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를 녹인 ‘힘의 발레’
등록 2007.04.16.10일 마린스키 발레단의 솔리스트들이 출연한 ‘지젤’ 공연 때의 무덤덤한 반응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고려인 2세 안나 김(46·한국문학) 노보시비르스크대 교수는 “공연이 끝난 뒤 러시아 친구들이 벅찬 포옹을 아끼지 않았다”며 “러시아에 살면서 오늘처럼 모국인 한국이 자랑스러운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스파르타쿠스’는 기원전 1세기 로마제국을 충격으로 몰고 간 ‘노예들의 반란’을 형상화한 작품. 아람 하탸투랸(하차투리안)의 웅장한 음악과 유리 그리고로비치의 극적인 안무가 결합한 이 작품은 남성 발레의 ‘백조의 호수’로 불린다. 발레리나 중심의 다른 발레와 달리 50여 명의 발레리노의 아드레날린 가득한 군무가 압권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2001년 동양권 발레단으로서는 최초로 이 작품을 공연한 한국 국립발레단은 30여 명의 자체 남성단원으로 이를 감당하기 어려워 3분의 2 규모로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국립발레단은 이번에는 볼쇼이, 마린스키와 함께 러시아 3대 발레단으로 꼽히는 노보시비르스크 발레단과 합동공연을 기획했다.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노예군을 한국 발레리노들이,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러시아 발레리노들이 맡는 식으로 전 출연진을 절반씩 나누었다.
특히 14일에는 주역인 스파르타쿠스와 아내 프리기아 역을 한국의 이원국과 김주원이 맡고 크라수스와 그 애첩 예기나 역을 예브게니 그라첸코와 마리아 알라시(볼쇼이발레단)가 맡아 한국 노예군 대 러시아 로마군의 선명한 대립구도를 펼쳤다.
발레리노로서 환갑을 넘긴 41세의 나이로 엄청난 체력을 요구하는 스파르타쿠스에 2001년에 이어 재도전한 이원국은 혼신의 힘을 다한 점프와 턴으로 무대를 압도했다. 전날 약관의 나이에 스파르타쿠스 역을 맡아 현지에서도 화제가 됐던 로만 폴코브니코프조차 “감정 표현뿐 아니라 힘의 완급 조절까지 젊은 내가 미칠 수 없는 영역을 보여 줬다”며 “객석이 아니라 강의석에 앉아서 특강을 받은 느낌”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2001년 공연 때는 요염한 예기나 역을 위해 태어났다는 평을 받았던 김주원은 이번엔 애절한 프리기아 역까지 완벽히 소화해 내는 야누스 같은 연기로 찬사를 받았다. 이원국과 혼연일체의 호흡을 보여 준 한국 발레단의 군무에 대해서도 찬사가 쏟아졌다. 노보시비르스크 국립발레학교 학생인 올랴 포제스카(15) 양은 “솔리스트도 탁월했지만 음악과 하나가 돼 물 흐르듯이 펼쳐진 남성 군무가 더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13, 14일 공연을 모두 본 나탈리야 바포바(39·치과 의사) 씨는 “13일 공연의 크라수스(장운규), 예기나(김리회)와 오늘 공연의 스파르타쿠스, 프리기아가 한무대에 서는 한국팀만의 공연이 보고 싶어졌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갈라 발레공연을 통해 러시아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 국립발레단은 이날 ‘스파르타쿠스’를 통해 ‘시베리아의 심장’ 노보시비르스크를 점령함으로써 세계 발레의 수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향한 서진(西進)을 계속하게 됐다.
한국과 러시아 합동공연팀은 무대를 한국으로 옮겨 20∼25일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시베리아를 녹여 버린 이날 밤의 열정을 전한다.
노보시비르스크=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스파르타쿠스 역 이원국 씨
“한국 발레에 대한 편견 깨고 싶었다”
“스파르타쿠스가 곧 나라는 생각에 정말 한 방울의 땀도 아끼고 싶지 않았습니다.”
14일 ‘스파르타쿠스’ 공연에서 발레리노 이원국(41) 씨는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한 춤을 펼쳤다. 특히 노예 출신 검투사들의 반란을 설득하는 1막 4장에서 노예 역을 맡은 한국 발레리노들과 하나가 된 춤사위는 소름이 끼칠 만큼 힘차고 강렬했다.
“스파르타쿠스가 자유를 위해 싸웠다면 제게 그 자유는 예술이었습니다. 한국 발레에 대한 편견과 무관심을 깨뜨리고 싶었어요.”
발레의 본고장 러시아에서 한국과 러시아 발레단원이 동등하게 참여한 이번 공연의 의미가 달랐다는 얘기다.
“오늘 아침부터 후배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힘내십시오, 형님’이라며 어깨를 주무르거나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더라고요. ‘얘들이 왜 이러나’ 했는데 ‘자신들을 대표해서 한국 발레의 한을 꼭 풀어 달라’는 메시지를 전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아니나 다를까 13일 공연과 달리 노예들의 군무 동작과 각도가 빈틈없이 일치하더군요.”
그랬다. 한국 발레단원들은 영화 ‘300’에 나오는 스파르타의 전사들을 연상시켰다. 마지막 커튼콜 시간에는 이 씨의 손짓에 맞춰 “핫”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깜짝쇼를 펼치며 그에게 아낌없는 경의를 표했다.
발레는 정말 무언의 예술이었다. 세르게이 크룹코 노보시비르스크 발레단 예술감독은 이 씨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오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내가 진짜 스파르타쿠스다!’라고.”
노보시비르스크=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14일은 한국의 발레가 러시아 발레극장을 점령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한국 국립발레단과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국립발레단의 합동공연으로 13일부터 이틀간 펼쳐진 ‘스파르타쿠스’ 공연의 피날레가 있던 이날 밤. 지름 60m, 높이 35m의 돔을 포함해 러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노보시비르스크 국립오페라발레극장의 1762석은 일찍부터 매진됐다. 공연 중간 중간 “말라치”(‘훌륭하다’라는 뜻의 러시아 말)와 “브라보”라는 탄성과 함께 터져 나오던 박수는 2시간 40분에 걸친 공연이 끝난 뒤 10여 분간의 기립박수로 이어졌다.
10일 마린스키 발레단의 솔리스트들이 출연한 ‘지젤’ 공연 때의 무덤덤한 반응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고려인 2세 안나 김(46·한국문학) 노보시비르스크대 교수는 “공연이 끝난 뒤 러시아 친구들이 벅찬 포옹을 아끼지 않았다”며 “러시아에 살면서 오늘처럼 모국인 한국이 자랑스러운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스파르타쿠스’는 기원전 1세기 로마제국을 충격으로 몰고 간 ‘노예들의 반란’을 형상화한 작품. 아람 하탸투랸(하차투리안)의 웅장한 음악과 유리 그리고로비치의 극적인 안무가 결합한 이 작품은 남성 발레의 ‘백조의 호수’로 불린다. 발레리나 중심의 다른 발레와 달리 50여 명의 발레리노의 아드레날린 가득한 군무가 압권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2001년 동양권 발레단으로서는 최초로 이 작품을 공연한 한국 국립발레단은 30여 명의 자체 남성단원으로 이를 감당하기 어려워 3분의 2 규모로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국립발레단은 이번에는 볼쇼이, 마린스키와 함께 러시아 3대 발레단으로 꼽히는 노보시비르스크 발레단과 합동공연을 기획했다.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노예군을 한국 발레리노들이,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러시아 발레리노들이 맡는 식으로 전 출연진을 절반씩 나누었다.
특히 14일에는 주역인 스파르타쿠스와 아내 프리기아 역을 한국의 이원국과 김주원이 맡고 크라수스와 그 애첩 예기나 역을 예브게니 그라첸코와 마리아 알라시(볼쇼이발레단)가 맡아 한국 노예군 대 러시아 로마군의 선명한 대립구도를 펼쳤다.
발레리노로서 환갑을 넘긴 41세의 나이로 엄청난 체력을 요구하는 스파르타쿠스에 2001년에 이어 재도전한 이원국은 혼신의 힘을 다한 점프와 턴으로 무대를 압도했다. 전날 약관의 나이에 스파르타쿠스 역을 맡아 현지에서도 화제가 됐던 로만 폴코브니코프조차 “감정 표현뿐 아니라 힘의 완급 조절까지 젊은 내가 미칠 수 없는 영역을 보여 줬다”며 “객석이 아니라 강의석에 앉아서 특강을 받은 느낌”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2001년 공연 때는 요염한 예기나 역을 위해 태어났다는 평을 받았던 김주원은 이번엔 애절한 프리기아 역까지 완벽히 소화해 내는 야누스 같은 연기로 찬사를 받았다. 이원국과 혼연일체의 호흡을 보여 준 한국 발레단의 군무에 대해서도 찬사가 쏟아졌다. 노보시비르스크 국립발레학교 학생인 올랴 포제스카(15) 양은 “솔리스트도 탁월했지만 음악과 하나가 돼 물 흐르듯이 펼쳐진 남성 군무가 더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13, 14일 공연을 모두 본 나탈리야 바포바(39·치과 의사) 씨는 “13일 공연의 크라수스(장운규), 예기나(김리회)와 오늘 공연의 스파르타쿠스, 프리기아가 한무대에 서는 한국팀만의 공연이 보고 싶어졌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갈라 발레공연을 통해 러시아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 국립발레단은 이날 ‘스파르타쿠스’를 통해 ‘시베리아의 심장’ 노보시비르스크를 점령함으로써 세계 발레의 수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향한 서진(西進)을 계속하게 됐다.
한국과 러시아 합동공연팀은 무대를 한국으로 옮겨 20∼25일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시베리아를 녹여 버린 이날 밤의 열정을 전한다.
노보시비르스크=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스파르타쿠스 역 이원국 씨
“한국 발레에 대한 편견 깨고 싶었다”
“스파르타쿠스가 곧 나라는 생각에 정말 한 방울의 땀도 아끼고 싶지 않았습니다.”
14일 ‘스파르타쿠스’ 공연에서 발레리노 이원국(41) 씨는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한 춤을 펼쳤다. 특히 노예 출신 검투사들의 반란을 설득하는 1막 4장에서 노예 역을 맡은 한국 발레리노들과 하나가 된 춤사위는 소름이 끼칠 만큼 힘차고 강렬했다.
“스파르타쿠스가 자유를 위해 싸웠다면 제게 그 자유는 예술이었습니다. 한국 발레에 대한 편견과 무관심을 깨뜨리고 싶었어요.”
발레의 본고장 러시아에서 한국과 러시아 발레단원이 동등하게 참여한 이번 공연의 의미가 달랐다는 얘기다.
“오늘 아침부터 후배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힘내십시오, 형님’이라며 어깨를 주무르거나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더라고요. ‘얘들이 왜 이러나’ 했는데 ‘자신들을 대표해서 한국 발레의 한을 꼭 풀어 달라’는 메시지를 전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아니나 다를까 13일 공연과 달리 노예들의 군무 동작과 각도가 빈틈없이 일치하더군요.”
그랬다. 한국 발레단원들은 영화 ‘300’에 나오는 스파르타의 전사들을 연상시켰다. 마지막 커튼콜 시간에는 이 씨의 손짓에 맞춰 “핫”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깜짝쇼를 펼치며 그에게 아낌없는 경의를 표했다.
발레는 정말 무언의 예술이었다. 세르게이 크룹코 노보시비르스크 발레단 예술감독은 이 씨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오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내가 진짜 스파르타쿠스다!’라고.”
노보시비르스크=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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