모하는 일에 작게나마 기여한 것은 큰 기쁨”이라고 말했다.

테니스장 개명(改名)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다. 버건 카운티와 리오니아 시는 꾸준히 예산(총 200만 달러·약 20억5000만 원)을 배정해 테니스장을 개선했다. 정식 코트 6개, 개인 연습용 반쪽 코트 4개의 근사한 시설로 변모시켰다. 그 과정에서 자치 정부와 공원 측은 유가족과 수시로 교감했다. 2004년 11월 27일 테니스장 터 파기 공사가 시작된 날 프랭크 드바리 공원 소장은 김 씨에게 ‘오늘 같은 의미 있는 날 함께 읽고 싶은 시 한 편을 찾았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가 떠나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는 함께했던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다고 생각하세요. 사랑받는 존재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우리는 그를 너무나 사랑했으니까요.’

김 씨는 이 편지를 지금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6일 테니스장에서 만난 래리 처키 전 리오니아 시장은 “개보수가 완료된 지난해부터 봄과 가을에 앤드루를 추모하는 테니스 무료 강습과 토너먼트 대회를 열어 더욱 뜻깊다”고 말했다. 이날도 무료 강습이 있었다. 라켓을 들기도 힘들어 보이는 3∼5세 어린이도 코트를 뛰어다니며 즐거워했다.

테니스 연습 중이던 여고생 일레인 림 양(15)에게 9·11에 대해 물었더니 “두 살 때 일이어서 기억나는 게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앤드루 김’을 묻자 “테니스를 치면서 그에 대한 얘기를 종종 들었다. 내 고교(리오니아고) 선배이고 테니스를 사랑했던 사람인데 9·11 때 아쉽게도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 오가던 길가에도 ‘떠난 이의 숨결’

앤드루가 고교 시절 자원봉사를 했던 리오니아 도서관 앞길은 2008년 9월 ‘앤드루 김 메모리얼 웨이’로 명명됐다. 버지니아 주 상하원이 결의한 결과다. 8일 도로 표지판 앞에서 도로명 지정을 주도했던 데버러 비글로 도서관장을 만났다. 그는 “출퇴근할 때 이 길을 지나면서 앤드루를 떠올린다. 그가 떠난 지 13년이나 됐지만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생생하다”고 말했다. 2004년엔 앤드루가 공부하던 다른 시립도서관 앞에도 ‘앤드루 김 추모 벤치’가 설치됐다.

김평겸 씨는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보낸 슬픔이 사라질 수 있겠나. 그저 조금씩 그 슬픔에 익숙해져 갈 뿐”이라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그 아이가 뛰어다니던 테니스 코트, 공부하던 도서관, 자원봉사하며 수없이 오가던 길거리에서 앤드루의 이름을 볼 때마다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앤드루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해준 많은 분들에게 감사할 따름이죠.”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아무리 많은 날이 지나도 시간의 기억으로부터 당신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미국 뉴욕 맨해튼 ‘9·11 추모 박물관’의 지하 벽면에 적혀 있는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 중 한 구절. 2001년 9·11테러 당시 희생자 중 한국인은 재미 교포를 포함해 21명이었다. 그중 한 명인 앤드루 김(김재훈·당시 27세·사진)은 지난 13년 동안 미국인들의 기억 속에 어떻게 남아 있을까. 그는 컬럼비아대를 졸업하고 세계무역센터(WTC) 노스타워 93층에 있는 뮤추얼펀드회사 ‘프레드 앨저 매니지먼트’에서 증권분석가로 일하다가 변을 당했다.

○ ‘그의 일상에서 그를 추모한다’

9·11테러 다음 해인 2002년의 어느 날. 뉴저지 주 버건 카운티 위원회의 앤서니 캐사노 위원장은 앤드루 김의 아버지 김평겸 씨(73)에게 전화를 걸었다.

“앤드루가 테니스를 좋아했고 고교와 대학 시절 대표선수로 활동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가 테니스를 즐겼던 오버펙 공원 테니스장이야말로 그를 추모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인 것 같다.”

같은 해 9월 18일 카운티 위원회는 “앤드루가 선수로서, 자원봉사 코치로서 많은 시간을 보낸 그곳을 ‘앤드루 김 추모 테니스 코트’로 명명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지금은 공직에서 은퇴한 캐사노 씨는 8일 기자를 만나 “테니스장은 즐거운 장소다. 그런 곳에서 앤드루를 추모하는 일에 작게나마 기여한 것은 큰 기쁨”이라고 말했다.

테니스장 개명(改名)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다. 버건 카운티와 리오니아 시는 꾸준히 예산(총 200만 달러·약 20억5000만 원)을 배정해 테니스장을 개선했다. 정식 코트 6개, 개인 연습용 반쪽 코트 4개의 근사한 시설로 변모시켰다. 그 과정에서 자치 정부와 공원 측은 유가족과 수시로 교감했다. 2004년 11월 27일 테니스장 터 파기 공사가 시작된 날 프랭크 드바리 공원 소장은 김 씨에게 ‘오늘 같은 의미 있는 날 함께 읽고 싶은 시 한 편을 찾았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가 떠나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는 함께했던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다고 생각하세요. 사랑받는 존재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우리는 그를 너무나 사랑했으니까요.’

김 씨는 이 편지를 지금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6일 테니스장에서 만난 래리 처키 전 리오니아 시장은 “개보수가 완료된 지난해부터 봄과 가을에 앤드루를 추모하는 테니스 무료 강습과 토너먼트 대회를 열어 더욱 뜻깊다”고 말했다. 이날도 무료 강습이 있었다. 라켓을 들기도 힘들어 보이는 3∼5세 어린이도 코트를 뛰어다니며 즐거워했다.

테니스 연습 중이던 여고생 일레인 림 양(15)에게 9·11에 대해 물었더니 “두 살 때 일이어서 기억나는 게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앤드루 김’을 묻자 “테니스를 치면서 그에 대한 얘기를 종종 들었다. 내 고교(리오니아고) 선배이고 테니스를 사랑했던 사람인데 9·11 때 아쉽게도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 오가던 길가에도 ‘떠난 이의 숨결’

앤드루가 고교 시절 자원봉사를 했던 리오니아 도서관 앞길은 2008년 9월 ‘앤드루 김 메모리얼 웨이’로 명명됐다. 버지니아 주 상하원이 결의한 결과다. 8일 도로 표지판 앞에서 도로명 지정을 주도했던 데버러 비글로 도서관장을 만났다. 그는 “출퇴근할 때 이 길을 지나면서 앤드루를 떠올린다. 그가 떠난 지 13년이나 됐지만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생생하다”고 말했다. 2004년엔 앤드루가 공부하던 다른 시립도서관 앞에도 ‘앤드루 김 추모 벤치’가 설치됐다.

김평겸 씨는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보낸 슬픔이 사라질 수 있겠나. 그저 조금씩 그 슬픔에 익숙해져 갈 뿐”이라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그 아이가 뛰어다니던 테니스 코트, 공부하던 도서관, 자원봉사하며 수없이 오가던 길거리에서 앤드루의 이름을 볼 때마다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앤드루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해준 많은 분들에게 감사할 따름이죠.”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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