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 안돌리면 단속”… 룸살롱 사장, 명절 떡값만 3000만원

등록 201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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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09-01 03:00:00 수정 2014-09-01 03:00:00

[국가대혁신 ‘골든타임’]관행이 돼 버린 부정부패

‘乙’이 말하는 민낯

서울에서 20년 넘게 유흥주점을 운영했던 서상욱(가명·52) 씨. 서 씨가 운영했던 업소들은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 룸살롱이다. 하루 일하는 여종업원만 300명에 이르고 하루 손님은 800명 안팎인 대형 업소들이다.

매년 추석이 다가오면 서 씨의 수첩은 수많은 약속으로 빼곡히 채워진다. 대부분 관할 경찰서나 구청 직원들이다. 그와 만나고 헤어지는 공무원의 양복 안주머니에는 늘 흰 봉투가 꽂혔다고 한다. 이른바 명절 ‘떡값’이다. 보통 과장은 150만 원, 계장이나 팀장은 100만 원, 일반 직원은 50만 원이 ‘공정가’다. 부서나 팀에 1000만 원이 든 봉투를 통째로 건넨 적도 있다. 서 씨는 이처럼 추석이나 명절 때 쓰는 돈이 많을 때면 3000만 원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공들인 대가로 서 씨가 얻는 것은 단속 정보다. 담당 직원이 바뀌어도 큰 문제가 없다. 2년 전 유흥주점 운영을 그만둔 서 씨는 “나쁜 건 알지만 주고받는 사람이 없어지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필요악’”이라며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서 씨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부정부패는 무수히 많은 갑과 을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혈연 지연 학연을 앞세워 관행처럼 이뤄지는 로비문화는 부정부패에 대한 의식마저 마비시키고 있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만난 갑과 을은 하나같이 “어쩔 수 없다”며 똑같은 변명을 늘어놓기에 급급했다.



○ 관리 비결은 결국 ‘돈봉투’

“5년 넘게 대형마트에 납품했지만 로비 없이는 1년도 불가능했다. 정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돈을 건네고 접대를 했다.”

최근까지 포장지 생산업체를 운영했던 정현경(가명·48·여) 씨는 대형마트 납품 과정의 기억을 떠올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믿음직한 거래처를 갖고 있다는 안도감보다 수시로 오는 접대 요구에 늘 불안에 떨었기 때문이다.

접대의 양태도 각양각색이었다. 대형마트 본사 담당 부서의 회식비를 대납하는 것은 기본. 개인적으로 ‘술 한잔 먹자’는 연락이 오면 따로 챙겨줄 돈을 준비했다. 한 직원에게는 차명계좌를 만들어 납품액의 1%를 상납하기도 했다. 심지어 낚시를 즐기는 담당자를 위해 고가의 낚시용품을 구입해 건넨 일도 있다.

지방의 한 대학에서 수년째 시간강사를 하고 있는 박모 씨(43)는 3개월에 한 번씩 학과장 부인에게 50만 원대의 화장품을 선물한다. 한 달에 120만∼200만 원 벌고 있지만 교수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로비다. 교수 논문을 대필하는 것은 기본이다. 박 씨에게는 “학과 교수들의 자가용을 모두 바꿔주면 교수가 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남의 얘기 같지 않다. 그는 “지방대의 경우 2억 원이면 어렵지 않게 교수로 채용된다는 얘기가 지금도 돌고 있다”고 귀띔했다.

관리의 최고는 연예인 매니저다. 10년 넘게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이진욱(가명·36) 씨는 방송국에 갈 때마다 복도에 있는 음료수 자판기에 동전을 잔뜩 넣어놓는다. PD뿐 아니라 작가 등 방송국 직원 모두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다. 과거에는 CD케이스에 10만 원씩 넣어 돌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엔 자판기 동전 채워 넣기 같은 ‘센스’가 더 인정받는다. 맛집 리스트를 외워 PD에게 접대하거나 회식이 있으면 끝날 무렵 등장해 계산한 뒤 대리운전을 자처하는 것은 애교 수준이다. 이 씨는 “특정 인기 프로그램에 출연하려면 적지 않은 금액을 건네는 관행이 아직 남아 있다”고 털어놨다.



○ 10명의 을, “불법 로비 근절은 불가능”

대기업에서 대관업무(공공기관을 상대하는 일)를 맡고 있는 박현우(가명·35) 씨의 담당 기관은 국회다. 그는 입법 로비를 위해 촌지를 건네는 사람들을 하수(下手)라고 여긴다. 박 씨가 생각하는 진정한 로비는 서로가 ‘윈윈’하는 것. 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의원실과 기업의 현실을 읍소하려는 담당자가 만날 때 ‘거래’는 성사된다. 특히 국회의원 보좌관에게 비싼 밥을 사며 원하는 것은 규제 관련 정보다. 규제 하나에 기업의 생사가 오가는 처지이다 보니 규제 신설이나 완화 관련 정보는 입수하는 대로 회사에 보고한다.

스포츠계에선 대학 체육부 감독이나 코치가 학부모에게서 돈을 받고 선수를 부정 입학시키는 일이 끊이지 않는다. 의료기기·제약회사가 납품 대가로 병의원에 돈을 건네거나 관련 학회를 지원하는 것도 고질병 가운데 하나다.

갑을 상대하는 을들은 불법로비로 싹튼 부정부패가 사회 전체로 볼 때 손해라는 걸 잘 안다. 그렇지만 로비를 멈출 수 없다고 한다. 내가 안 하면 다른 누군가가 하기 때문이다. “불법로비를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겠느냐”는 취재팀의 질문을 받은 10명의 을은 하나같이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강은지 kej09@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황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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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09-01 03:00:00 수정 2014-09-01 03:00:00

[국가대혁신 ‘골든타임’]관행이 돼 버린 부정부패

‘乙’이 말하는 민낯

서울에서 20년 넘게 유흥주점을 운영했던 서상욱(가명·52) 씨. 서 씨가 운영했던 업소들은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 룸살롱이다. 하루 일하는 여종업원만 300명에 이르고 하루 손님은 800명 안팎인 대형 업소들이다.

매년 추석이 다가오면 서 씨의 수첩은 수많은 약속으로 빼곡히 채워진다. 대부분 관할 경찰서나 구청 직원들이다. 그와 만나고 헤어지는 공무원의 양복 안주머니에는 늘 흰 봉투가 꽂혔다고 한다. 이른바 명절 ‘떡값’이다. 보통 과장은 150만 원, 계장이나 팀장은 100만 원, 일반 직원은 50만 원이 ‘공정가’다. 부서나 팀에 1000만 원이 든 봉투를 통째로 건넨 적도 있다. 서 씨는 이처럼 추석이나 명절 때 쓰는 돈이 많을 때면 3000만 원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공들인 대가로 서 씨가 얻는 것은 단속 정보다. 담당 직원이 바뀌어도 큰 문제가 없다. 2년 전 유흥주점 운영을 그만둔 서 씨는 “나쁜 건 알지만 주고받는 사람이 없어지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필요악’”이라며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서 씨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부정부패는 무수히 많은 갑과 을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혈연 지연 학연을 앞세워 관행처럼 이뤄지는 로비문화는 부정부패에 대한 의식마저 마비시키고 있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만난 갑과 을은 하나같이 “어쩔 수 없다”며 똑같은 변명을 늘어놓기에 급급했다.



○ 관리 비결은 결국 ‘돈봉투’

“5년 넘게 대형마트에 납품했지만 로비 없이는 1년도 불가능했다. 정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돈을 건네고 접대를 했다.”

최근까지 포장지 생산업체를 운영했던 정현경(가명·48·여) 씨는 대형마트 납품 과정의 기억을 떠올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믿음직한 거래처를 갖고 있다는 안도감보다 수시로 오는 접대 요구에 늘 불안에 떨었기 때문이다.

접대의 양태도 각양각색이었다. 대형마트 본사 담당 부서의 회식비를 대납하는 것은 기본. 개인적으로 ‘술 한잔 먹자’는 연락이 오면 따로 챙겨줄 돈을 준비했다. 한 직원에게는 차명계좌를 만들어 납품액의 1%를 상납하기도 했다. 심지어 낚시를 즐기는 담당자를 위해 고가의 낚시용품을 구입해 건넨 일도 있다.

지방의 한 대학에서 수년째 시간강사를 하고 있는 박모 씨(43)는 3개월에 한 번씩 학과장 부인에게 50만 원대의 화장품을 선물한다. 한 달에 120만∼200만 원 벌고 있지만 교수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로비다. 교수 논문을 대필하는 것은 기본이다. 박 씨에게는 “학과 교수들의 자가용을 모두 바꿔주면 교수가 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남의 얘기 같지 않다. 그는 “지방대의 경우 2억 원이면 어렵지 않게 교수로 채용된다는 얘기가 지금도 돌고 있다”고 귀띔했다.

관리의 최고는 연예인 매니저다. 10년 넘게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이진욱(가명·36) 씨는 방송국에 갈 때마다 복도에 있는 음료수 자판기에 동전을 잔뜩 넣어놓는다. PD뿐 아니라 작가 등 방송국 직원 모두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다. 과거에는 CD케이스에 10만 원씩 넣어 돌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엔 자판기 동전 채워 넣기 같은 ‘센스’가 더 인정받는다. 맛집 리스트를 외워 PD에게 접대하거나 회식이 있으면 끝날 무렵 등장해 계산한 뒤 대리운전을 자처하는 것은 애교 수준이다. 이 씨는 “특정 인기 프로그램에 출연하려면 적지 않은 금액을 건네는 관행이 아직 남아 있다”고 털어놨다.



○ 10명의 을, “불법 로비 근절은 불가능”

대기업에서 대관업무(공공기관을 상대하는 일)를 맡고 있는 박현우(가명·35) 씨의 담당 기관은 국회다. 그는 입법 로비를 위해 촌지를 건네는 사람들을 하수(下手)라고 여긴다. 박 씨가 생각하는 진정한 로비는 서로가 ‘윈윈’하는 것. 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의원실과 기업의 현실을 읍소하려는 담당자가 만날 때 ‘거래’는 성사된다. 특히 국회의원 보좌관에게 비싼 밥을 사며 원하는 것은 규제 관련 정보다. 규제 하나에 기업의 생사가 오가는 처지이다 보니 규제 신설이나 완화 관련 정보는 입수하는 대로 회사에 보고한다.

스포츠계에선 대학 체육부 감독이나 코치가 학부모에게서 돈을 받고 선수를 부정 입학시키는 일이 끊이지 않는다. 의료기기·제약회사가 납품 대가로 병의원에 돈을 건네거나 관련 학회를 지원하는 것도 고질병 가운데 하나다.

갑을 상대하는 을들은 불법로비로 싹튼 부정부패가 사회 전체로 볼 때 손해라는 걸 잘 안다. 그렇지만 로비를 멈출 수 없다고 한다. 내가 안 하면 다른 누군가가 하기 때문이다. “불법로비를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겠느냐”는 취재팀의 질문을 받은 10명의 을은 하나같이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강은지 kej09@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황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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