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소개] 개인을 세공하는 힘 ‘이데올로기’

등록 2014.01.14.
‘해방’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

이 책 『이데올로기』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인간 ‘해방’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들이 아니다. 이 책은 혁명과 변혁을 주장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들을 분석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은 미와 성, 종교, 학교, 소비, 여성성, 대중음악, TV 등으로, 우리가 살면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문화적 구성 요소들이다. 말하자면, 저자는 우리의 일상적 삶의 단편들 하나하나가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언어학과 기호학을 전공한 저자에 따르면, 심지어 언어조차 이데올로기다. 영어에 대한 광신적 태도가 그렇다. 이데올로기는 해방의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그로부터 벗어나는 자만이 ‘해방’을 맛볼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이 자신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무식하고 변덕스러운 것인지 조금이나마 공감할 것이다. 그런 공감이 형성되면 우리가 죽자 살자 매달리는 가치관도 별게 아니라는 사실도 조금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찰리 채플린이 말했듯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우리 몸에 각인되었는지를 반드시 지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아직도 믿는 게 있다면 바로 이런 방법만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히 말하건대, 이 책은 자유를 위한 나의 작은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앎’을 전제로 비로소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전언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흔히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를 통해 사회학자들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와 다르다. 저명한 사회학자 대니얼 벨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하는 동명의 책에서 사회 계급의 양극화로서 현실을 설명하는 마르크스주의가 설득력을 잃었다고 분석한 바 있다. 화이트칼라의 급격한 성장으로 인해 마르크스의 분석이 그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 김광현이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대니얼 벨이 “사상을 사회적인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전환시킨 가치와 신념의 체계”로 정의하는 이데올로기와 다르다. 저자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범주는 이보다 훨씬 넓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데올로기를 “우리의 행태를 결정하는 사고방식과 가치관” 혹은 “틀에 박힌 사고방식”으로 정의한다.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공유하고 있는 가치관, 사고방식, 관념이라면 모두 이데올로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의 본연에 놓여 있는 의심의 해석학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개인을 세공하는 힘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의 공통된 속성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이데올로기는 집단의 것이자 익명의 사고다. 집단, 공동체, 사회가 이데올로기의 존재 조건인 셈이다. 또한 이데올로기는 은폐되어 있다. 그것은 다른 이름들, 이를테면 과학, 양식, 자명성, 도덕, 사실 등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저자는 문화적 이데올로기들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그러한 이데올로기들은 정치적 이데올로기, 특히 국가 이데올로기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국가라는 관념은 현대인의 삶에 너무나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그 자체가 매우 복합적인 역사적, 사회적 인과 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그러나 국가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국가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근현대사의 핵심을 구성한다. 김광현은 미셸 푸코의 권력 이론과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라는 개념을 통해 개인이 국민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에는 국가와 같은 거시 이데올로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알튀세르의 이론에 동감을 표하면서도, 알튀세르의 설명은 사회와 이데올로기의 변화 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국가 이데올로기의 다양한 장치들이 대중을 국민으로 훈육하는 데 동원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 개인의 정체성이 단지 그것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개인들이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는 과정과 사회 계층의 재생산 메커니즘을 부르디외의 아비튀스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개인이 위치하는 문화 공간의 상징 질서는 가정 및 교육 체계를 통하여 개인에게 내면화되어 사고, 판단, 취향의 체계인 아비튀스를 형성한다. 사회 재생산에 가장 효과적인 기구는 학교다. 가정에 이어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사회화 과정은 한 개인의 사회 계급에 일치하는 사고와 행동 및 성향의 체계, 즉 아비튀스를 재생산하며 계층 간의 불평등한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학교는 등급과 서열을 학생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그 서열에 따른 사회 계층으로의 편입을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여기게 한다. 개인들이 사회적 하위 계층으로 편입되어도 별 불만을 못 느끼고 그에 걸맞은 문화 소비에 만족하며 살 수 있는 것도 학교에서 학습을 통해 형성한 아비튀스의 결과다.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의 힘이다. 하지만 개인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인식이 이데올로기가 자신을 세공한 결과라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간다.



영원한 이데올로기는 없다

별의별 사람, 별의별 나라, 별의별 시대가 있었고, 모든 문화나 나라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활 방식을 당연시했지만, 한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당연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저자는 여러 개념들에 대한 역사적 인식의 변화를 통해 이데올로기가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테면 ‘미’에 관한 이데올로기를 다루는 장에서 저자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20세기까지 미의 기준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추적한다. 이를 통해 미의 기준 또한 시대적 산물임이 명확히 드러난다. 시대가 바뀌고 권력의 역학 관계가 바뀌면 미의 기준도 바뀌기 때문이다. 19세기에는 풍만한 여성이 아름답게 보였지만, 오늘날 여성의 풍만함은 신체적 콤플렉스로 탈바꿈했다. 미에 대한 보편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 또한 이를 증명한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성에 대해 관대하고 자유분방했다. 동성애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교회의 교리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던 중세에 성욕은 죄악이었다. 고대의 쾌락주의를 중세의 금욕주의가 대체한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할 것처럼 보였던 이러한 관념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다시 바뀐다. 인간의 육체를 재발견한 이 시대에 성욕은 다시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르네상스 시대의 성적 이데올로기는 중세의 금욕주의에 대한 강렬한 반동이었다.

모든 이데올로기에는 생존의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 따라서 생존의 조건이 변하면 이데올로기도 따라 변한다. 하지만 한 시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데올로기가 변화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간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이데올로기가 체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정신뿐 아니라 몸에도 침투한다. 사람들은 국가와 매스미디어, 학교가 주입하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특정 국가의 국민이 되고, 특정 방식으로 소비하고, 이런저런 계층에 편입된다.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관념들을 자연처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데올로기는 감옥이자 정체성이며, 차별이자 위선인 동시에 강력한 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과거의 이데올로기들을 자주 언급한다. 과거의 이데올로기들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것은 지금의 이데올로기들도 세월이 지나면 역시 이상하게 보일 수 있음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영원한 이데올로기는 없다.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알아차릴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지은이 김광현

1959년 인천 출생.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제3대학에서 언어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10살 때부터 정부 파견 의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가봉과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생활했고, 20대 초반에는 록밴드 마그마를 결성하여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다. 현재 대구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회가 생길 때마다 네팔, 인도, 캄보디아, 라오스, 모로코 등 세계 각지로 여행을 다니며 세상 사람들의 다양한 삶과 생활양식을 수첩과 카메라 렌즈에 담는 것을 즐기고 있다.

이 책 『이데올로기』에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문화를 일찍부터 경험하며, 한 사회와 국가를 지배하고 있는 생활방식 혹은 이데올로기의 보편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던 녹록치 않은 저자 김광현의 삶이 스며들어 있다. 당대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난 뒤 되돌아보면 괴이할 정도로 이상한 많은 이데올로기들을 확인하고 분석하면서, 김광현은 이데올로기를 이라고 규정한다. 지금 우리의 일상을 당연한 것처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들 또한 시간이 지나고 보면 괴이해 보일 수 있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심지어 신성시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저자 스스로 이 책을 이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김광현은 언어학과 이데올로기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썼고, 지은 책으로 『기호인가 기만인가』, 『대중문화의 이해』가, 옮긴 책으로『해석의 한계』, 『기호: 개념과 역사』, 『기호와 현대 예술』,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성과 사랑의 역사』 등이 있다.



동아닷컴 영상뉴스팀 이충진 기자 chris@donga.com

‘해방’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

이 책 『이데올로기』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인간 ‘해방’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들이 아니다. 이 책은 혁명과 변혁을 주장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들을 분석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은 미와 성, 종교, 학교, 소비, 여성성, 대중음악, TV 등으로, 우리가 살면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문화적 구성 요소들이다. 말하자면, 저자는 우리의 일상적 삶의 단편들 하나하나가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언어학과 기호학을 전공한 저자에 따르면, 심지어 언어조차 이데올로기다. 영어에 대한 광신적 태도가 그렇다. 이데올로기는 해방의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그로부터 벗어나는 자만이 ‘해방’을 맛볼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이 자신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무식하고 변덕스러운 것인지 조금이나마 공감할 것이다. 그런 공감이 형성되면 우리가 죽자 살자 매달리는 가치관도 별게 아니라는 사실도 조금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찰리 채플린이 말했듯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우리 몸에 각인되었는지를 반드시 지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아직도 믿는 게 있다면 바로 이런 방법만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히 말하건대, 이 책은 자유를 위한 나의 작은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앎’을 전제로 비로소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전언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흔히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를 통해 사회학자들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와 다르다. 저명한 사회학자 대니얼 벨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하는 동명의 책에서 사회 계급의 양극화로서 현실을 설명하는 마르크스주의가 설득력을 잃었다고 분석한 바 있다. 화이트칼라의 급격한 성장으로 인해 마르크스의 분석이 그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 김광현이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대니얼 벨이 “사상을 사회적인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전환시킨 가치와 신념의 체계”로 정의하는 이데올로기와 다르다. 저자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범주는 이보다 훨씬 넓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데올로기를 “우리의 행태를 결정하는 사고방식과 가치관” 혹은 “틀에 박힌 사고방식”으로 정의한다.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공유하고 있는 가치관, 사고방식, 관념이라면 모두 이데올로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의 본연에 놓여 있는 의심의 해석학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개인을 세공하는 힘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의 공통된 속성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이데올로기는 집단의 것이자 익명의 사고다. 집단, 공동체, 사회가 이데올로기의 존재 조건인 셈이다. 또한 이데올로기는 은폐되어 있다. 그것은 다른 이름들, 이를테면 과학, 양식, 자명성, 도덕, 사실 등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저자는 문화적 이데올로기들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그러한 이데올로기들은 정치적 이데올로기, 특히 국가 이데올로기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국가라는 관념은 현대인의 삶에 너무나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그 자체가 매우 복합적인 역사적, 사회적 인과 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그러나 국가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국가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근현대사의 핵심을 구성한다. 김광현은 미셸 푸코의 권력 이론과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라는 개념을 통해 개인이 국민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에는 국가와 같은 거시 이데올로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알튀세르의 이론에 동감을 표하면서도, 알튀세르의 설명은 사회와 이데올로기의 변화 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국가 이데올로기의 다양한 장치들이 대중을 국민으로 훈육하는 데 동원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 개인의 정체성이 단지 그것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개인들이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는 과정과 사회 계층의 재생산 메커니즘을 부르디외의 아비튀스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개인이 위치하는 문화 공간의 상징 질서는 가정 및 교육 체계를 통하여 개인에게 내면화되어 사고, 판단, 취향의 체계인 아비튀스를 형성한다. 사회 재생산에 가장 효과적인 기구는 학교다. 가정에 이어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사회화 과정은 한 개인의 사회 계급에 일치하는 사고와 행동 및 성향의 체계, 즉 아비튀스를 재생산하며 계층 간의 불평등한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학교는 등급과 서열을 학생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그 서열에 따른 사회 계층으로의 편입을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여기게 한다. 개인들이 사회적 하위 계층으로 편입되어도 별 불만을 못 느끼고 그에 걸맞은 문화 소비에 만족하며 살 수 있는 것도 학교에서 학습을 통해 형성한 아비튀스의 결과다.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의 힘이다. 하지만 개인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인식이 이데올로기가 자신을 세공한 결과라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간다.



영원한 이데올로기는 없다

별의별 사람, 별의별 나라, 별의별 시대가 있었고, 모든 문화나 나라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활 방식을 당연시했지만, 한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당연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저자는 여러 개념들에 대한 역사적 인식의 변화를 통해 이데올로기가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테면 ‘미’에 관한 이데올로기를 다루는 장에서 저자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20세기까지 미의 기준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추적한다. 이를 통해 미의 기준 또한 시대적 산물임이 명확히 드러난다. 시대가 바뀌고 권력의 역학 관계가 바뀌면 미의 기준도 바뀌기 때문이다. 19세기에는 풍만한 여성이 아름답게 보였지만, 오늘날 여성의 풍만함은 신체적 콤플렉스로 탈바꿈했다. 미에 대한 보편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 또한 이를 증명한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성에 대해 관대하고 자유분방했다. 동성애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교회의 교리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던 중세에 성욕은 죄악이었다. 고대의 쾌락주의를 중세의 금욕주의가 대체한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할 것처럼 보였던 이러한 관념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다시 바뀐다. 인간의 육체를 재발견한 이 시대에 성욕은 다시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르네상스 시대의 성적 이데올로기는 중세의 금욕주의에 대한 강렬한 반동이었다.

모든 이데올로기에는 생존의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 따라서 생존의 조건이 변하면 이데올로기도 따라 변한다. 하지만 한 시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데올로기가 변화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간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이데올로기가 체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정신뿐 아니라 몸에도 침투한다. 사람들은 국가와 매스미디어, 학교가 주입하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특정 국가의 국민이 되고, 특정 방식으로 소비하고, 이런저런 계층에 편입된다.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관념들을 자연처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데올로기는 감옥이자 정체성이며, 차별이자 위선인 동시에 강력한 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과거의 이데올로기들을 자주 언급한다. 과거의 이데올로기들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것은 지금의 이데올로기들도 세월이 지나면 역시 이상하게 보일 수 있음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영원한 이데올로기는 없다.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알아차릴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지은이 김광현

1959년 인천 출생.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제3대학에서 언어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10살 때부터 정부 파견 의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가봉과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생활했고, 20대 초반에는 록밴드 마그마를 결성하여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다. 현재 대구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회가 생길 때마다 네팔, 인도, 캄보디아, 라오스, 모로코 등 세계 각지로 여행을 다니며 세상 사람들의 다양한 삶과 생활양식을 수첩과 카메라 렌즈에 담는 것을 즐기고 있다.

이 책 『이데올로기』에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문화를 일찍부터 경험하며, 한 사회와 국가를 지배하고 있는 생활방식 혹은 이데올로기의 보편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던 녹록치 않은 저자 김광현의 삶이 스며들어 있다. 당대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난 뒤 되돌아보면 괴이할 정도로 이상한 많은 이데올로기들을 확인하고 분석하면서, 김광현은 이데올로기를 이라고 규정한다. 지금 우리의 일상을 당연한 것처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들 또한 시간이 지나고 보면 괴이해 보일 수 있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심지어 신성시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저자 스스로 이 책을 이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김광현은 언어학과 이데올로기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썼고, 지은 책으로 『기호인가 기만인가』, 『대중문화의 이해』가, 옮긴 책으로『해석의 한계』, 『기호: 개념과 역사』, 『기호와 현대 예술』,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성과 사랑의 역사』 등이 있다.



동아닷컴 영상뉴스팀 이충진 기자 ch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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