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바둑 터닦은 ‘반상의 개척자’… 조남철 9단 별세

등록 2006.07.03.
“이 사람아, 그 대마는 조남철이 와도 못 살리네. 돌을 던지게.”

1970년대 중반까지 동네 기원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조남철’이란 이름은 곧 ‘최고수’로 통했다.

조남철 9단이 이런 대접을 받은 것은 그가 한국 현대바둑의 개척자이자 당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실력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광복 후 한국기원 창립, 프로기사 제도 도입, 최초의 정규 기전인 국수전 창설 등 한국 바둑사는 그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조 9단은 2004년 발간된 ‘조남철 회고록’에서 “바둑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일념뿐이었다”고 술회했다. 생전에 그는 “나는 평생 세 번 울었다. 일본 유학 시절 나라 없는 설움을 느꼈을 때, 6·25전쟁 와중에 운영하던 기원이 폭격에 무너져 내렸을 때, 1967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한국기원을 세웠을 때”였다고 말할 만큼 ‘바둑 입국’에 대한 의지를 갖고 이를 실천했다.

그는 1937년 14세에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떠나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9단 문하에 들어갔고 18세에 입단한 뒤 1944년 귀국했다. 귀국 직후인 1945년 서울 중구 남산동에 한국기원의 전신인 한성기원을 세우면서 ‘국제 경기에 대비해 순장바둑을 폐지하고 현대바둑으로 대체한다’ ‘내기바둑을 금하고 건전한 국민 오락으로 보급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1950년에는 최초의 단위(段位) 결정 경기를 열어 13명의 초단 기사를 배출하는 등 프로기사 제도를 확립했고 1956년에는 국수전 창립에도 참여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이 사람아, 그 대마는 조남철이 와도 못 살리네. 돌을 던지게.”

1970년대 중반까지 동네 기원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조남철’이란 이름은 곧 ‘최고수’로 통했다.

조남철 9단이 이런 대접을 받은 것은 그가 한국 현대바둑의 개척자이자 당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실력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광복 후 한국기원 창립, 프로기사 제도 도입, 최초의 정규 기전인 국수전 창설 등 한국 바둑사는 그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조 9단은 2004년 발간된 ‘조남철 회고록’에서 “바둑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일념뿐이었다”고 술회했다. 생전에 그는 “나는 평생 세 번 울었다. 일본 유학 시절 나라 없는 설움을 느꼈을 때, 6·25전쟁 와중에 운영하던 기원이 폭격에 무너져 내렸을 때, 1967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한국기원을 세웠을 때”였다고 말할 만큼 ‘바둑 입국’에 대한 의지를 갖고 이를 실천했다.

그는 1937년 14세에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떠나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9단 문하에 들어갔고 18세에 입단한 뒤 1944년 귀국했다. 귀국 직후인 1945년 서울 중구 남산동에 한국기원의 전신인 한성기원을 세우면서 ‘국제 경기에 대비해 순장바둑을 폐지하고 현대바둑으로 대체한다’ ‘내기바둑을 금하고 건전한 국민 오락으로 보급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1950년에는 최초의 단위(段位) 결정 경기를 열어 13명의 초단 기사를 배출하는 등 프로기사 제도를 확립했고 1956년에는 국수전 창립에도 참여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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