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세자-궁녀 은밀한 로맨스에…헉!
등록 2013.02.22.20세기 초까지 구전됐던 조선시대 가사(歌辭) ‘화조가(花鳥歌)’의 지은이가 확인됐다. 화조가는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세자와 궁녀의 합작품이었다.
신경숙 한성대 국문학과 교수는 21일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소가 소장한 19세기 고서 ‘ㅱ가사’ 등에서 화조가가 효명세자(孝明世子·1809∼1830)와 조맹화라는 궁녀가 함께 지은 가사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를 찾았다”고 밝혔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하던 시절에 진찬(進饌·왕실 연회)에서 지어진 것이라는 설명이다.
화조가는 4음보 1행을 이루는 한글 가사. 실린 책에 따라 차이를 보이나 일반적으로 전체 44∼48행 안팎이다. 태평성대를 맞아 왕실을 찬양하고 꽃과 새를 벗 삼아 살겠다는 내용이다. 1947년 ‘조선민요집성’에는 주로 영남에서 전해진 내방가사로 소개됐다. 다만 학계는 가사에 집춘문과 춘당대 같은 궁궐 구조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궁궐 사정을 잘 아는 이가 지었을 것으로 짐작해 왔다.
그러나 신 교수는 화조가가 실린 고서 17종을 검토해 지은이를 유추할 수 있는 흔적 3가지를 발견했다. 먼저 가사 모음집인 ‘ㅱ가사’에 실린 ‘화쵸가’ 서두에 “진쟝각 죠맹화는 화쵸가를 지은지라”는 대목이 나온다. 진장각(珍藏閣)은 창덕궁 연경당 터에 있던 건물로 선대 임금과 중국 황제의 어진(御眞)을 모시던 곳이다. 또 단국대가 소장한 19세기 두루마리 필사본은 제목 자체가 ‘익종대왕(효명세자) 화소가’다.
1940년 조선어학회가 발행한 ‘한글’ 8권에도 단서가 있다. “우에 두 귀글(2행)은 인종대왕(익종의 와전) 지으시고 사십육귀(46행)난 주맹희라 하는 궁녀 지은 게라”라는 부가설명이 나온다. 신 교수는 “세 자료를 종합하면 궁녀가 지어올린 가사에 세자가 화답해 두 문장을 하사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민간으로 퍼지며 출처가 불분명해졌다는 설명이다.
남녀가 유별한 유교사회, 그것도 궁중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조명철 고려대 사학과 교수는 “지엄한 조선 왕실에서 세자와 궁녀가 공개적으로 함께 글을 짓는 건 불가능하다”며 “신분을 뛰어넘은 ‘은밀한 로맨스’로 읽히기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 교수는 시대상을 감안할 때 이 작품은 ‘정치적 산물’이라고 해석했다. 효명세자는 순조의 맏아들로 태어나 21세에 갑작스레 훙서(薨逝)했다.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던 19세기 초, 병약한 임금을 대신해 왕권을 회복하려 애썼다. 짧은 대리청정(4년)이었지만 인재를 등용하고 법 집행이 엄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진장각 같은 주요 처소의 궁녀라면 이 상황을 모를 리 없다. 따라서 화조가는 왕실을 찬양한 ‘헌정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가사 속 “요순성대 다시차자 태평화조 잔채(잔치)한다”가 이를 뒷받침한다. 대리청정을 요순시대로 묘사한 것이다.
뒷자락에 나오는 ‘대명화(大明花)’와 ‘대보단(大報壇)’도 같은 맥락이다. 대명화는 안평대군이 명나라에서 하사받은 꽃, 대보단은 창덕궁의 명 황제 제단을 말한다. 둘은 조선 임금이 ‘절대불변의 군신관계’를 강조할 때 즐겨 쓰던 정치적 아이콘이다. 명과의 의리를 지키듯 왕에게 충성하란 뜻이다. 조맹화도 이를 상기시키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하다.
명민한 효명세자는 이를 적극 활용했다. 겨우 두 문장을 달았으나 메시지는 심오하다. ‘어와 가소롭다 남아평생 가소롭다/청츈사업 바랏드니 백두옹이 대단말가’는 얼핏 보면 노년의 한탄으로 들린다. 10대 세자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다. 신 교수는 “세월이 금세 흐르니 청춘사업(국정 쇄신의 대업)을 서두르겠다는 반어적 표현”이라고 말했다. 구전요로 묻힐 뻔한 가사에 왕권강화의 기치를 내걸었다 안타깝게 사그라진 왕세자의 복심(腹心)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신경숙 교수 “궁녀가 지은 가사에 효명세자 화답… 두 문장 하사한 합작품”
20세기 초까지 구전됐던 조선시대 가사(歌辭) ‘화조가(花鳥歌)’의 지은이가 확인됐다. 화조가는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세자와 궁녀의 합작품이었다.
신경숙 한성대 국문학과 교수는 21일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소가 소장한 19세기 고서 ‘ㅱ가사’ 등에서 화조가가 효명세자(孝明世子·1809∼1830)와 조맹화라는 궁녀가 함께 지은 가사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를 찾았다”고 밝혔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하던 시절에 진찬(進饌·왕실 연회)에서 지어진 것이라는 설명이다.
화조가는 4음보 1행을 이루는 한글 가사. 실린 책에 따라 차이를 보이나 일반적으로 전체 44∼48행 안팎이다. 태평성대를 맞아 왕실을 찬양하고 꽃과 새를 벗 삼아 살겠다는 내용이다. 1947년 ‘조선민요집성’에는 주로 영남에서 전해진 내방가사로 소개됐다. 다만 학계는 가사에 집춘문과 춘당대 같은 궁궐 구조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궁궐 사정을 잘 아는 이가 지었을 것으로 짐작해 왔다.
그러나 신 교수는 화조가가 실린 고서 17종을 검토해 지은이를 유추할 수 있는 흔적 3가지를 발견했다. 먼저 가사 모음집인 ‘ㅱ가사’에 실린 ‘화쵸가’ 서두에 “진쟝각 죠맹화는 화쵸가를 지은지라”는 대목이 나온다. 진장각(珍藏閣)은 창덕궁 연경당 터에 있던 건물로 선대 임금과 중국 황제의 어진(御眞)을 모시던 곳이다. 또 단국대가 소장한 19세기 두루마리 필사본은 제목 자체가 ‘익종대왕(효명세자) 화소가’다.
1940년 조선어학회가 발행한 ‘한글’ 8권에도 단서가 있다. “우에 두 귀글(2행)은 인종대왕(익종의 와전) 지으시고 사십육귀(46행)난 주맹희라 하는 궁녀 지은 게라”라는 부가설명이 나온다. 신 교수는 “세 자료를 종합하면 궁녀가 지어올린 가사에 세자가 화답해 두 문장을 하사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민간으로 퍼지며 출처가 불분명해졌다는 설명이다.
남녀가 유별한 유교사회, 그것도 궁중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조명철 고려대 사학과 교수는 “지엄한 조선 왕실에서 세자와 궁녀가 공개적으로 함께 글을 짓는 건 불가능하다”며 “신분을 뛰어넘은 ‘은밀한 로맨스’로 읽히기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 교수는 시대상을 감안할 때 이 작품은 ‘정치적 산물’이라고 해석했다. 효명세자는 순조의 맏아들로 태어나 21세에 갑작스레 훙서(薨逝)했다.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던 19세기 초, 병약한 임금을 대신해 왕권을 회복하려 애썼다. 짧은 대리청정(4년)이었지만 인재를 등용하고 법 집행이 엄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진장각 같은 주요 처소의 궁녀라면 이 상황을 모를 리 없다. 따라서 화조가는 왕실을 찬양한 ‘헌정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가사 속 “요순성대 다시차자 태평화조 잔채(잔치)한다”가 이를 뒷받침한다. 대리청정을 요순시대로 묘사한 것이다.
뒷자락에 나오는 ‘대명화(大明花)’와 ‘대보단(大報壇)’도 같은 맥락이다. 대명화는 안평대군이 명나라에서 하사받은 꽃, 대보단은 창덕궁의 명 황제 제단을 말한다. 둘은 조선 임금이 ‘절대불변의 군신관계’를 강조할 때 즐겨 쓰던 정치적 아이콘이다. 명과의 의리를 지키듯 왕에게 충성하란 뜻이다. 조맹화도 이를 상기시키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하다.
명민한 효명세자는 이를 적극 활용했다. 겨우 두 문장을 달았으나 메시지는 심오하다. ‘어와 가소롭다 남아평생 가소롭다/청츈사업 바랏드니 백두옹이 대단말가’는 얼핏 보면 노년의 한탄으로 들린다. 10대 세자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다. 신 교수는 “세월이 금세 흐르니 청춘사업(국정 쇄신의 대업)을 서두르겠다는 반어적 표현”이라고 말했다. 구전요로 묻힐 뻔한 가사에 왕권강화의 기치를 내걸었다 안타깝게 사그라진 왕세자의 복심(腹心)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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